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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군을 노비로 되돌리는 것에 반대하는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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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군(補充軍)을 환천(還賤)하는 법의 조문을 논의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박은(朴訔, 1370~1422)이 헌의(獻議)하기를, “가만히 생각하건대, 국가에서 백성이 천한 사람은 많고, 양인(良人)은 적다 하여 보충군의 제도를 마련하여 종량(從良)하는 길을 넓힌 것입니다. 그 종류가 5가지가 있으니, 양인의 신분으로 수군(水軍)이 된 자는 양천(良賤) 관계를 분변할 때에, 양천(良賤)된 호적이 모두 분명하지 못하여, , 에 일정하게 말하기 어려우므로 수군에다 속한 것이니, 그 법이 지극히 공평한 것입니다. 이제 도피한 까닭으로 천구(賤口)로 정한다는 것은, 신은 옳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 간(干)이나 척(戚)이라 이르는 사람은 그 하는 일이 비록 천하다 하지만, 노비와는 다르므로 그들의 딸자식으로 공사 노비(公私奴婢)에게 출가하여 낳은 자식은 다 노역(奴役)에 종사하게 된 것입니다. 또 간⋅척의 신분을 가진 사람으로 양인이 되기를 호소한 자는 백에 하나 둘도 없지만, 국가에서 특별히 충군(充軍)하는 법을 만든 것입니다. 이제 먼 변방의 백성으로 경역(京役)에 감내하지 못하여 어쩌다 도피한 자가 있으면 곧 노비로 정하니, 신은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비첩(婢妾)이 낳은 자식은 할아버지나, 아버지나, 자기의 비첩들이 낳은 것은 다 동기(同氣)인 지친(至親)인데, 자손들이 그들을 나누어 차지하여 일을 시키는 것은 심히 어진 일이 아니므로, 그들로 하여금 아비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하는 것은 인륜을 소중히 하는 것입니다. 이제 도피하였다 하여 곧 천인으로 만들어 그의 동기인 족친(族親)에게 주게 된 것은 신으로서는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는 시비(是非)를 물을 것 없는 자로서, 기한 내에 소량(訴良)하였다가 결정되지 못한 자는 본시 천민(天民)이라 하겠거늘, 이를 다시 분변하지 아니하고 모두 보충군에 속하게 한 것은 천인이 많아지는 폐단을 억제하기 위한 것인데, 이제 도망간 죄로 인하여 양천도 분별하지 아니하고 곧 천인으로 만드는 것은, 신은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또 속신(贖身)한 자에 관한 일이니, 무릇 양반의 자손으로서 천인이 된 자가 스스로 능히 속신하였으면, 역시 아비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하는 것은, 양인이 적어지는 폐단을 구하려는 것인데, 하물며 그의 공사(公私)간의 본주(本主)들이 이미 그의 속가(贖價)를 받았으니 어찌 도로 붙잡아 둔다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지금 본주(本主)의 진고(陳告)로서 도로 천인이 되게 하는 것은, 신은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대개 이 보충군이란 것이 이미 양인이 되었으니, 비록 그 남정(男丁)으로서 마땅히 군(軍)으로 세운 자는, 죄가 대역(大逆)이 아니면 참으로 천인이 될 이치가 없는 것인데, 하물며 부녀(婦女)로서 입군(立軍)에 해당하지 못할 자까지 도피하였다는 죄로 천인이 되게 한다면, 한 사람의 자손으로서 하나는 양인이 되고, 하나는 천인이 되게 될 것입니다. 이 5가지로 인하여 종량(從良)의 법이 마침내 문란하게 될 것입니다.

신은 원하기를, 보충군인 남정(男丁)으로 전연 나타나지 아니한 자나, 이름을 숨겨 군적(軍籍)에 들지 아니한 자나, 차역(差役)을 도피한 자는 모두 누구든지 진고(陳告)하게 하여, 범인(犯人)의 전지(田地)나 곡미(穀米) 외에도 재물⋅노비⋅우마(牛馬)의 다소(多少)를 불구하고 절반으로 갈라 진고한 자에게 상품(賞品)으로 충당케 하고, 범인은 일체로 병률(兵律)에 의하여 논죄할 것이며, 재범⋅삼범한 자는 의논하여 형법을 더할 것이요, 부녀로서 호적에 들지 아니한 자도 율에 의하여 속(贖)을 받을 것이되, 모두 종천(從賤)하는 것은 면제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이것을 정부와 육조에 명하여 다시 의논하여 올리라고 하였다.

