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극장에서는 이미 영화 제작을 진행 중에 있었다. 작년 12월부터 제1회 작품으로 임선규 씨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고려 영화사의 이창용 씨와 협동하여 촬영 중이었는데, 방금 촬영을 마치고 동양 극장 측 최상덕 씨와 고려의 이창용 씨와의 공동 경영작인 경성 촬영소에서 세트와 녹음까지 완료하였다고 하는데 개봉은 늦어도 오는 3월 상순이라고 한다.
원작 임선규, 각색 도무, 촬영 최순흥, 연출 이명우
출연 황철, 변기종, 김숙영, 차홍녀, 김동규, 김선초, 이동호, 김선영, 복원규
『동아일보』 1939년 2월 8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동양·고려 협동 작품」
사랑에 속고 돈에 운 차홍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경성 공연만 해도 수십 차례 될 것이다. 번번히 차홍녀는 무대에서 정말 자기의 현실인 듯이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동양 극장 영화 제작부에서 이번에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영화화함에 따라 홍녀 양은 스크린에서 또 한 번 더 울게 되었다는 것이다. 늦어도 이 영화가 3월엔 개봉될 것이라고 하니 홍녀 양의 팬은 더 한 번 그녀의 아리따운 자태와 눈물을 볼 것이 아닌가.
『삼천리』 제11권 제4호, 1939년 4월, 「기밀실, 우리 사회의 제내막-사랑에 속고 돈에 울은 차홍녀」, 20~21쪽
청춘좌소사
먼저 우리 극단의 소사(小史)를 쓰기 전에 조선 연극의 유래를 몇 마디 쓰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대정(大正) 원년(1912)에 비로소 내지(內地)로부터 신파극을 모방해서 조선 신파 연극이라는 명칭을 붙여서 상연을 하게 된 것이 조선에서 첫 연극 운동의 시작이었다.
우선 첫출발로 경성에 있는 원각사, 연흥사와 개성에 있는 개성좌에서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연극을 하는 쟁쟁한 징 소리에 맞추어 막이 열렸다. 그때 원각사에는 윤백남 선생이 지도하는 극단 문수성이 있었고, 연흥사에는 고 임성구 씨가 지도하는 극단 혁신단이 있었으며, 개성좌에는 이기세씨가 지도하는 극단 유일단이 있었다. 이 3개 단체의 공연을 비롯하여 연극 단체는 계속적으로 조직되어 경성 시내 각 극장 중 장안사에는 극단 이화단, 광무대에는 극단 계림 미단, 단성사에는 극단 혁신 조선 미단이 각각 공연을 하게 되었다. 이 같이 각 극장에서는 연극 단체가 경쟁적으로 공연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신파 연극 구경 가자 하고 밀려드는 관중이 각 극장에 입추의 여지가 없더니 웬일인지 한 번씩 와 보고는 아무런 소감 또는 오락적 흥미라도 맛보지 못한 까닭인지 불과 몇 달 가지 못해서 관객의 발길이 끊기기 시작하였다. 그때의 정황을 회고해 보면 물론 연극의 가치라든가 관중을 끌 만한 매력이 없었던 것만은 사실이나 본래 연극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대중을 극장 안으로 끌어들일 아무런 계책이 없었다.
이리하여 각 극단은 조직 당초부터 경영난에 빠지게 되니 부득이 지방 공연을 떠나게 되었다. 이렇다 보니 각 극장 3단체가 지방 공연을 떠나는 순서에 따라 문을 닫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내지인(=일본인) 흥행업자들은 각 극장을 매수해서 활동사진 상설관을 만들고 말았다. 그때 원각사는 지금 서대문정(町) 구세군 본영 부근 주택지로 변하고, 연흥사는 지금 인사정 조선 극장 터이고, 장안사는 지금 돈의정 열빈 요리점으로 바뀌고, 단성사는 지금 원은정 대륙 극장이고, 광무대는 지금 황금정 빈총 극장이다.
그때 지방 공연을 떠나간 각 단체는 물론 수지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해산을 하고 단체 명칭을 바꿔 가지고 다시 모이고 하면서 말 못 할 고역을 넘고 또 넘어오며 몇몇 동지는 절대 좌절하지 않는 기세로 연극 활동을 계속해 왔다.
이렇게 20년이 지나니 문화의 발전에 따라 관중도 연극을 이해하게 되고 또한 연극인 자신도 각자의 기능을 발휘할 과정에 이르렀으나, 연극을 할 극장이 없어서 연극인들 가슴속에는 원한이 사무쳐 있었다.
이리하자 소화 11년(1936)에 이르러 우리의 은인 고 홍순언 씨가 우리 연극인들이 극장이 없는 것에 한이 맺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듯이 그의 피와 땀으로 쌓고 장식해 놓은 것이 흡족하진 못하지만 바로 현재 동양 극장이다.
그는 어렵고 없는 가운데서 연극의 전당 동양 극장을 건설해 놓고 연극인을 소집하게 되었다. 먼저 박제행, 황철, 서월영, 심영, 김동규, 복원규, 고 차홍녀, 김선초, 김선영, 그 외 몇몇 사람으로 청춘좌를 조직하였다.
