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한국의 건국 신화 읽기
  • 1. 고조선의 건국 신화에 나타난 역사상
  • 1) 단군 신화의 자료와 계통
  • 다. 『응제시주(應製詩註)』 단군 신화의 검토

▣ 『응제시주(應製詩註)』에 담긴 조선 전기의 단군 인식

『응제시주』는 조선 태조 때의 문신 권근(權近: 1352~1409)의 응제시에 손자 권람(權擥: 1416~1465)이 자세히 주석을 붙여 엮은 책으로, 1462년(세조 8)에 간행되었다. 조선 개국 초인 1396년(태조 5)에 권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홍무제의 어제시(御製詩) 3수를 받고, 응제시(應製詩) 24수를 지어 바쳤던 것으로, 권람이 그 시에 주석을 붙인 것이다. 응제시 자체와 권람의 주석 사이에는 역사 의식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조선 전기의 단군 인식에 일정한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응제시주』에 수록된 주석의 기사는 사료가 인멸되기 이전 시대의 모든 전적을 충실히 참고한 것이어서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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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 응제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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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 응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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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1-1-03]『응제시주應製詩註』 처음으로 동이(東夷)를 연 임금 (始古開闢東夷主)

[自註: 권근의 주]

옛날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삼고 단군이라 불렀다. 이때가 요(堯)임금 원년 무진이다.

[增註: 권람의 주]

(가)「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 웅(雄)이 있었다. 웅은 지상으로 내려가 인간 세계를 교화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웅은 천부인 3개를 받고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 이가 환웅 천왕(桓雄天王)이다. 웅은 바람, 비, 구름을 맡은 신을 거느리면서 곡식⋅수명⋅질병⋅형벌⋅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나)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빌어 사람 되기를 원했다. 이에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百日)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형체를 얻을 수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그것을 먹었는데,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고 곰은 금기를 지켰다. 그리하여 곰은 삼칠일(三七日: 21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함께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양 단수(檀樹) 아래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였다. 그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단군은 요임금과 같은 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고 하였다.

(다) 단군은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을 맞아 아들을 낳아 부루(夫婁)라 하였다. 그가 곧 동부여의 왕이다. 우(禹)임금이 도산(途山)에서 제후를 모아 맹세를 할 때, 단군은 아들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라) 단군은 우임금의 하나라를 지나,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 아사달은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의 구월산이며, 그 사당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단군은 1048년 동안 살았다. 그 후 164년이 지난 기묘년에 기자(箕子)가 와서 임금에 봉해졌다.

단군 신화가 실린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라는 시에는 자주(自註)와 증주(增註)가 있는데 자주는 원작자인 권근이, 증주는 권람이 붙인 것이다. 자주와 증주 사이에도 내용상의 차이가 있다. 권근의 주에는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자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삼고 단군이라고 불렀다.”라고 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신인을 단군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기존의 단군 신화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즉 환인과 환웅의 존재가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형의 신화 역시 조선 시대 역사 자료에서는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권근의 아들 권제(權踶)가 편찬한 「동국세년가(東國世年歌)」, 권근의 외손인 서거정(徐居正)이 편찬에 참여한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에 대거 수록되어 있다. 단군이 직접 하늘에서 내려온 신인으로 그려지는 단군 신화가 조선 초기에는 널리 유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권람이 지은 증주에는 이와는 다른 단군 신화의 내용을 전하고 있다. 권람이 증주에서 인용한 자료는 「고기」이다. 「고기」라는 이름의 전거는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단군 신화를 기술하면서 인용한 자료와 그 이름이 같다. 이 『응제시주』에서 「고기」를 인용하여 서술한 내용이 전체적으로는 『삼국유사』 단군 신화의 내용과 유사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 “널리 사람을 구하고자 하였다[弘益人間].”라는 표현이 없고, 대신 “인간 세계를 교화할 뜻을 가지고(意慾下化人間)”로 되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의 표현도 『응제시주』의 것과 같다. ㉡ 신단수, 단군의 표현이 『제왕운기』와 마찬가지로 ‘단(檀)’으로 되어 있다. ㉢ 비서갑 하백의 딸을 맞아 부루를 낳았다는 내용은 『삼국유사』의 단군 신화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유사한 내용이 『제왕운기』에서 인용한 「단군고기」에서 보인다. ㉣ 단군의 즉위 시기 및 수명, 기자의 등장에 대한 서술에서 『삼국유사』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우(禹)가 도산(途山)에서 제후를 모아 맹세를 할 때, 단군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는 내용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는 보이지 않는 전혀 새로운 내용이다.

이렇게 볼 때 권람이 인용한 「고기(古記)」의 내용에는 일연이 인용한 「고기」, 이승휴가 인용한 「본기」 및 「단군고기」의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권람이 인용한 「고기」는 어느 특정한 책이 아니라 옛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여러 기록을 합하여 일컬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응제시주』의 내용상 중요한 점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는 보이지 않는 “부루가 우에게 조회하였다.”라는 내용이다. 유사한 내용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보이기 때문에, 조선 초기에는 이미 널리 알려진 내용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고려 말 안향(安珦)이 지은 시 '충선왕을 시종하여 연경에 가는 감회'에서는 부루가 도산에서 우에게 옥 폐백을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응제시주』의 내용과 서로 통하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 역시 고려 시대부터 전승되어 오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에 들어서 유교가 강조되었고, 안향 역시 한국 성리학의 시초로서 조선 시대부터 존숭되던 인물인만큼, 부루의 도산 조회에 대한 전승이 성리학의 확산과 더불어 주목받으면서 단군 신화의 내용으로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예상해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삼국유사』, 『제왕운기』, 『응제시주』 등에 전해지는 단군 신화의 내용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 외에도 조선 시대에 편찬되어 단군 신화를 전하는 적지 않은 자료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위 세 유형의 단군 신화만 살펴보아도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단군 신화의 내용이 한 가지가 아닌 여러 형태로 전승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전승 과정에서의 변형이나 후대인의 인식이 투영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렇게 다양한 모습에서 단군 신화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역사와 더불어 형성된 것임을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제 단군 신화의 내용에서 몇 가지 논점들을 짚어 가면서 단군 신화의 이해에 좀 더 다가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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