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한국의 건국 신화 읽기
  • 1. 고조선의 건국 신화에 나타난 역사상
  • 1) 단군 신화의 자료와 계통
  • 나. 『제왕운기(帝王韻紀)』 단군 신화의 검토

이승휴와 『제왕운기

다음으로 『삼국유사』와 많은 시간 차이를 두지 않고 씌어진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전하는 단군 신화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승휴(李承休: 1224∼1300)는 고려 후기의 학자로서, 몽골의 침입으로 국내 정치 상황이 혼란했던 시기에 신진 유학자로 정치계에 등장하였다. 충렬왕의 실정과 부원 세력을 비판한 상소를 올린 결과 파직당하여 은둔하게 되었고, 그 즈음인 1287년(충렬왕 13)에 『제왕운기』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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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사 이승휴 유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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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저술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당시 고려는 30여 년에 걸친 몽골과의 항쟁에도 불구하고 결국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하였으며, 자주국으로서의 면모를 크게 잃어버리게 되었다. 게다가 원나라에 편승한 부원 세력의 득세로 사회적 혼란이 거듭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휴는 고려가 자주적이고 독자적인 국가임을 강조하고, 몽골의 정치적 지배에 저항하려는 의지를 표출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승휴는 자국의 강역과 역사 전통에 대한 강렬한 자각을 통해 이러한 의지를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몽골의 외압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볼 때, 같은 시기의 일연(一然)이 저술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집필 동기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두 저술에서 모두 단군을 기원으로 하는 역사 의식을 드러낸 것은 우리 역사의 유구함과 독자성을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제왕운기』는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는데, 상권은 중국 역사를 간추려 삼황 오제(三皇五帝), 하(夏), 은(殷), 주(周)의 3대로부터 원나라까지를 다루고 있다. 하권은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내용으로, 동국 군왕 개국 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와 이조 군왕 세계 연대(李朝君王世系年代)의 2부로 나누어, 전자에서는 단군의 전 조선(前朝鮮)⋅기자의 후 조선(後朝鮮)⋅위만(衛滿)의 찬탈, 삼한(三韓)을 계승한 신라⋅고구려⋅백제의 3국 및 후고구려⋅후백제⋅발해가 고려로 통일되는 과정까지를 칠언 고시로 읊었고, 후자에서는 고려 태조 세계 설화(世系說話)로부터 필자 당대인 충렬왕 때까지를 오언으로 읊었다. 이렇게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구성하면서 중국사와 한국사를 각 권으로 분리하였으며, 강역도 요동(遼東)에 따로 천지 세계를 상정하여 중국과 엄연히 구별됨을 밝혔다. 특히 발해에 대해서도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하고, 고려 태조 때 이들이 귀순해 온 사실을 서술함으로써 최초로 발해를 한국 역사 속에 포함시켰다.

그러면 『제왕운기』 단군 신화의 내용을 읽어 보기로 하자.

[사료 1-1-02]『제왕운기(帝王韻紀)』 하권, 동국 군왕 개국 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

(가) 「본기」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가 있었는데 이름을 웅(雄)이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삼위태백(三危太白)에 내려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환웅은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고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서 태백산 정상 신단수(神檀樹) 밑으로 내려왔다. 이가 환웅 천왕(桓雄天王)이다.

(나) 운운(云云) 손녀(孫女; 웅녀)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람이 되게 하였다. 그녀가 단수 신(檀樹神)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檀君)이라 하였다. 단군은 조선의 땅을 차지하여 왕이 되었다.

(다) 시라(尸羅; 신라), 고례(高禮; 고구려), 남북 옥저, 동북 부여, 예맥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다. 단군은 1038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아사달(阿斯達)로 들어가 산신이 되어 죽지 않았다.

(라) 「단군본기」에 이르기를,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부루(夫婁)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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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운기』 상권
제왕운기』 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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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왕운기』에 보이는 단군 신화

제왕운기』의 단군 신화는 『삼국유사』의 단군 신화에 비하여 내용이 소략하지만, 주요 줄거리는 매우 유사하다. 다만 몇 가지 점에서 차이점을 드러내는데, 먼저 이승휴는 ‘본기’를 인용하여 단군 신화를 기술하고 있다. 이 「본기」는 일연이 인용한 「고기」와는 다른 전거이다. 내용상 여러 면에서 차이점을 보이기 때문이다.

차이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환인을 상제(上帝)라고 표현한 점, ㉡ 단군이나 신단수, 단수 신의 표현에서 『삼국유사』에 ‘단(壇)’으로 표현한 것과는 달리 ‘단(檀)’으로 표현한 점, ㉢ 『삼국유사』의 웅녀가 사라지고, 환웅 천왕이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게 하여 사람의 몸이 되게 하고, 단수 신(檀樹神)과 혼인시켜 단군을 낳는 것으로 되어 있는 점, ㉣ 단군의 재위 기간이 다른 점 등이다.

