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 군사 정변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 혁명이다. 따라서 5·16 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꽃 피워 나가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군사 혁명은, 단지 정치 권력이 국민의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넘어갔다는 데서 그친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혁명 공약이 암암리에 천명하고 있듯이, 무능하고 고식적인 집권당과 정부가 수행하지 못한 4·19 혁명의 과업을 새로운 혁명 세력이 수행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5·16 혁명의 적극적 의의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는 5·16 혁명은 4·19 혁명의 부정이 아니라 그의 계승, 연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냉철히 생각할 때, 4·19 1년 만에 다시 정변을 보지 않으면 안 된 이 땅의 비상하고 절박한 사태에 대한 책임을 우리는 어느 한 정당이나 개인에다만 전적으로 뒤집어 씌움으로써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 배후에서 또는 주변에서 사회적 혼란을 선동한 방종무쌍했던 언론, 타락하고 망국적인 돈을 앞세운 선거, 이미 도박장으로 변화한 국회, 시세에 끌려 당쟁에만 눈이 어두웠던 소위 정객들에게도 책임이 적지 않으며,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국민각자에도 다소를 막론하고 간접적 책임이 있음을 우리들은 준열하게 자아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5·16 혁명으로 우리들이,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스스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의 뿌리를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는 마련된 것이다. 혁명 정권은 지금 법질서의 존중, 강건한 생활기풍의 확립, 불량도당의 소탕, 부정축재자의 처리, 농어촌의 고리채정리, 국토건설사업 등에서 괄목할 만한 출발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수 백 년의 사회악과 퇴폐한 관성, 원시적 빈곤이 엉클어져 있는 이 어려운 조건 밑에서 정치혁명, 사회혁명, 도덕혁명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혁명 정권이 치밀한 과학적 계획과 불타는 실천력을 가지고 모든 과제를 해결해 나아갈 것을 간곡히 기대하는 동시에 동포들의 자각 있는 지지를 다시금 요청해서 마지않는 바이다. ……(중략)……
한편, 일체의 권력이 혁명 정권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권력이 남용되지 않도록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이에 만전의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본래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더욱이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함은 하나의 정치학적 법칙이다. 이러한 권력의 자기부식 작용에 걸리지 않고 오늘의 맑고 새로운 자세를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시급히 혁명 과업을 완수하고, 최단 시일 내에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한 후 쾌히 그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엄숙한 혁명 공약을 깨끗이, 군인답게 실천하는 길 이외의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국군의 위대한 공적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영원히 빛날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의 군사 혁명은 압정과 부패와 빈곤에 시달리는 많은 후진국 국민들의 길잡이요, 모범으로 될 것이다.
「권두언 : 5·16 혁명과 민족의 진로」, 『사상계』 제9권 제6호(1961.6)
내가 보기에 걱정은 이 혁명에 아무 말이 없다는 것이다. 말이 사실은 없지 않은데, 만나면 반드시 서로 묻는데, 신문이나 라디오에는 일체 이렇다는 소감 비평이 없다. 언론인 다 죽었나? 죽였나? 이따금 있는 형식적인 칭찬 그까짓 것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의 말이 아니다. 의사보고 거뜬히 인사하는 것은 병이든 사람이 아니다. 의사 온 줄도 모르면 죽은 사람이다. 참말 명의는 병이 든 사람이 허튼 소리를 하거나 몸부림을 하거나 관계 아니한다. 왜? 자신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총 칼 보고 검을 집어 먹었지. 겁난 국민은 아무것도 못한다. 국민이 겁이 나게 하여 가지고는, 비겁한 민중 가지고는, 다스리기는 쉬울지 몰라도 혁명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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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들 하는 말이 우리 사회는 아직 민주주의를 하기에는 정도가 모자란다 하지만 모르는 말이다. 민주주의일수록 어린 아기 때부터 해야 한다. 낳은 어미가 아니니 아직은 계모의 심정을 좀 부리다가 차차 진짜 어미 노릇을 하겠다면 되는 말인가? 낳지 않았을 수록 처음부터 어미 노릇을 더 정성으로 해야 할 것 아닌가? 착한 일에도 무슨 시기가 있느냐? 없다. 아직은 독재를 좀 하다가 점진적으로 민주정치를 한다는 그런 모순된, 어리석은, 거짓말이 어디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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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을 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 못한다. 아무 혁명도 민중의 전적 찬성, 전적 지지, 전적 참가를 받지 않고는 혁명이 아니다. 그러므로 독재가 있을 수 없다. 민중의 의사를 듣지 않고 꾸미는 혁명은 아무리 성의로 했다 하여도 참이 아니다. 또 민중의 의사를 모르고 하는 것이 자기네로서는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또 사실 민중에게 물질적인 행복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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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민중을 앞에 두지 않고 꾸미는 혁명은 참 혁명이 아니다. 반드시 어느 때 가서는 민중과 관계가 나빠지는 날이 오고야 만다. 즉 다시 말하면 지배자로서의 본색을 나타내고야 만다. 그리고 오래 속였으면 속였을 수록 그 죄는 크고 그 해악은 깊다.
함석헌, 「권두언 : 5·16을 어떻게 볼까?」, 『사상계』 제9권 제7호(19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