공(公)의 성(姓)은 천(泉)이고, 휘(諱)는 남생(男生)이며, 자(字)는 원덕(元德)이다. 요동군(遼東郡) 평양성(平壤城) 사람이다. 그 선조는 본래 샘에서 나왔으니, 애초에 영혼이 잉태됨으로써 복을 받은 것이다. 마침내 태어난 유래로써 가계의 이름을 붙였다. ……(중략)…… 증조(曾祖)는 자유(子遊)이고, 조부는 태조(太祚)로 모두 막리지(莫離支)
를 역임하였다. 부친은 개금(蓋金)
으로 태대대로(太大對盧)
를 역임하였으니, 조부나 부친이나 가업을 이어 모두 병권(兵鈐)을 잡고 나라의 권력을 독점하였다. ……(중략)…… 나이 겨우 9세(642)에 이미 선인(先人)을 수여받았고, 부친의 음덕으로 낭(郞)이 되었다. 진예(榛穢)
에 임명되었고,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을 겸하여 수여받았으며, 32세(665)에 태막리지(太莫離支)
를 더하여 받아 군사와 나라의 정치를 총괄하였으니, 최고위 재상이었다. ……(중략)…… 공은 일의 어그러짐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에 변경의 백성에게 나아가 위무하고 변경 지역을 순행하며 우이(嵎夷)의 옛 영토를 안무하고 희중(羲仲)과 같은 새로운 관직을 요청하고자 하였다.1)
[그런데] 두 아우 남산(男産)과 남건(男建)은 하루아침에 흉학하고 패악해져 병력을 일으켜 안에서 항거하였다. 금가락지 낀 어린 아들은 무고하게 살해되었으니, 좋은 음식이 차려진 연회의 자리에서 문득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는 것이 멈추어졌다.
'막리지(莫離支)' 관련자료
'개금(蓋金)' 관련자료
'태대대로(太大對盧)' 관련자료
덤불과 잡초라는 뜻으로. 옳지 못한 정치를 이름
에 입문해 바른말을 하는 것에 조리가 있었으니 하늘의 일을 대신한 것이었고, 정치를 바로잡는 영예에 오를 수 있었다. 나이 15세(648)에 중리소형(中裏小兄)을 수여받았고, 18세(651)에 중리대형(中裏大兄)을 수여받았다. 나이 23세(656)에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에 전임되었다. 24세(657)에 장군(將軍)을 겸하여 수여받았는데 다른 관직은 이전과 같았다. 28세(661)에 막리지(莫離支)
'막리지(莫離支)' 관련자료
'태막리지(太莫離支)' 관련자료
1)
『서경(書經)』 「요전(堯典)」에는 “요(堯)임금이 [신하]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沝夷)의 땅에 자리잡게 하였는데, 양곡(暘谷)이라 한다. [堯命羲仲宅沝夷, 曰暘谷]”라고 전하는데, 양곡은 해 뜨는 곳이라는 뜻으로 동방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은 천남생이 고구려의 최고위 재상으로서 동방의 옛 땅을 다스리고 그에 대한 관직을 당(唐)나라에 요청하고자 하였다는 의미이다.
공은 형제의 관계가 무너졌다고 여기고, 이윽고 눈물을 흘리며 격문을 급히 보냈다. 동맹(同盟)이 비처럼 모이니 마침내 분연히 창을 들었다. 장차 평양을 무너뜨려 악의 근원을 사로잡고자 하였다. 먼저 오골(烏骨)의 교외에 이르렀고, 또한 크고 견고한 성루(城壘)를 격파하였으며, 그 적을 없애고 북을 치며 행진하였다. 그리고 대형(大兄) 불덕(弗德) 등을 보내 입조하여 표를 올리도록 하고, 그동안의 행적을 아뢰려고 하였는데, 마침 내부에서 이반(離叛)이 있어 불덕은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공은 이에 요동에서 군사를 돌려 군대를 해북(海北)으로 옮겼지만, 마음은 황제의 궁궐로 달려가고 있었다. 현도성(玄菟城)에서 몸을 삼가면서 다시 대형(大兄) 염유(冉有)를 보내 거듭 정성스러움을 알렸다. ……(중략)……
건봉(乾封) 원년(666)에 공은 다시 아들 헌성(獻誠)을 보내어 입조하도록 하였다. 황제는 기뻐하며 멀리서 공에게 특진(特進), 예전과 같은 태대형(太大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 겸 사지절(使持節) 안무대사(按撫大使)를 제수하여 고구려[本蕃]의 군대를 이끌도록 하였으며, 아울러 대총관 계필하력(契苾何力) 등과 경략을 맡아 보도록 하였다. 공은 국내성(國內城)
등 6성(城)과 10여만 호(戶)의 서적(書籍)과 군대를 이끌었으며, 또한 목저성(木底城) 등 3성(城)이 교화를 바라며 정성을 함께하니, [이로써] 적은 위태로워졌으며 나날이 궁박해져 갔다. [건봉] 2년(667)에 조서를 받들어 공이 입조하였다. 총장(總章) 원년(668)에 사지절(使特節) 요동대도독(遼東大都督) 상주국(上柱國) 현도군개국공(玄菟郡開國公)을 제수 받고, 식읍(食邑) 2000호(戶)를 받았으며, 나머지 관직을 이전과 같이하였다. 적이 정차 기울어지려고 하였는데, 천자의 명이 있어 개마(蓋馬)의 군영에서 되돌아왔다. 그해 가을, 조서를 받들어 사공(司空)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과 경략을 책임지고 바람과 번개처럼 달려가 곧바로 평양성에 임하였으니, 앞뒤로 노래 부르고 춤추며 높은 성채를 요동치도록 하였다. 공은 죄인을 벌하고 백성을 위문하고자 생각하여 그 참혹한 죽음을 불쌍히 여겼다. [그리하여] 은밀히 기회를 보아 이 백성과 땅을 구제하고자 하니, 마침내 신성(信誠) 등이 내외에서 상응하였고, 성에 올라 기를 뽑았다. ……(중략)……
'태대형(太大兄)' 관련자료
'국내성(國內城)' 관련자료
의봉(儀鳳) 4년(679) 정월 29일에 [공이] 병을 얻어 안동부(安東府)의 관사(官舍)에서 돌아가시니, 춘추(春秋) 46세였다.
「천남생묘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