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일에 대사도(大司徒)
, 태감(太監)
을 석방하여 순군제공(巡軍提控)으로 삼아 왕을 호위케 하였다. 그리고 홍언박(洪彦博)을 우정승으로, 윤환(尹桓)을 좌정승으로, 원호(元顥)를 판삼사
사로, 허백(許伯)과 황석기(黃石奇)를 찬성사로, 전보문(全普門)과 한가귀(韓可貴)를 삼사
우사와 삼사
좌사로, 김일봉(金逸逢)과 김용(金鏞) 및 인당(印璫)을 첨의평리(僉議評理)
⋅권겸⋅노책의 일당을 놓아주었다는 이유로 원호와 한가귀 및 면성군(沔城君) 구영검(具榮儉)을 옥에 가두었다 죽이고 그들의 집을 몰수하였다.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
예조판서
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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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우두머리
권겸(權謙), 경양부원군 노책(盧頙)이 반역을 도모하다 처단되었으며 그들의 친당들은 모두 도망쳤다. 궁성은 계엄 중에 있었으므로 정지상(鄭之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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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도첨의사사와 도첨의부, 문하부에 둔 종2품 벼슬
로 임명하였다. 얼마 안 되어 고의로 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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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행성의 부속 관서 중 가장 강력한 기구로 개경
에 대원 관계 범죄를 다스렸던 기구
를 철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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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리 인당과 동지밀직사
사 강중경(姜仲卿)을 서북면병마사
로, 사윤 신순(辛珣), 유홍(兪洪), 전 대호군 최영
, 전 부정 최부개(崔夫介)를 부사로 임명하여 압록강 건너의 여덟 참(站)을 공격토록 하였다. 밀직부사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
로, 전 대호군 공천보(貢天甫)와 전 종부령 김원봉(金元鳳)을 그 부사로 임명하여 쌍성 등지를 수복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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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권39, 「세가」39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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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신돈(辛旽)
을 봉하여 진평후(眞平侯)를 삼으니 이때부터 그를 떠받듬으 날마다 심해졌다. 얼마 후에는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 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 취성 부원군(鷲城府院君)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兼)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를 제수하고 비로소 신돈(辛旽)
으로 이름을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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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왕이 재위한 지 오래되었으나 재상이 많이 뜻에 맞지 않았으므로 일찍이 말하기를, “세신(世臣) 대족(大族)은 친한 무리들끼리 서로 얽혀 서로를 보호한다. 초야의 신진은 마음가짐과 행동을 속이며 명예를 탐하다 귀족이 되면 가문이 한미함을 부끄럽게 여겨 대족(大族)과 혼인하여서 그 처음의 생각과 행동을 버린다. 유생은 유약하여 강직함이 적고 또 문생(門生)이니 좌주(座主)
니 동년(同年)이라 칭하며 같은 무리끼리 서로 돈독하고 그 정(情)에 따르니, 3자는 모두 쓰기에 부족하다”라고 하면서, 세상과 떨어져 홀로 뜻을 세운 사람을 얻어 그를 크게 써서 거듭되는 폐단을 고치려고 생각하였다. 신돈
을 보자 도(道)를 얻어 욕심이 적으며 또 미천하여 가까운 무리가 없으니 큰 일을 맡기면 반드시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마침내 승려인 그를 발탁하여 의심 없이 국정(國政)을 맡기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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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에게 수행(修行)을 굽혀 세상을 구할 것을 청하자 신돈
은 겉으로 따르지 않는 척하여 왕의 뜻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왕이 강하게 요청하자 신돈
이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왕과 대신이 참소하고 이간질하는 말을 많이 믿는다 하오니, 바라건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세상을 복되고 이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직접 맹세하는 글을 써서 이르길, “스승은 나를 구하고 나는 스승을 구할 것이며, 절대 다른 사람의 말에 현혹되지 않을 것을 부처와 하늘 앞에 맹세하노라” 하였다. 이후 함께 나랏일을 의논하니, 권세를 마음대로 한 지 한 달 만에 대신들을 참소하여 영도첨의(領都僉議) 이공수(李公遂), 시중(侍中) 경천흥(慶千興), 판삼사
사(判三司事) 이수산(李壽山), 찬성사(贊成事) 송경(宋卿), 밀직(密直) 한공의(韓公義), 정당(政堂) 원송수(元松壽), 동지밀직(同知密直) 왕중귀(王重貴) 등을 파직하여 쫓아냈다. 그리고 총재(宰)와 대간(臺諫)
이 모두 그가 말한 대로 임명되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영도첨의(領都僉議) 자리를 스스로 차지하였다. 처음 궁궐에서 나와 기현(奇顯)의 집에 임시로 머물렀는데 백관이 그 집으로 찾아가 나랏일을 의논하였다.
'신돈'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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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 관련자료
'대간(臺諫)' 관련자료
『고려사』권132, 「열전」45 [반역6] 신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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