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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부의 축적과 소유권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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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

사라(斯羅) 훼(喙)(부)의 사부지왕(斯夫智王)⋅내지왕(乃智王), 이 두 왕이 (판결하여) 교(敎)를 내리셨다. 진이마촌(珍而麻村)에 사는 절거리(節居利)의 그것을 증명한 것이었는데, 그로 하여금 재물을 얻게 한다는 교(敎)이셨다.

계미년(癸未年) 9월 25일 사훼(沙喙)(부)의 지도로(至都盧) 갈문왕(葛文王)⋅사덕지(斯德智) 아간지(阿干支)⋅자숙지(子宿智) 거벌간지(居伐干支), 훼(喙)(부)의 이부지(尒夫智) 일간지(壹干支)⋅지심지(只心智) 거벌간지(居伐干支), 본피(本彼)(부)의 두복지(頭腹智) 간지(干支), 사피(斯彼)(부)의 모사지(暮斯智) 간지(干支), 이 일곱 왕 등이 함께 의논하여 교(敎)하셨다. 앞 시기의 두 왕께서 내리신 교(敎)를 증거로 하여, 재물을 다 절거리로 하여금 얻게 한다는 교(敎)였다. 별도로 교(敎)를 내려 절거리가 만약 먼저 죽은 후에는 그 아우 사노(斯奴)로 하여금 이 재물을 얻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 별도로 교(敎)를 내려 말추(末鄒)⋅사신지(斯申支), 이 두 사람은 후에 이 재물에 대해 다시는 트집을 잡지 말라고 하셨다.

【뒷면】

만약 다시 트집을 잡으면 그것은 중죄(重罪)라고 교(敎)하셨다.

일을 맡은 사람[典事人]은 사훼(沙喙)(부)의 일부지(壹夫智) 나마(奈麻)⋅도로불(到盧弗)⋅수구휴(須仇休), 훼(喙)(부)의 탐수도사(眈須道使) 심자공(心訾公), 훼(喙)(부)의 사부(沙夫)⋅나사리(那斯利), 사훼(沙喙)(부)의 소나지(蘇那支)인데, 이 일곱 사람이 삼가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일을 마쳤다고 아뢰었고 소를 잡아 (하늘에) 고하였으므로 기록한다.

【윗면】

촌주(村主) 유지(臾支) 간지(干支)와 수지(須支) 일금지(壹今智), 이 두 사람이 세간의 일들을 마쳤으므로 기록한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

〈前面〉

斯羅, 喙, 斯夫智王⋅乃智王, 此二王敎. 用珍而麻村節居利, 爲證尒, 令其得財敎耳.

癸未年九月廿五日, 沙喙, 至都盧葛文王⋅斯德智阿干支⋅子宿智居伐干支, 喙, 尒夫智壹干支⋅只心智居伐干支, 本彼, 頭腹智干支, 斯彼, 暮斯智干支, 此七王等共論敎. 用前世二王敎, 爲證尒, 取財物, 盡, 令節居利得之, 敎耳. 別敎, 節居利, 若先死後, 令其弟兒斯奴, 得此財, 敎耳. 別敎, 末鄒⋅斯申支此二人, 後莫更噵此財.

〈後面〉

若更噵者, 敎其重罪耳.

典事人, 沙喙, 壹夫智奈麻⋅到盧弗⋅須仇休, 喙, 躭須道使, 心訾公, 喙, 沙夫⋅那斯利, 沙喙, 蘓那支, 此七人, 䠆踪, 所白了事, 煞牛拔誥, 故記.

〈上面〉

村主, 臾支干支⋅須支壹今智, 此二人世中了事, 故記.

「浦項冷水里新羅碑」

이 사료는 국보 제264호로 지정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冷水里新羅碑)」로 1989년 3월 포항시 북구(구 영일군) 신광면 냉수2리에서 발견되었다. 이 비석은 2009년 포항시 흥해읍 중성리에서 발견된 신라 최고(最古)의 비석인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中城里新羅碑, 보물 제1758호)」와 더불어 6세기 초 신라사를 해명할 수 있는 여러 정보를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의 높이는 60㎝, 폭은 70㎝이며, 앞면과 뒷면, 윗면 등 총 3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뒷면이나 윗면과 달리 앞면만 돌을 다듬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본래는 앞면에만 글자를 새기고자 하였으나 공간이 부족하자 뒷면과 윗면까지 글자를 새기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총 230여 자에 이르고 비문은 크게 4단락으로 나뉜다. 첫 번째 단락은 “사라(斯羅)~재물을 얻게 한다는 교(敎)이셨다[得財敎耳].”까지이다. 이 부분은 이전 시기의 왕인 사부지왕(斯夫智王)과 내지왕(乃智王)이 모종의 재물을 진이마촌(珍而麻村)에 사는 절거리(節居利)라는 사람의 소유라고 판결을 내린 사실을 일러두었다. 『삼국유사』권1의 왕력(王曆)편에 의하면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재위 417~458)을 내지왕(內只王)이라고도 하였으므로, 여기에 보이는 내지왕은 곧 눌지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사부지왕은 누구일까? 다음 문단에서 사부지왕과 내지왕을 일컬어 ‘앞 시기 두 왕[前世二王]’이라 하였고, 사부지왕이 내지왕보다 먼저 거론되고 있다는 점에서 사부지왕은 눌지왕에 앞서 왕위에 오른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 재위 402~417)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진이마촌은 이 비석이 발견된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에 있던 마을로 추정된다.

