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호정인(無號亭人)
평양의 명승지인 을밀대(乙密臺) 옥상에 체공녀(滯空女-높은 곳에 올라간 여자)가 출현하였다. 평원(平元)고무공장 노동자의 동맹 파업으로 더 유명해졌으며 작년 노동쟁의의 새로운 전술을 보여준 일본 연돌남(煙突男-1930년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후지가스방적 공장 파업 당시 굴뚝 위에 올라 고공 시위를 벌인 다나베 기요시(田辺潔))과 비교하기 좋은 에피소드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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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49명 파업단의 임금삭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지역 2,300명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는 원인이 될 것이므로 죽기로써 반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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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나는 평원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삭감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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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 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 뿐입니다.”
이것은 강주룡이 5월 28 밤 12시 을밀대 지붕 위에서 밤을 밝히고 이튿날 새벽에 산보를 왔다가 이 희한한 광경을 보고 모여든 100여 명의 산보객 앞에서 한 일장연설이다. 이 연설을 보아서 체공녀 강주룡의 계급의식의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이 여자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생애를 살았으며 어떠한 환경의 지배를 받았나? 이것이 편집자가 내게 주문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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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은 평안북도 강계(江界)입니다. 열네 살까지는 집안에 걱정이 없었으나 아버지의 실패로 가산을 탕진하여 열네 살 때 서간도(西間島)
로 갔습니다. 거기서 농사하면서 7년 동안 살았는데 20살 되던 해에 통화현(通化縣)에 잇는 최전빈(崔全斌)이라는 이에게 시집갔습니다.
'서간도(西間島)'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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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가고 1년 후부터 우리 부부의 삶에는 큰 변동이 생겼습니다. 남편이 OO단 수령 백광운(白狂雲)(지금은 그 사람도 죽었습니다)씨의 제2중대에 편입된 것입니다. 물론 나도 남편과 같이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OO단을 따라 다녔습니다. ……(중략)…… 내가 본가로 돌아오고 5, 6개월 후 우리 본가에서 100여 리나 되는 촌락에서 남편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는 이미 틀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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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시집으로 돌아갔었습니다. 좀 창피한 이야기지만 시집에서는 나를 의심하여 남편 죽인 년이라고 중국 경찰에 고발해서 1주일이나 갇혀서 고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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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도
에서 귀국한 것은 내가 24살 되든 해였습니다. 처음에는 사리원에서 1년 정도 지냈는데 부모와 어린 동생을 데리고 내가 밥벌이를 하면서 아들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평양 온 것이 벌써 5년째 됩니다. 처음부터 고무공장 노동자로 밥벌이를 했지요.
'서간도'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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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밤 우리는 전술을 고쳐 단식 동맹을 조직하고 공장을 사수하기로 하고 공장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밤 한 시나 되니까 공장 주인은 경관에 부탁하여 우리를 공장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동무들이 대성통곡하면서 쫓겨나올 때 나는 차라리 이 목숨을 끊어서 세상 사람에게 평원 공장의 횡포를 호소할 마음을 먹었습니다. ……(중략)……기왕이면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서 아침에 사람이 모이면 실컷 평원 공장의 횡포를 호소하고 시원하게 죽자고 마음을 돌렸습니다.”
그는 벌써 일개 노동자가 아니라 49명의 노동자를 거느리고 투쟁의 선두에 나선 리더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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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제23호, 1931년 7월 5일, 「乙密臺上의 滯空女, 女流鬪士 姜周龍 會見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