그리고 (가)와 (나) 사이에는 ‘운운’이라고 하여 「본기」의 내용을 생략하여 인용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생략된 부분이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지만, 『삼국유사』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아마도 환웅 천왕이 풍백 등 신하를 거느리고 세상을 다스리는 내용일 가능성이 크지만,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 만약 이 부분이 생략된 것이라면,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단군 신화 중에서 환인-환웅-(손녀+신단수)-단군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중요시하여 이 부분만 인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따라서 『제왕운기』에 인용된 ‘본기’의 단군 신화가 본래부터 소략했다기보다는 이승휴가 『제왕운기』의 서술 목적에 맞게 발췌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단군 신화, 좀 더 엄격히 말하자면 「고기」와 「본기」에 전하는 단군 신화의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 ‘상제’라는 표현은 표기의 문제로 볼 수도 있지만, 본래 ‘상제(上帝)’라는 용어는 중국 고대에서 지고한 지위를 가지는 천신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며, 유교의 천명 사상으로 받아들여져 만물의 근본이자 황제 권력의 원천으로 인식되었다. 그런 점에서 유교적인 인식이 투영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 ‘단(壇)’과 ‘단(檀)’의 차이는 그 해석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단(壇)’은 제단이라는 의미이고, ‘단(檀)’은 박달나무, 즉 나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표현은 ‘단군’을 표기할 때보다는 ‘신단수’ 혹은 ‘단수 신’과 연관 지어 생각할 때 좀 더 그 의미상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즉 ‘신단수(神壇樹)’라고 할 때에는 제단의 성격이 좀 더 강조되는 반면, ‘신단수(神檀樹)’라고 할 때에는 신성한 나무의 성격이 강조되는 것이다. 어느 것으로 하든 신성한 나무에 대한 신앙적 요소가 들어 있기는 마찬가지지만, 태백산 ‘신단수(神壇樹)’라고 할 때에는 종교적 제의가 이루어지는 종교적 성소로서 장소의 의미도 깊이 고려되기 때문이다. 이는 환웅 천왕의 손녀가 단수 신(檀樹神)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어지는 내용과 연관 지어 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즉 단수 신은 인격 신으로서의 신수(神樹)의 관념, 즉 수목 신앙의 측면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단수는 후대의 서낭나무⋅당산나무 등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단군 신화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 단군의 계보 문제이다. 즉 『삼국유사』에서는 환웅이 곰에서 인간으로 변신한 웅녀와 결합하는 데 반하여, 『제왕운기』에서는 환웅의 손녀가 인간으로 변신하여 단수 신(檀樹神)과 결합하고 있다. 단군의 혈연적 계보에서 천손으로서의 정통성이 『삼국유사』에서는 부계(父系)로 이어지지만, 『제왕운기』에서는 모계(母系)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보상의 차이가 아마도 두 단군 신화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라)에서는 「단군본기」를 인용하여 단군이 비서갑 하백의 딸과 결혼하여 부루를 낳았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단군본기」는 그 책 이름으로 보아 앞서 인용한 「본기」와는 다른 전거 자료이다. 이 「단군본기」도 단군 신화의 내용을 전하는 자료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이 「단군본기」의 단군 신화가 앞서 살펴본 「본기」의 단군 신화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단군의 배우자인 하백의 딸이나, 아들인 부루의 존재는 이승휴가 인용한 「본기」는 물론, 일연이 인용한 「고기」에서도 전혀 볼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런데 일연의 『삼국유사』 고구려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단군기(壇君紀)」에는 ‘단군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을 맞이하여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고 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내용은 이승휴가 인용한 「단군본기」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다만 하백의 출신을 비서갑(非西岬) 혹은 서하(西河)라고 한 점이 다르다. 그래도 책 이름이나 내용으로 볼 때 「단군본기」와 「단군기」는 같은 책일 가능성이 높다. 하백의 딸의 존재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인 주몽 신화에서도 나타난다. 즉 주몽은 해모수와 하백의 딸인 유화가 결합하여 낳은 아들이다. ‘단군+하백의 딸=부루’라는 혈연 계보와 ‘해모수+하백의 딸(유화)=주몽’이라는 혈연 계보의 구조가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주몽 신화에서는 동부여의 왕으로 ‘해부루’가 등장한다. 「단군본기」의 ‘부루’가 동부여의 왕 ‘해부루’와 동일 인물인지는 불투명하지만, 이승휴는 양자를 동일인으로 생각하였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승휴는 이 「단군고기」의 내용을 부여에 대한 주석으로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제왕운기』의 단군 신화는 「본기」와 「단군본기」를 인용하여 『삼국유사』의 「고기」와는 다른 단군 신화의 내용을 전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 시대 후기까지 전해지던 단군 신화의 내용이 여러 종류였을 가능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제왕운기』에 전하는 단군 신화와 유사한 내용이 조선 시대에 편찬되었던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 조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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