두 번째 단락은 “계미년(癸未年)~그것은 중죄라고 명령하셨다[敎其重罪耳]”까지이다. 이 부분은 이 비문을 작성하게 된 근본적인 배경과도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계미년 9월 25일이라는 날짜가 언급되어 있고 그 뒤를 이어 지도로(至都盧) 갈문왕(葛文王)의 이름이 보인다. 지도로가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의 이름이라는 사실은 『서경문화사』 지증왕 1년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계미년는 503년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503년은 지증왕이 이미 즉위한 지 4년째 되는 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시 국왕의 정식 명칭인 마립간이 아니라 갈문왕으로 불리고 있었다는 점은 그의 즉위가 순탄치 못하였음을 말해 준다.

이와 더불어 이 단락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지도로 갈문왕 등 일곱 왕이 의논하여 모종의 재물이 절거리의 소유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별도로 교(敎)를 내려 절거리가 죽을 경우 그 아우에게 소유권이 넘어감은 물론이고 말추(末鄒)와 사신지(斯申支)는 더 이상 재물에 대해 트집을 잡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쟁의 대상이 되는 재물이 무엇인가 하는 점과 관련해서는 토지나 노비, 일반적인 재화(財貨), 조세와 관련한 권리, 철광산 또는 거기에서 생산된 철 등 다양한 해석이 이어지고 있지만, 비문에 그것의 성격이 명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재물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더라도 그것을 둘러싸고 실성왕 대부터 지증왕 대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지속적으로 분쟁이 있었던 점만은 분명하다. 그러한 분쟁의 결과가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비는 일종의 판결문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재물에 대한 소유권을 명시한 등기 문서로 보기도 한다. 이 같은 측면은 결국 5세기 후반~6세기 초반 무렵 재물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날 정도로 사회 경제가 발전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분쟁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국왕 한 사람이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일곱 왕이 함께 논의하였다는 점도 흥미로운데, 이를 통해 당시의 국정은 국왕 단독으로 운영한 것이 아니라 6부(部) 대표자의 합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을 맡은 사람[典事人]~고하였으므로 기록한다[誥故記]”는 세 번째 단락에 해당하는데, 일곱 왕 등이 함께 논의한 내용을 비에 새기고 그것을 건립하는 데 관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하였다. “촌주(村主)~일들을 마쳤으므로 기록한다[了事故記]”는 윗면의 전체 문단이 이 비의 마지막 단락인데, 이 일에 관여한 현지인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렇듯 세 번째 단락과 네 번째 단락은 이 비의 건립 내지 재판 과정에 관여한 이들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들이 재판 결과를 확인시켜 주는 일종의 증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비문의 말미에 기록해 둔 듯하다.

일반적으로 4~6세기는 철제 농기구 등이 널리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던 시기로 이해되고 있다. 농업 생산력의 증대는 자연스레 경제적 부의 확대로 이어졌고, 그러한 와중에 재물을 둘러싼 분쟁이 심심찮게 발생하였으리란 점은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진이마촌에서 모종의 재물을 둘러싸고 절거리와 말추⋅사신지 사이에서 일어난 소유권 분쟁 역시 바로 그러한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즉 「포항 냉수리 신라비」는 경제적 부의 축적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벌어진 다양한 갈등 양상의 한 단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물론이고 그러한 갈등의 해결 과정까지 기록된 중요한 자료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논문

「영일냉수리비의 재검토-재의 성격을 중심으로-」,『신라문화』9,이우태,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1992.
「영일냉수리비를 통하여 본 신라의 통치체제」,『이기백선생 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상)』,이종욱,일조각,1994.
「영일냉수리비에 보이는 지도로 갈문왕에 대한 몇 가지 문제」,『한국학보』60,이희관,일지사,1990.

저서

『이두연구』, 남풍현, 태학사, 2000.
『금석문과 신라사』, 주보돈, 지식산업사, 2002.

편저

「영일 냉수리비」, 노중국,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신라사의 새로운 열쇠,냉수리비와 봉평비」, 전덕재,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저, 푸른역사, 2003.
『한국고대사연구』3(영일냉수리신라비 특집호), 한국고대사학회 편, 서경문화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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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냉수리 신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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