소화 11년 12월 14일 오후 7시에 웅장한 징 소리가 나자 우리 청춘좌의 첫 공연의 막은 올라갔다. 기대하였던 관중들에게서 “야!” 하는 소리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소리쳐 나왔다. 그는 정열을 다해서 설비한 무대 장치를 보고 당시 경영주 고 홍순언 씨에게 감탄하는 첫 인사인 “야!” 소리였다.
그때 출연하는 우리들도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사용되는 ‘창공 장치! 이상적인 건물 장치! 적합한 의상!’ 등 여러 가지가 종합되어 전일에 자신들이 구해 내지 못한 표정 동작이며 모든 분위기가 한층 새로워진 것 같아서 그만 기분에 도취해 버리고 말았다. 그때 기쁨을 회상하고 고 홍순언 씨를 추억하니 필자의 붓대는 모르는 사이에 잠깐 동안 멈추어지고 만다.
세상은 호사다마라고 하더니 경영주 홍 씨는 개관한 지 1년 후에 너무나 사업에 정열을 바친 탓인지 우연히 병이 나서 약을 써도 효과가 없었다. 결국 자기 손으로 곡괭이를 들고 삽을 잡아 가며 세워 놓은 동양 극장을 남겨 놓고 영원히 연극 사업을 같이 하자던 동지들의 손길을 떨치고! 그만 감기 싫은 눈을 감으며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주인을 잃은 우리 청춘좌원은 막연하였다. 사업상으로 이해 있는 주인을 잃은 것이 안타까웠고 인간적으로 그의 일생이 너무도 짧았던 것이 몹시 애석했다. 그러나 우리는 냉정한 태도로 세상을 떠난 그를 잊어버리는 도리밖에 아무런 수가 없었다. 그 후 청춘좌는 홍씨 생존 시에 지배인 역으로 관할하던 최상덕 선생이 동양 극장을 인수해서 경영하게 되었다.
그리해서 우리 청춘좌는 최 선생을 새 주인으로 맞이하여 선생의 이해 넓으신 옹호와 온후하신 위로 속에 우리의 성의는 재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최 선생이 경영하는 동안 그때는 누구나 불경기를 외치던 때라 물론 수입상으로 보아 수지가 맞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본래 빈곤에 빠져 있는 우리 연극인들이라 끊임없이 드나드는 것이 최 선생의 방이니 모두가 곤란한 사정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인정 있는 최 선생께서는 경영주라는 위신으로나 또는 각자의 사정에 끌려 십중팔구는 각자 요구에 응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지 계산에 눈이 어두운 우리는 그렇게 경영난에 빠져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최 선생이 경영하신 지 3년 되는 소화 14년 8월에 비로소 최 선생이 경영을 중지한다는 선언을 듣고서야 알았다. 그때 우리는 놀라운 가슴을 움켜잡고 어찌해서 진작 우리에게 경영난에 관한 타협이 없었던가 하고 최 선생을 원망도 해 보았다. 그러나 끝까지 우리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심하신 데는 우리 역시 그만 동정이 끌리고 말았다.
또 주인을 잃어버린 우리 청춘좌는 어떻게 할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토의한 결과 청춘좌가 경영주를 떠나 독자 경영을 하자는 문제에 이르렀으나, 그 역시 일치되지 못한 관계상 각자가 개인 행동을 취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고락을 같이 하던 동지 간에 눈물겨운 작별을 하고 한일송 외 몇몇 동지는 정 깊은 동양 극장에 남아서 우리 청춘좌는 세 번째 새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는 현 동양 극장 경영주 젊은 실업가 김태윤 씨다.
새 주인을 맞이한 우리는 인정 문제를 떠나서 연극 활동에 충실하자는 목표 밑에서 좌원을 보충하여 소화 14년 9월 16일에 동양 극장 혁신 공연이라는 간판 아래서 우리 청춘좌는 다시 공연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금번 맞이한 새 주인이 연극계에는 전혀 생소한 분이므로 연극 활동에 있어서나 사업상에 많은 지장이나 있지 않을까 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염려를 하였다. 하지만 벌써 1주년이 지나가고 2주년을 맞이하는 동안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지장이 없이 순조롭게 업무를 진행시키는 것을 보면 우리는 새 주인 김씨의 수완과 덕망에 경의를 표하며 앞으로 지도하심에 순응할 것을 각오한다.
현재 청춘좌원
한일송, 김승호, 강노석, 김철, 복원규, 김윤호, 남상억, 최대규, 허영, 진랑, 박옥초, 강보금, 이광숙, 이세연, 이길재, 권서추, 김옥자, 조미령, 변기종 이상
끝으로 독자 제현과 청춘좌의 연극을 사랑하는 제현께 드릴 말씀은 우리 청춘좌의 진용을 강화시키고 신체제 하의 국민된 의무로서 충실한 연극 활동을 하고자 하는 우리 청춘좌의 기획을 기대하시라.
『삼천리』 제13권 제3호, 1941년 3월, 청춘좌대표 변기종, 「조선 대표 극단 종합판 - 청춘좌소사」, 190~1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