세종실록』권9, 2년 9월 1일(병인)

命議補充軍還賤條款. 左議政朴訔獻議曰, 竊謂, 國家以民之賤者多而良者少, 置補充軍, 以廣從良之路. 其類有五, 曰, 身良水軍者, 蓋於良賤分辨之際, 良賤籍俱不明者, 於良於賤, 難以一定, 故屬之水軍, 其法至公. 今以逃避之故, 定爲賤口, 臣未知其可也. 曰, 稱干稱尺者, 其役雖賤, 異於奴婢, 故其女子嫁公私奴所生, 竝從奴役. 且干尺之人訴良者, 百無一二, 而國家特設法以充軍耳. 今此邊遠之民, 不勝京役, 或有逃避者, 遽定爲奴婢, 臣未知其可也. 曰, 婢妾産, 祖父⋅自己婢妾所生, 同氣至親也, 而子孫分執役事, 甚爲不仁. 故令從父爲良, 所以重人倫也. 今以逃避之罪, 遽令從賤, 仍給其同氣族親之人, 臣未知其可也. 曰, 勿問是非者, 以限內訴良未決者, 本是天民也, 更不分辨, 竝屬補充軍, 所以抑賤多之弊也, 今以逃罪, 不辨良賤, 遽以從賤, 臣未知其可也. 曰, 贖身者, 凡兩班子孫之賤者, 能自贖身, 則亦許從父爲良, 所以救良小之弊也, 況其公私本主, 旣收其贖價, 則安有還執之理. 今許陳告還賤, 臣未知其可也. 蓋此補充軍, 旣爲良人, 雖其男丁之當立軍者, 罪非大逆, 則固無從賤之理. 況婦女不當立軍者, 若以逃隱之罪從賤, 則一人之子孫, 有一良一賤者, 而五類從良之法, 終必紊矣. 臣願補充軍男丁, 元不現者⋅匿名不付籍者⋅逃避差役者, 皆許人陳告, 將犯人田地⋅穀米外, 財物⋅奴婢⋅牛馬, 不拘多少, 爲半充賞, 其犯人一依兵律論罪, 再犯⋅三犯者, 議加刑法, 婦女不付籍者, 依律收贖, 竝免從賤. 命政府⋅六曹更議以聞.

『世宗實錄』卷9, 2年 9月 1日(丙寅)

이 사료는 1420년(세종 2년) 좌의정 박은(朴訔, 1370~1422)이, 보충군으로서 역(役)을 감내하지 못하고 도망 및 도피한 자들을 노비 신분으로 영속(營屬)시키자는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이 사료에 따르면, 조선 초기 백성 중 천인이 많고 양인이 적어 보충군 제도를 만들어 종량(從良)하였음과, 그 종류에서 신량수군자(身良水軍者), 칭간칭척자(稱干稱尺者), 물문시비자(勿問是非者), 양부비첩산(良夫婢婢妾産), 속신비첩산(贖身婢妾産)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보충군 제도는 고려 말기 부족한 군사를 충당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시행된 적이 있었으나, 조선 왕조에서 시행된 제도는 사뭇 달랐다. 조선은 1415년(태종 15년) 3월에 이를 시행하였고, 이후 신분은 양인이지만 국가에 지는 역(役)은 천인과 마찬가지인 칭간칭척자(稱干稱尺者)인 각 품 관원의 천인 출신 첩 소생으로 양인이 되고자 하는 자를 모아 정원을 정군(正軍) 3000명, 그 봉족(奉足) 6000명으로 조직하였다. 당초 칭간칭척자와 관원의 천인 출신 첩 소생은 고려 말 조선 건국 직후부터 사재감(司宰監) 또는 사수감(司水監)의 수군으로 소속시켜 양인임을 인정하되 일정한 제약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에 소속되지 않은 칭간칭척자 등의 수가 매우 많아 국가의 각종 역을 부담하는 계층이었던 양인을 늘리고자 국가 재정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던 염간(鹽干)을 제외하고 이들을 모두 보충군에 소속시켰다. 따라서 보충군은 군사적 기능보다 신분 관계에 무게가 실려 있는 존재였다.

