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8도선 탄생의 목격자로서, 구체성을 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국무부와 군 당국은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는 맥아더 장군에게 필요한 명령을 내리고 다른 연합국 정부와 일본 항복에 대해 필요한 협의를 하기 위한 회의였다. 해당 목적에 따라 3부조정위원회(SWNCC,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는 국무부 측의 던(James C. Dunn), 육군 측의 맥클로이(John J. McCloy), 그리고 해군 측의 바드(Ralph Bard)를 구성으로 8월 10일에서 15일 사이 몇 차례 장시간 회의를 가졌다. 8월 10일과 11일에는 펜타곤의 맥클로이 사무실에서 던, 맥클로이, 바드가 모여 회의를 열었는데, 이 회의는 거의 밤새 진행되었다. 의제는 일본 항복의 수락에 관한 협의였다. 국무부는 국무부 장관 제임스 번즈(James Byrnes)를 통해 미군이 감당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북쪽 지역까지 항복 받는 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군은 당장 투입할 병력이 부족했으며, 시간 및 거리 면에서도 소련군보다 먼저 북쪽 멀리 도달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군 당국은 소련을 상대로 제시할 항복 수용안이 미국의 현실적인 군사 능력을 훨씬 넘어설 경우, 소련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적다고 보았다. 이 문제의 핵심은 바로 속도였다. 맥클로이는 본인(러스크)과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대령에게 대기실에 가서 가능한 한 북쪽까지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는 ‘정치적 요구’와 진주 능력에 있어 명백한 ‘군사적 한계’, 두 측면을 조화시키는 안을 작성해 오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우리는 38도선을 건의했다. 물론 미국은 소련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38도선까지 진주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군 관할 지역 내에 한국의 수도를 포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해당 안을 내놓았다. 38도선은 국무성에 대한 육군 측 건의에 포함되었으며, 이후 이 방침은 국제적으로 합의되었다. 소련이 38도선을 받아들였을 당시 본인은 약간 놀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왜냐하면 본인은 그 지역 내 각자의 군사적 위치에 비추어볼 때 소련은 훨씬 남쪽의 선을 고집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상은 비록 문서가 아닌 기억에 근거한 것이지만, 이 쟁점에 약간의 추가적인 도움이 되어주리라 생각한다.
「Draft Memorandum to the Joint Chiefs of Staff」,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 diplomatic papers, 1945. The British Commonwealth, the Far East Volume VI』,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