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양은 음악가, 김씨는 극작가
단신으로 세상을 섭렵한 윤양의 내력과 백만장자 김씨의 최근
윤심덕의 내력
……(중략)…… 윤심덕 양은 본래 평양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평양숭의여학교,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마친 후 다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강원도 어느 곳 보통학교의 교원으로 봉직했다. 그 후 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선 동경 음악학교에서 수업한 후 1년 동안 더 성악에 관한 연구를 한 뒤 5년 전에 귀국했다. 그 집안사람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왔으며 윤양은 당시 조선에 그 음악적 재능을 널리 알리다가 ……(중략)……
반생(半生)을 찬미(讚美)하는 윤양의 축음기 앨범
현해탄에 몸을 던진 윤양의 후반생(後半生)은 외로운 목에서 흘러나온 유성기(留聲機) 소리
육신은 어디로 갔는지 청아하고 오묘한 노래만 남아
성악가로 유명했던 윤심덕 양이 저승길로 떠났다. 그의 자태를 다시는 무대에서 볼 수가 없으며 청중을 매혹시키던 그의 음성도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일본 축음기 회사의 초청을 받아 ‘어여쁜 색시’, ‘메기의 추억’, ‘나와 너’, ‘아 그것이 사람인가’, ‘어머니 부르신다’, ‘망향가’, ‘방긋 웃는 월계화’ 등 여러 가지 노래를 레코드에 불어 넣었다. 이번 죽음의 길을 떠나려 일본에 갔을 때에도 십여 종의 노래를 불어 넣었다고 한다. 아직 세상에 나타나지 않은 그 레코드 중에는 과연 무슨 유언이 있을까? 윤심덕은 다시 볼 수 없으나 그의 남겨진 목소리는 영원히 세상을 떠돌 것이다.
『동아일보』, 1926년 8월 5일, 「玄海灘 激浪 中에 靑年男女의 情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