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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건국 신화 읽기
  • 2. 고구려의 주몽 신화 읽기
  • 2) 고구려 주몽 신화의 전승 자료와 내용
  • 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명왕 조

〔사료 2-2-03〕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명왕 조

(가) 부여(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서 자식을 얻고자 산천에 제사를 드리러 가다가,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 아래에서 금색 개구리[蛙] 모양의 어린아이를 얻었다. 이름을 금와(金蛙)라 짓고,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후에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천신의 명이라 하여 왕에 권하여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에 옮겨 도읍하고는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 옛 도읍지에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로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는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났는데, 유화가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는 자가 나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수 가의 집으로 꾀어서 사통하고 돌아오지 않아, 부모가 나를 책망하여 우발수에서 귀양살이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나) 금와는 이상하게 여겨서 유화를 방 안에 가두어 두었다. 햇빛이 유화에게 비추는데, 몸을 피하여도 쫓아와 비추었다. 마침내 임신을 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금와왕은 알을 개,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고,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하였다. 다시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 왕은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지지 않아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고 말았다. 유화가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빼어나고 기이하였다. 남달리 뛰어나 나이가 겨우 일곱 살이었을 때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으므로 이로 이름을 삼았다.

(다) 금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어서 항상 주몽과 더불어 놀았는데 그 기예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니어서 사람됨이 용맹스럽습니다. 만약 일찍 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없애 버리십시오!”

왕은 듣지 않고 주몽을 시켜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날랜 말을 알아내어 먹이를 적게 주어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은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들판에서 사냥할 때 주몽이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오히려 주몽은 짐승을 매우 많이 잡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가 또 죽이려 꾀하자, 주몽의 어머니가 이를 눈치채고 이르기를,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일 것이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안 되겠느냐? 지체하여 머물다가 욕을 당하느니보다 멀리 가서 뜻을 이룸이 바람직하다.” 하였다.

(라) 그래서 주몽은 오이(烏伊)⋅마리(摩離)⋅협보(陜父)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함께 길을 떠났다. 엄사수(淹㴲水)에 이르러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어 추격병에게 잡힐 지경에 이르자, 물에게 고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 하면 좋은가?”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하는 기마병이 건널 수 없었다.

(마) 주몽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삼베 옷[麻衣]을, 한 사람은 승려의 옷[衲衣]을, 한 사람은 마름 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자네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가?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 하고 묻자, 삼베 옷 입은 사람은 ‘재사(再思)’라고 하였고, 중 옷 입은 사람은 ‘무골(武骨)’이라고 하였으며, 마름 옷 입은 사람은 ‘묵거(黙居)’라고 하면서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이에 주몽은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의 성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무리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이제 하늘의 큰 명령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어진 사람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렀다.

(바)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하려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다만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치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그로 말미암아 고(高)로써 성을 삼으니,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였다. 이 해는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듣고 와 따르는 자가 많았다.【(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주몽은 졸본 부여에 이르렀다. 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은 왕위를 이었다.”)】

(사) 왕은 비류수 가운데로 채소 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사냥하며 찾아가서 비류국(沸流國)에 이르렀다. 그 나라 왕 송양(松讓)이 나와 보고는 말하였다.

“과인(寡人)이 바다의 구석에 치우쳐 있어 일찍이 군자를 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서로 만나니 다행이 아닌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겠다.”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다.

송양이 말하였다.

“우리는 여러 대에 걸쳐서 왕 노릇을 하였다. 땅이 좁아서 두 왕을 용납하기에 부족하다. 그대는 도읍한 지 얼마 되지 않으니 나의 부하가 되는 것이 어떠한가?”

왕은 그 말을 분하게 여겨, 그와 더불어 말다툼하고 또 서로 활을 쏘아 재능을 겨루었는데, 송양이 당해 내지 못하였다.

2년(기원전 36) 여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오므로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봉하여 우두머리로 삼았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아) 3년(기원전 35) 봄 3월에 황룡(黃龍)이 골령(鶻嶺)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는데 그 빛깔이 푸르고 붉었다.

4년(기원전 34) 여름 4월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은 7일 동안이나 빛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자) 14년(기원전 24)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그 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써 장사 지내고 마침내 신묘(神廟)를 세웠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부여에 보내 토산물을 주어 그 은덕을 갚았다.

