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음력 8월) 16일
【양력 10월 3일】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와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궁내부
및 군부의 고문관으로 평소에 대원군과 친밀하게 지내던 자】
와 공사관에 모였다. 이들은 항상 궁중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의구심을 받아 왔던 훈련대
및 시세(時勢)에 비분강개하는 장년배(壯年輩)들을 이용하기로 의결하였다. 은밀히 경성 수비대, 즉 일본군에게 이들을 돕도록 하였고, 대원군
의 입궐을 돕고는 그 기회를 틈타 궁중에서 권력을 마음대로 부리는 왕후
를 시해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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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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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중에 대원군
이 정치에 참견한다면, 그 폐단이 이전보다 도리어 심해지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이를 예방하지 않을 수 없어서 스기무라 후카시가 4개 조항의 약관 초안을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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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양력 10월 5일】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그 약관을 지니고 흥선대원군
의 공덕리 별장
【경성에서 10리】
으로 가서, “요즈음 형세 때문에 태공
【당시 사람들은 흥선대원군
을 국태공(國太公)이라 하였음】
을 다시 번거롭게 해 드릴 일이 생겼습니다. 공사의 요점은 이와 같습니다” 하고 그 글을 보여 주었다. 대원군
과 그 아들 및 손자는 모두 기뻐하며 그것을 승낙하고 직접 서약서에 서명하였다.
'흥선대원군'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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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고로 등은 이로 말미암아 같은 달 중순
【양력이다】
으로 거사 시기를 잡았다.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공덕리에 간 일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그 일이 새어 나갈 것을 염려해서,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귀국 인사를 위해 들른 것처럼 속이고 다음 날 드디어 인천으로 떠났다.
8월 20일
【양력 10월 8일】
군부대신 안경수(安駉壽)가 궁중의 임무를 띠고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훈련대
를 해산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통보하고 미우라 고로의 뜻을 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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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고로는 시기가 절박하여 하루라도 유예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스기무라 후카시와 의논하여 이날 밤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곧바로 오카모토 류노스케에게 전보로 통지하여 서울로 돌아오도록 재촉하였다. 한편으로는 대원군
의 입궐에 관한 방략서를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萬一]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용산으로 가서 오카모토 류노스케를 맞이했다가 함께 입궐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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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경성 수비대장 바야바라 쓰토무(馬屋原務本)로 하여금 훈련대
를 조종하도록 했고, 또 수비대가 도와주도록 하여 대원군
이 쉽게 입궐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아다치 겐죠(安達謙藏)와 구니모토 시게아키(國友重章)를 공사관으로 불러 그들로 하여금 동지들을 규합하여 용산으로 가서 오카모토 류노스케를 만나 함께 대원군을 호위하여 궁궐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훈련대'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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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미우라 고로는 “20년간 지속되어 온 조선의 화근을 제거하고자 한다. 실로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다”라고 말하고, 마침내 궁궐에 들어가 왕후
를 시해하라는 뜻을 교사하였다. 또 오기하라 히데지로[荻原秀次郞]로 하여금 그의 부하를 인솔하여 용산으로 가서,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협의하여 있는 힘을 다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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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이날 동이 틀 무렵 일본 병사가 일제히 고함을 지르고 총을 쏘며 광화문을 통해 들어와서, 몇 갈래 길로 나뉘어 건청궁(乾淸宮)
【당시 대군주와 왕후
가 머물던 곳으로, 광화문에서 대략 400m 거리이다】
으로 향하였다. 앞으로 나아가던 길에 훈련대
연대장인 부령(副領) 홍계훈(洪啓薰)과 마주치자 칼로 질러 죽이고 병사 몇몇을 추가로 살상하자, 그 나머지 병사들은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일본 병사는 계속해서 대군주와 왕후
가 머무는 전각에 이르렀다. 일본 장교는 정렬한 군사들로 하여금 합문(閤門)을 둘러싸서 지키도록 하여 흉악한 일본 자객들이 왕후를 수색하는 것을 도왔다.
'왕후' 관련자료
'훈련대'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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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자객 20~30명이 그 우두머리의 인도로 칼을 빼어들고 전당으로 돌입하여 왕후
를 찾아 밀실에까지 이르렀다. 궁녀들을 만나자 함부로 머리채를 휘어잡고 구타하며 왕후
가 있는 곳을 물어 보았다.
'왕후'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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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군주를 호위하기 위해 마침 궁전 뜰에 있던 외국인 사바틴(Ivanovich Seredin Sabatin, 士巴津)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본 장교가 병사들에게 호령하며 여러 궁녀에게 행패를 부리는 것을 목격하였다. 또 사바틴에게 왕후
가 있는 곳을 여러 차례 물었으나 사바틴이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목숨도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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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들은 여러 방을 샅샅이 조사하여 마침내 조금 더 깊은 방안에서 왕후를 찾아내고는, 칼날로 베어 그 자리에서 시해하였다. 왕후
의 시신을 비단으로 만든 홑이불에 싸서, 소나무 판자 위에 받들어 모시고는 궁전 뜰로 옮겨 놓았다. 곧바로 자객의 지휘로 다시 녹원(鹿園)
'왕후' 관련자료
전각 부근 지역
수풀 속으로 옮겼다. 왕후의 시신에 석유를 붓고 그 위에 땔나무를 쌓고서 불을 질러 태워 버리니, 단지 몇 조각 해골만이 남았다. 자객들은 그들이 맡은 일을 완전히 마무리하려고 여러 궁녀를 끌어내 왕후 시체의 진위 여부를 조사하여 물었다. ……(중략)……
일본 병사가 입궐하기 전, 일본 수비대 장교는 그 부하들을 모아 놓고 연설하기를, “우리 일본이 조선의 정치를 깨우쳐 이끌어 주고, 청나라와 혈전을 벌여 조선의 독립을 확고히 한 것은 동양의 대국(大局)을 보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 조선의 왕후 민씨
가 조정의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새로운 정치 체제를 무너뜨리니 조선은 망해 없어질 따름이다. 조선이 망하면 일본도 지탱해 보전할 수 없다. 일본이 지탱해 보전하지 못하면 청나라도 홀로 존재하기 어렵다. 청나라가 홀로 존재할 수 없다면 동양이 대세는 뒤따라 무너질 것이다. 그러므로 왕후 민씨
는 바로 조선 500년 종묘
사직
의 죄인이다. 단지 조선의 죄인만이 아니라 곧 일본 제국의 죄인이다. 오직 이뿐만이 아니라, 이는 동양 세계의 죄인이다”라고 하였다. 군중이 모두 박수 갈채를 보내었다.
'왕후 민씨'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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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략)……
『대한계년사』권2, 고종 32년 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