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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 행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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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에 또 전지하기를, “지금부터 4월 초8일 대궐 안의 연등을 없애도록 한다”하였다.

세종실록』권19, 5년 3월 18일(기해)

사간원에서 계하기를, “연등(燃燈)은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부처에게 공양하고 중에게 시주하는 것도 또한 다 금하지 못하는데, 어찌 유독 연등만 금할 수 있겠는가. 뒷날에 중에게 시주하는 것을 금지한 뒤에 이를 금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세종실록』권39, 10년 3월 23일(을사)

사헌부에 하교하기를, “본조(本朝)의 풍속에 4월 초8일을 부처의 탄생일이라고 하여 연등(燃燈) 관희(觀戲)를 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요즈음 간원(諫院)에서 폐단을 말하면서 혁파하기를 청하였다. 내 생각에 오래 된 습속을 갑자기 쉽게 고칠 수 없으나 오직 이 습관만은 고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부터 절[僧舍] 이 외에 중앙과 지방에서 행해지는 연등은 일체 금하라”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날짜가 이미 임박하였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혹 알지 못하여 금령(禁令)을 범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오는 초8일에는 우선 서울 안에서만 금하고, 알지 못하여 범하는 자는 죄주지 말며, 외방(外方)은 내년부터 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권52, 13년 4월 6일(경자)

傳旨于禮曹 : “今後除四月八日闕內燃燈”

『世宗實錄』卷19, 5年 3月 18日(己亥)

司諫院啓 : “燃燈, 不可不禁”

 上曰 : “供佛齋僧, 亦未盡禁, 何獨禁燃燈乎? 待後日禁齋僧, 然後禁之可也”

『世宗實錄』卷39, 10年 3月 23日(乙巳)

下敎司憲府曰 : 本朝風俗, 以四月八日爲佛生辰, 燃燈觀戲, 行之已久. 頃者, 諫院陳弊請罷, 予以習俗之久, 未易遽革, 重惟此習, 不可不革, 自今僧舍外, 中外燃燈一禁.

仍曰 : 日期已迫, 愚民或有不知而犯禁者, 來八日則姑禁京中, 不知而犯者勿罪, 外方, 自來年禁之.

『世宗實錄』卷52, 13年 4月 6日(庚子)

이 사료는 조선 초 불교 행사인 연등(燃燈) 행사를 금지한 것과 관련한 내용이다. 연등이란 등불을 밝힌다는 뜻이다. 부처님에게는 다양한 공양이 올려졌는데 대표적인 공양으로는 향(香), 등(燈), 꽃[花], 쌀[米], 과일[果], 차(茶) 등이 있었으며, 각 공양물은 불교의 주요 가르침에 대한 상징이었다. 불교에서 중생의 어리석음은 짙은 암흑과 같다고 보아 무명(無明)이라 하였으므로, 불전에 등을 달아 밝게 비추는 일은 자신의 마음을 밝게 하여 진리의 깨닫는다는 의미를 가졌다. 따라서 등을 달고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자비가 광명으로서 두루 퍼져 나가기를 기원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하겠다고 다짐을 하는 행위였다. 이러한 공양 의식은 더 나아가 소원을 비는 구복(求福)의 한 방편으로 간주되었으며 국가적인 행사로 확대되었다.

한국 역사에서 연등은 불교가 전래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고려 시대에 들어서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토착 의례와 융화 과정을 거치면서 국가적인 놀이 문화로 발전하였다.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 따라 연등회는 연초에 왕이 직접 주관하는 정례 행사(상원 연등회)로서 성대하게 시행되었는데, 이때 왕은 대규모의 수행 인원을 대동하고 사찰로 행차하여 직접 공양을 드렸으며, 궁중에서는 등을 곳곳에 매달고 연회를 열어 군신 간에 술과 음식을 나누었다. 연등회와 별도로 4월 초8일(초파일)에도 부처의 탄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연등이 행해졌는데, 이 초파일 연등은 고려 말로 갈수록 점차 비중이 높아져 연초의 상원 연등회를 능가할 정도로 큰 규모의 행사가 되었으며 서민층으로도 확산되어 하나의 풍속으로 자리잡았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배불 정책으로 교세가 쇠퇴하면서 관청 중심의 상원 연등회는 태조 대에 먼저 중지되었다. 그러나 위의 사료에서 보듯 사월 초파일 연등 행사는 함께 폐지되지 않고 존속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고려의 구습으로서 남녀가 이를 계기로 만나서 밤새 노는 폐단이 있다는 점을 들어 민간에서도 초파일 연등을 금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혁파 의견을 수용하지 않거나, 점진적인 방법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조선의 공식적인 이념은 숭유억불(崇儒抑佛)이지만, 개창자인 태조부터 비공식적으로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세종 역시 이러한 영향 아래 부분적으로 억불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후 억불책을 더욱 강화한 성종 역시 사찰과 민가의 연등 행사에 대해서는 금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월 초파일 연등은 소멸되지 않고 왕실과 민간에서 계속 유지되었으며, 세시 풍속으로 전승되었다. 이러한 사월 초파일 연등 행사를 관등 놀이라고 하는데,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이 절을 찾아가 관등(觀燈)하고, 등이 잘 보이는 높은 곳에 오르거나 거리를 다니면서 등을 구경하고 즐기는 것이다.

연등 행사에서는 연꽃 모양의 등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면서도 그 청결함과 아름다움을 잃는 법이 없다. 이는 비록 현실에서 무명에 빠진 중생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밝혀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연등 행사 때 반드시 사용되었다. 그런데 『동국세시기』등의 문헌에는 관등 놀이 때 연꽃 이외에도 수박, 거북, 오리, 학, 해와 달 등의 자연물, 누각, 가마, 화분 등 일상의 사물 형태를 따라 만든 다양한 등을 달았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연등 의식이 민속 신앙이자 놀이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연등 행사 때는 각종 깃발로 치장한 등대(燈臺)를 세우고 강에 연등을 달은 배를 띄웠으며, 관청, 민가, 시장, 거리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연등으로 뒤덮였으므로 이는 큰 구경거리가 되었다. 또 연등을 이용한 놀이가 함께 성행하였는데, 연등의 안에 회전하는 기구를 설치한 뒤 동물과 사람의 모습을 그려서 넣으면 등이 바람에 의해 빙빙 돌면서 그림자가 비치는 영등(影燈)이 대표적인 예였다. 초파일은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었으므로 남녀노소 모두 절에 방문하여 등을 공양한 후 밤새 돌아다니며 축제 분위기를 즐겼다.

참고문헌

논문

「고려시대 연등회 연구; 설행실태를 중심으로」,『국사관논총』55,금형우,국사편찬위원회,1994.
「조선전기의 불교와 생활세계」,『한국사상사대계』4,오형근,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1.
「고려⋅조선시기 불교사 연구현황과 과제」,『한국사론』28,채상식,국사편찬위원회,1998.
「조선왕조 초기에 있어서의 유교이념의 실천과 신앙⋅종교-사제(祀祭)문제를 중심으로-」,『한국사론』3,한우근,서울대학교 국사학과,1976.

저서

『한국불교사 산책』, 김상현, 우리, 1995.
『한국불교사상사연구』, 안계현, 동국대학교, 1983.

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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