19년(기원전 19) 여름 4월에 왕자 유리(類利)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오니, 왕은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으니, 나이가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 지내고 동명성왕이라고 이름하였다.

先是扶餘王解夫婁老無子, 祭山川求嗣, 其所御馬至鯤淵, 見大石, 相對流淚.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 立爲太子. 後其相阿蘭弗曰, 日者天降我曰, 將使吾子孫立國於此, 汝其避之. 東海之濱有地, 號曰迦葉原, 土壤膏腴宜五穀, 可都也. 阿蘭弗遂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其舊都有人, 不知所從來, 自稱天帝子解慕漱, 來都焉. 及解夫婁薨, 金蛙嗣位. 於是時, 得女子於太白山南優渤水, 問之, 曰,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心山下鴨淥邊室中私之, 卽往不返.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優渤水.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所炤,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炤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許. 王棄之與犬豕, 皆不食, 又棄之路中, 牛馬避之. 後棄之野, 鳥覆翼之. 王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裹之, 置於暖處, 有一男兒, 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嶷然異常. 自作弓矢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其伎能皆不及朱蒙. 其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其爲人也勇. 若不早圖, 恐有後患, 請除之.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而減食令瘦, 駑者善養令肥. 王以肥者自乘, 瘦者給朱蒙. 後獵于野, 以朱蒙善射, 與其矢少, 而朱蒙殪獸甚多. 王子及諸臣又謀殺之, 朱蒙母陰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而不可. 與其遲留而受辱, 不若遠適以有爲. 朱蒙乃與烏伊⋅摩離⋅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㴲水,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我是天帝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者垂及, 如何. 於是魚鼈浮出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行至毛屯谷, 遇三人, 其一人着麻衣, 一人着衲衣, 一人着水藻衣. 朱蒙問曰, 子等何許人也, 何姓何名乎. 麻衣者曰, “名再思.” 衲衣者曰, 名武骨.” 水藻衣者曰, “名黙居. 而不言姓. 朱蒙賜再思姓克氏, 武骨仲室氏, 黙居少室氏. 乃告於衆曰, 我方承景命, 欲啓元基, 而適遇此三賢, 豈非天賜乎. 遂揆其能, 各任以事. 與之俱至卒本川.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一云, 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時朱蒙年二十二歲,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世二十一年甲申歲也. 四方聞之, 來附者衆.

王見沸流水中, 有菜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獵往尋, 至沸流國. 其國王松讓出見曰, “寡人僻在海隅, 未嘗得見君子, 今日邂逅相遇, 不亦幸乎. 然不識吾子自何而來. 答曰, 我是天帝子, 來都於某所.” 松讓曰, 我累世爲王, 地小不足容兩主. 君立都日淺, 爲我附庸可乎. 王忿其言, 因與之鬪辯, 亦相射以校藝, 松讓不能抗. 二年夏六月, 松讓以國来降, 以其地為多勿都, 封松讓為主. 麗語謂復舊土為多勿, 故以名焉. 三年春三月, 黄龍見於鶻嶺. 秋七月, 慶雲見鶻嶺南, 其色青赤. 四年夏四月, 雲霧四起, 人不辨色七日. 秋七月, 營作城郭宫室. … 十四年秋八月,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太后禮葬之, 遂立神廟. 冬十月, 遣使扶餘, 饋方物, 以報其德. 十九年夏四月, 王子類利自扶餘與其母逃歸, 王喜之, 立爲太子.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歲. 葬龍山, 號東明聖王.

▣ ‘고구려 본기’ 주몽 신화의 자료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 편찬자들은 동명왕 기 주몽 신화를 찬술할 때 『위서(魏書)』와 「구삼국사」 등 여러 관련 자료의 기사를 종합하여 서술하였다. 특히 곤연(鯤淵)⋅웅심산(熊心山) 기사 등은 아래 「구삼국사」에서 인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구삼국사」의 건국 신화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와 같이 현 고구려 본기의 주몽 신화는 『위서』에 전하는 주몽 신화의 구성과 틀의 영향을 받고 있으므로, 순수하게 국내에 전승되던 건국 신화 자료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 내용 구성에서 『위서』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자료가 추가되어 있으므로, 국내에 전승되어 오던 주몽 신화를 이해하는 보조 자료로 활용할 수는 있겠다. 따라서 국내에 전승되던 주몽 신화의 구체적인 검토 자료로는 『동명왕편』에 인용되었던 「구삼국사」가 가장 중요한데, 문제는 「구삼국사」가 전체 기사를 알 수 없는 불완전한 기사라는 점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한계가 있음에도 일단 고구려 본기의 주몽 신화를 1차적인 검토 자료로 활용함이 타당할 것이다.

