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서울이다(19) - 라디오·TV
지금 서울에는 36만5천9백대의 라디오와 5만6천대의 TV가 있다. 시청률은 라디오가 1백46만명으로 라디오 한 대에 3명씩이 매달려 듣고 있는 셈이며, TV의 시청자는 22만명으로 TV 한 대에 4명이 매달려 보고 있다. 지금 라디오와 TV는 문화의 매개체로 서울시민들뿐만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이 최고도로 이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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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TV가 제 구실을 하게 된 것은 61년 12월 31일 KBS TV가 탄생해서부터이다. (중략) 상업방송국은 MBC에 이어, 동아방송국이 생겼고, 곧 이어 동양방송국이 생겨나 우리나라 상업방송의 개화시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동양TV가 다시 발족하게 되어 서울에는 관영방송 KBS와 상업방송 4개소, TV 2개소가 서로 경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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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방송국이 2개소나 되나, 시청자는 일정한 범위내로 국한되어있어 정부는 금성사로 하여금 일제조립식 TV수상기를 월부판매토록 했고 그후 계속 TV는 국내생산이 장려되어가고 있어 날로 TV대수는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요즘 TV나 라디오가 상업방송국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광고에 치우쳐 청취자나 시청자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는 비난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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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얼마 안 되는 라디오·TV일망정 골고루 보급되어있는 것이 아니고 서울에만 집중되어있는데 서울이 점하고 있는 비율은 라디오가 전국의 18%, TV가 전국의 87%로 TV는 서울 일색이라는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매일경제』, 1967년 9월 8일, 「이것이 서울이다(19) - 라디오·TV」
텔레비전의 격조 - 그 면목일신을 위한 분발을 바란다.
오늘날 인구에 회자되어 있는 매스컴이란 말로 포괄되는 대중전달수단 가운데서도 텔레비전만큼 시민생활과 직결되어있는 매체도 드물 것이다. 그 영향폭이나 깊이에 비기면 텔레비전이 대중문화의 전도체이자 사회교육면에서 중요한 지도성을 지녔다는 그 기능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의식이 투철하지 못한 것 같다. 그것은 갈수록 저조해가는 요즘의 텔레비전의 브라운관에서 그야말로 시청각으로 실증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텔레비전 방영의 역사도 이제 10여 년을 넘기고 보면 그 기술면은 말할 것도 없이 편성면에서 무엇인가 성격과 개성이 정립되어도 좋을만한 시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현실은 이 기대를 송두리째 저버리고 있는 느낌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격조는 떨어져만 가는 한편이요, 편성과 기획에 있어서 대중을 향도하는 모럴이 있는가를 의심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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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흔히 보여주는 시대극이나 궁중극에서 하필이면 시기와 모략과 암투가 얽혀있는 당파싸움을 그려서 시청자로 하여금 암담한 심기에 빠지도록 할 것은 무엇인가. 작가나 제작가의 의도는 우리 민족의 그런 불행한 일면을 비판하고 풍자하는데 있었다고 할지는 모르나 일반 청중에 있어서 과연 그 의도가 전달될 것인지, 아니면 단편적인 장면에만 흡수되는 역기능이 더 크지 않은지 신중히 생각해봄직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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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필시 원작이나 각본의 빈곤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기획이나 연출에도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원작이라면 코미디의 스크립터도 어지간히 빈곤하다. 각국마다 나오는 코미디가 거의 예외 없이 도둑질이나 사기같은 모티브나 싸움판을 방불케하는 거칠은 대사와 몸짓으로만 종시하면서 억지웃음을 강요하고 있는 데는 여간 저항이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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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낱낱이 텔레비전의 프로를 비평할 겨를은 없으나 이것 하나만은 덧붙여 당부해두고 싶은 것은 대담프로에 출연하는 사회인사들이 주제에 대해서 충분히 연구를 하고 나가달라는 것이다. 모두가 그러지는 않지만 개중에는 상식선에도 이르지 못하는 발언이 지도적 위치에서 예사로 내뱉어짐을 보고는 이쪽이 도리여 진땀이 흐르는 적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아무쪼록 텔레비전방송은 우리 사회 교양을 높일 수도 낮출 수도 있는 대중문화 전파의 중심체라는 사명감아래 그 면목일신에 분발해주기를 절망할 뿐이다.
『조선일보』, 1974년 9월 6일, 「사설 : 텔레비전의 격조 -그 면목일신을 위한 분발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