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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되는 처가살이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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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예의가 나온 나라로 혼인의 예는 바로 음(陰)으로써 양(陽)을 따르므로 여자가 남자 집에 시집가서 아들과 손자를 낳아 내가(內家)에서 기르니, 사람들이 본종(本宗)의 중함을 알기 때문에 아비가 양인(良人)인 경우에는 모두 양인입니다. 우리 동방(東方)의 전장(典章)과 문물은 모두 중국을 본받으면서도 혼인의 예는 아직도 옛 풍속을 따라서 양(陽)으로써 음(陰)을 따르므로 남자가 여자 집에 시집가서 아들과 손자를 낳아 외가에서 기르니, 사람들이 본종의 중함을 알지 못하므로 어미가 천인(賤人)인 경우에는 모두 천인입니다.

태종실록』권27, 14년 1월 4일(기묘)

우리나라 풍속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니 이성친(異姓親)의 은혜와 의리의 분별이 동성친(同姓親)에 비하여 차이가 없다. (외가의)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면 종형제가 한집에서 자라나고 증조부가 살아계시면 재종형제가 같은 집에서 자라납니다. 대저 한 집에서 양육하므로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서로 형제라 하고, 숙질이나 조손이라 하니 그 은혜와 사랑이 어찌 동성친과 다름이 있겠습니까?

성종실록』권10, 2년 5월 20일(임진)

우리나라 풍속은 처가에서 처가살이를 하게 되면 아내의 부모 보기를 자기의 부모처럼 하고 아내의 부모도 역시 그 사위를 자기의 자식과 같이 봅니다.

성종실록』권206, 18년 8월 6일(계유)

우리나라는 중국의 친영(親迎)의 예가 없어 모두 처가를 집으로 삼아 처부를 아버지라 칭하고 처모를 어머니라 부르며 항상 부모처럼 섬기는데, 이 또한 강상(綱常)이다.

성종실록』권241, 21년 6월 27일(무신)

中國, 禮義所自出, 婚姻之禮, 正以陰從陽, 女歸男家, 生子及孫, 長於內家, 人知本宗之重, 父良者皆良. 吾東方典章文物, 皆法中國, 唯婚姻之禮, 尙循舊俗, 以陽從陰, 男歸女家, 生子及孫, 長於外家, 人不知本宗之重, 母賤者皆賤.

『太宗實錄』卷27, 14年 1月 4日(己卯)

本國之俗, 男歸女第, 異姓之親, 恩義之分, 與同姓無別. 大父在, 則從兄弟養於一家, 曾大父在, 則再從兄弟養於一家. 夫養於一家, 自幼至壯, 自相謂兄弟, 自相謂叔姪, 自相謂祖孫, 其恩愛果有異於同姓之親乎.

『成宗實錄』卷10, 2年 5月 20日(壬辰)

我國之俗, 贅於妻家, 視妻父母猶己父母, 妻之父母, 亦視其壻猶己子也.

『成宗實錄』卷206, 18年 8月 6日(癸酉)

我國無中國親迎之禮, 皆以妻家爲家, 稱妻之父曰父, 妻之母曰母, 常以父母事之, 是亦綱常也.

『成宗實錄』卷241, 21年 6月 27日(戊申)

이 사료들은 조선 초기 혼인의 예를 중국의 제도를 본받지 않고 예로부터 내려오던 서류부가(壻留婦家)1)의 풍습을 따라 남편이 처가에서 오랫동안 생활하고 그 자식이 외가에서 태어나 성장했음을 보여 준다. 부모나 외조부모의 은혜가 동성 친족에 못지않고 처의 부모를 마치 친부모처럼 여기며 처부모를 마치 친부모처럼 여겼으며 처부모도 사위를 친아들처럼 여겼다고 한다. 서류부가의 풍습은 고려 시대 일반적인 결혼 형태였는데, 조선 중기까지도 지속되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서류부가의 기간은 점차 짧아져 1년 내지 반년 또는 3일만 머물기도 했다.

서류부가혼 풍습은 동성 친족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부계 중심의 종법 질서보다는 양계적 친족 체계가 지속된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을 수용한 조선의 사대부들은 서류부가혼이 부계 중심의 종법 질서를 확립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여겼다. 이에 종법 질서 형성을 위해 중국식 친영(親迎) 제도를 도입하고자 했지만 새로운 지배 이념이 오랜 생활양식을 곧바로 바꿔 놓지는 못했다. 이에 서류부가혼과 친영은 명종(明宗, 재위 1545~1567) 대 반친영(半親迎)의 형태로 절충되었다. 이후 처가에서 머무르는 기간이 짧아지면서 처가살이에서 시집살이로 전환해 갔다.

이에 따라 처가나 외가와의 유대는 점차 약해진 반면 직계 가족이나 부계 친족과의 관계는 더욱 친밀해졌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여러 명의 아들 중 가계 계승 부부와 그들의 자녀를 포함하여 구성되는 직계가족이 이상적인 형태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혼인 형태와 가족 유형은 재산 상속이나 제사 상속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이에 아들과 딸 사이에 균등하게 상속⋅지급하는 경향이 조선 중기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균분 상속이 시행되는 가운데 여성들은 결혼 뒤에도 자신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이러한 재산 균분은 제사에 대한 책임과도 연계되어 출가한 딸을 포함하여 모든 자식이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 윤회 봉사, 직계 비속이 없을 경우 외손이 대신 제사를 지내는 외손 봉사의 모습도 나타났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초 혼속변천에 따른 법적 영향에 대하여」,『국제지역연구』27,문형진,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연구센터,2003.
「조선 초기 주자학의 보급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청계사학』3,이순구,청계사학회,1986.
「조선 중기 혼인제의 실상-반친영의 실체와 그 수용여부를 중심으로-」,『역사와 현실』58,장병인,한국역사연구회,2005.

저서

『조선시대 재산상속과 가족』, 문숙자, 경인문화사, 2004.
『한국가족제도사연구』, 최재석, 일지사, 1983.

편저

「가족제도」, 최재석, 국사편찬위원회, 2003.

관련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링크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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