▣ ‘고구려 본기’ 주몽 신화의 내용 구성

고구려 본기의 주몽 신화는 내용으로 보아 크게 9개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가)는 해부루와 금와왕 및 동부여 건국과 관련된 설화로, 아래에서 살펴볼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의 기사와 일치하므로 「구삼국사」 기사를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금와왕이 유화를 만나는 대목만은 다른 자료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구려 본기에는 해모수 신화가 기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구삼국사」의 주몽 신화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은 아래 「구삼국사」의 주몽 신화를 참고하기 바란다.

(나)는 유화가 임신을 하고 알을 낳자 금와왕이 이를 버렸으나 동물들이 보호하면서 돌려주어 주몽이 태어나는 내용이다. 앞서 살펴본 부여의 동명 신화와 그 기본 모티브가 동일하지만 난생 설화적 요소가 있다는 점이 다르다. (나) 부분의 서술은 『위서』 주몽 신화의 문장을 인용하여 서술하였다.

(다)는 주몽이 금와왕 아들들의 시기를 받아 곤경에 처하는 내용으로, 「구삼국사」의 내용과 서로 통하지만 그 자세함에 차이가 있다. 고구려 본기 편찬자들이 내용을 축약한 것인지, 아니면 별도의 자료에 의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라)는 부여에서 탈출한 주몽이 신이한 능력을 발휘하여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면서 부여군의 추격을 뿌리치는 장면이다. 이 대목 역시 부여의 동명 신화와 그 모티브가 상통한다. 즉 고구려의 주몽 신화가 부여 동명 신화의 변용이라는 점은 바로 (나)와 (라)가 동명 신화의 모티브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마) 이하의 내용은 건국하였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동명 신화와는 다른 주몽 신화만의 독자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마)는 모둔곡에서 3인을 만나 신하로 거느리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구삼국사」에는 없는 내용이며, 『위서』의 주몽 신화에는 간략하지만 유사한 내용이 있다. 이 부분은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할 때 일부 집단을 거느렸지만, 남하 과정에서 주변 세력을 흡수하여 자신의 세력 기반을 키우는 상황을 반영한 내용이다.

(바)는 졸본천에 이르러 고구려를 건국하는 대목이다. 고구려의 건국지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환인시 일대로, 졸본천은 지금의 혼 강(江)으로 추정된다.

(사)는 건국 후 주변에 있던 비류국 송양왕과 재주를 겨루어 그를 굴복, 복속시키는 내용이다. 이 부분은 「구삼국사」에 그 내용이 자세한데, 고구려 본기에서는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 송양왕은 본래 졸본 지역의 토착 세력으로, 주몽이 송양왕을 압도하여 복속시켰다는 것은 부여에서 내려온 유⋅이민 세력이 토착 세력을 통합하여 거느리는 과정을 보여 준다.

(아)는 주몽이 골령에 도성과 궁궐을 세우는 과정을 보여 주는데, ‘광개토왕비’에는 “비류곡(沸流谷) 졸본(忽本) 서쪽 산 위[山上]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이 도성의 위치는 지금의 환인시 오녀 산성과 하고 성자 일대로 추정된다. 「구삼국사」에도 유사한 내용이 보이는데, 「구삼국사」 쪽이 신이하고 설화적인 성격이 훨씬 두드러진다. 고구려 본기와 「구삼국사」 서술 방식의 차이를 엿볼 수 있는 좋은 대목이다. 아마도 이 부분은 고구려 본기의 편찬자들이 「구삼국사」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여 기술한 것을 추정된다.

(자)는 동부여에서 어머니 유화가 죽어 신묘를 세우고, 또 유리와 부인이 동부여에서 도망 왔으며, 주몽이 죽자 유리가 왕위를 계승하는 내용이다. 유리의 남하와 왕위 계승은 백제의 건국 신화에서 비류와 온조가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는 배경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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