이들은 대개 중앙의 여러 관청에 소속되어 주로 사령군(使令軍)으로서 복무했으며, 복무연한이 지나면 그 자신은 물론 자매와 딸⋅손자, 연한이 지난 뒤 태어난 자식 모두 양인 신분을 획득하여 후손까지 양인으로 살 수 있었다. 또한 7품 이하 서반 하급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보충군 대상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방 거주자들은 복무 기간 동안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며, 또 식량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어려움으로 인해 보충군의 군안(軍案)에 이름이 오르는 것을 꺼렸다. 이름은 군안에 올랐지만 복무를 꺼려 서울로 가지 않거나 복무를 하다가 도망치는 일도 빈번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숨어 있는 보충군 편성 대상자의 색출을 강화하고, 복무를 기피하거나 도망가면 벌금을 물리기도 하고, 노비 신분으로 영속시키는 처벌을 가하였다. 또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나 평안도⋅함경도 등 국경 지역 보충군은 1418년(세종 즉위년) 이후 점차 서울로의 번상(番上)을 면제하는 대신 국경 지역인 현지에서 국방에 종사하고, 평안도⋅황해도⋅함경도 보충군 일부는 거주지 인근의 역참(驛站)에 소속시켜 그 관군(館軍) 또는 관부(館夫)로 복무하게 하였다. 이로써 보충군 중 일부는 본래의 군역과는 다른 내용의 역을 지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이들 역시 복무연한을 채우고 나면 양인 신분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서울에 번상하는 보충군과 성격은 같았다.

한편 이러한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본래의 칭간칭척자 계층이 소멸하여 사실상 보충군에 소속되는 대상이 양반을 아버지로 하고 공사천(公私賤)을 어머니로 하는 천처첩자손(賤妻妾子孫)만으로 한정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보충군은 자식의 신분이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결정되는 종모법(從母法)의 법제 아래서, 당연히 천인이 되어야 할 계층을 그 아버지가 양반인 경우 그 지위를 고려하여 양인이 될 기회를 주는 장치로 정착하였다.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보충군으로 10년의 복무를 마쳐야 양인이 될 수 있도록 한 규정을 완화하여 1000일 복무 후 양인이 되도록 개정하였으며, 나아가 보충군이라는 명칭도 1469년(예종 1년)에는 보충대로 고쳤다.

이로써 『경국대전』 규정에서는 보충대에 소속되는 대상이 양반을 아버지로 하고 공사천을 어머니로 하는 천처첩자손만으로 한정되었다. 보충대는 이후에도 여전히 보충군으로 불렸으며 5위(五衛)의 편제 안에서 의흥위에 소속되었다. 보충대는 정액이 없으며 4교대로 4개월씩 복무하여 대체로 1000일의 군무(軍務)를 마쳐야 종9품의 잡직을 받고 양인 신분을 획득하였다. 같은 보충대라도 그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가 2품 이상의 고위 관직자인 경우 330일, 원종공신은 500일만 근부하면 양인이 되도록 차등을 두기도 하였다.

복무연한이 줄었지만 보충대 복무를 기피하는 경향은 강해졌다. 이에 따라 16세기 초반에는 보충대가 맡던 사령의 역을 번상하는 보정병(步正兵)으로 대신 충당하게 하여 정병 군역의 폐단을 가중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다. 그 후 보충대를 규정대로 복무시키자는 논의도 있었지만 이미 유명무실한 존재가 된 다음이라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조선 후기에는 곡식이나 돈을 내고 천인 신분을 면제받은 자들을 모두 보충대에 소속시키기도 하였으나 이 역시 유명무실하게 운영되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초기 노비의 종모법과 종부법」,『역사학보』115,이성무,역사학회,1987.
「한국사에 있어서 노비제의 추이와 성격」,『노비⋅노예⋅농노-비교사적 검토』,이영훈,일조각,1998.
「보충군 입역규례를 통해 본 조선초기의 신분구조」,『역사교육』30⋅31합,전형택,역사교육연구회,1982.

저서

『조선사회사연구』, 송준호, 일조각, 1987.
『조선초기 신분제 연구』, 유승원, 을유문화사, 1987.

편저

「신분의 구분」, 이범직, 국사편찬위원회, 2003.

관련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링크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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