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외원(외국 원조)과 한국 경제
해방이 되던 해부터 한국은 20억 달러가 넘는 미국의 원조를 받아 왔다. 원조 기관으로는 GARIOA(미군 점령 지구 구호 대책 위원회), 그 후의 ECA(미국 경제 협조처), CRIK 및 ICA를 들 수 있다. 원조 기구의 변화에 따라 원조의 성격에도 차이가 있었는데 1950년까지를 첫 단계로 하고, ECA가 원조 사무를 주관한 1951년부터 54년까지를 둘째 단계, 현대와 같이 ICA가 주관하게 된 1955년에서부터 지금까지를 셋째 단계로 편의상 대별할 수 있겠다.
1950년 6·25 전쟁 전까지의 첫 단계에서는 주로 GARIOA, ECA를 통하여 약 6억 달러의 원조를 받았다. 그 중 대부분의 원조는 GARIOA를 거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 원조는 한국 경제의 장기 및 단기 발전 계획에 입각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미군의 잉여 물자를 중심으로 하는 소비 물자를 원조받았던 것이다. ECA 원조는 규모로 본다면 GARIOA보다 적었으나 한국 경제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사실 당시의 ECA 원조는 한국 경제가 자립 경제를 지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6·25 전쟁으로 모든 생산 시설이 파괴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군사비는 화폐량을 계속 증가시켰고 악성 인플레이션의 누적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급속한 템포로 진행되었으므로 ECA, ICA 및 UNKRA 원조의 주력은 인플레이션 방지에 집중되었다.
1955년부터 원조 기구는 ICA로 통합되고 원조 사무도 점차 보다 계획성을 띄어 왔다. 재건 사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요와 물자의 절대량의 부족은 이 때에도 계속되었으나 확대된 원조 도입으로 마침내 1956년부터 물가의 상승을 억제하기 시작하여 1958년에 이르러서는 불안정한 요인이 경제구조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여하튼 물가는 안정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막대한 원조를 받아들이는 동안에 한국의 경제는 현저한 발전상을 보여 왔다. 국민 총생산의 성장률은 1953년 이래 연평균 6%를 유지하여 왔고 2차 산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14.5%로 1차 또는 3차 산업의 5% 내외에 비하면 비약적인 발전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20억 달러 이상의 원조를 기초로 세워진 한국 경제가 구조 면에서 차별적인 특색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첫째, 무엇보다 바라던 국민 경제의 공업화는 여의치 못한 반면, 3차 산업은 산업별 국민 총생산의 구성 면에서 45%라는 높은 수준을 지속하여 왔다.
둘째로 투자 계획의 해이함과 국내 자본 축적의 저조이다. 말할 것도 없이 자본 투자에 있어서는 연계 산업을 파생하여 고용과 투자의 승수 효과를 최대한으로 확보할 수 있는 생산 부문에 투입되어야 했을 것이나 그렇지 못하였다. 물론 사정이야 구구하겠지만 전력, 교통 등에의 투자보다 제당, 제분, 방직 등 소비 산업 부문에 과잉생산을 초래할 만큼 자본을 투입시켰다는 것은 투자 계획이 장기적인 면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국민소득의 분배에서 소득의 균형을 상실케 하였으므로 소득 편중을 초래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국민 자본 형성에 있어서 불가피한 현상이라고도 하겠지만 전반적인 국민 경제면에서 생각할 때 다시 한번 고려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정환, 「미 외원정책 변경과 한국의 경제 성장 문제」, 『사상계』 제7권 제12호(195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