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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건국 신화 읽기
  • 5. 가야의 건국 설화 읽기
  • 1) 김수로왕 신화의 전승과 성립
  • 가.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 - 김수로의 즉위와 가락국 건국

가야의 건국 신화는 내용상 두 종류의 신화가 전해진다. 하나는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의 ‘김수로왕(金首露王) 신화’로서 김해 지방 금관가야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 조에 전하는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신화로서 고령 대가야의 것이다.

즉 한국 고대사의 주요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는 가야의 건국 신화가 전해지지 않는다. 『삼국사기』가 고구려⋅백제⋅신라의 본기만 편찬하는 등, 이 3국만을 중심으로 해서 만든 역사서이기 때문에 가야의 건국 신화를 따로 전할 여지가 없었겠지만, 아마도 가야사에 대한 자료를 제대로 수집하지 못한 이유도 고려할 수 있다.

물론 『삼국사기』에 가야의 건국 신화 내용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첫머리에 김유신 가문의 내력을 기록하면서 김수로가 가야를 건국한 사실을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료 5-1-01〕『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

김유신(金庾信)은 (신라의) 서울 사람[王京人]이었다. 그 12대 조상인 수로(首露)는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서기 42)에 구봉(龜峰)에 올라가 가락(駕洛)의 9촌(村)을 바라보고, 드디어 그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라 하였다. 후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그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9세손인 구해(仇亥; 또는 구차휴(仇次休))에 이르렀으니, 유신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신라인이 스스로 말하기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라고 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였는데, 유신의 비문에도 또한 말하기를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의 자손이라고 한즉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와 유신은 성(姓)이 같은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금관가야 왕실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 조상의 계보를 기술하면서 금관가야 건국 신화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수로가 구봉에 올라 9촌을 바라보며 가야를 건국하였다는 내용은 「가락국기」에 보이는 김수로의 건국 설화와 내용상 일치하지만, 내용이 매우 소략하기 때문에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가락국기」의 내용을 보았는지 여부는 모르겠다. 다만 “수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라는 기술을 보면,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가야에 대한 정보가 매우 부족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가락국기」가 삼국사기 편찬 시에 참조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가야의 건국 신화는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가 기본을 이루고 있어 가장 중요하다 하겠다.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 조 태강 연간(1075~1084)에 금관 지주사인 한 문인(文人)이 지은 가락국(駕洛國)의 역사 기록이다. 이 ‘문인’은 김양일(金良鎰)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가락국에 관련된 다양한 전승 자료를 최대한 수집하였을 것이며, 그 결과 현재 전하는 바와 같이 상당히 풍부한 내용을 갖춘 가락국의 건국 설화가 편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락국기」에 나오는 『개황록(開皇錄)』의 존재는, 아마도 김수로 신화의 채록 시기가 문무왕 대를 전후한 시기임을 알려 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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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가락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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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가락국기」가 『삼국유사』에 인용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가야 건국에 관한 중요한 신화와 관념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내용이 매우 길고 장황하기는 하지만, 「가락국기」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면서 김수로왕 신화를 읽어 보도록 하자.

〔사료 5-1-02〕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의 김수로왕 신화

문종(文宗)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金官) 주지사(知州事)로 있던 문인(文人)이 지은 것이다. 지금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가) ① 천지가 개벽한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고, 또한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干)이 있었다. 이들 추장(酋長)은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백 호로서 7만 5천 명이었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은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②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42년) 임인 3월 계욕일(稧浴日)에 사는 곳의 북쪽 구지(龜旨: 이것은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여러 마리 거북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했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하였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또 말하였다.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서 뛰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이 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 땅에 닿았다. 그 줄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쌓인 금빛 상자가 있었다. 열어 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며 함께 수없이 절하였다. 얼마 뒤에 그 알을 다시 싸서 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두고 그 무리들은 각기 흩어졌다.

그 후 12시간이 지난 이튿날 아침에 무리들이 다시 모여서 그 상자를 열었다. 여섯 알은 모두 여섯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훤칠하였다. 이내 평상 위에 앉으니 여러 사람들이 축하하며 절하고 정성을 다해 공경하였다.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니 키는 9척으로, 곧 은나라 천을(天乙; 은나라 탕왕)과 같았고, 얼굴은 용을 닮아 한(漢)나라 고조와 같았으며, 눈썹이 8채로 요(堯)임금과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곧 우나라 순(舜)임금과 같았다.

③ 그가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 하고, 혹은 수릉(首陵)이라고도 하였다.

또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곧 여섯 가야(伽耶)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가서 각각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바다,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④ 왕은 임시로 대궐을 짓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소박하고 검소하여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았으며, 흙으로 쌓은 계단은 겨우 3척이었다.

즉위 2년 계묘 정월(43년)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도읍을 정하려 한다.”라고 하고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畓坪)으로 나가 사방의 산악을 바라보고 좌우 사람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이 땅은 여뀌 잎처럼 좁고 적지만, 수려하고 기이하여 16나한(羅漢)이 살 만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하나에서 셋을 이루고 셋에서 일곱을 이루니, 일곱 성인이 살 만한 곳으로 이곳이 가장 적합하다. 이곳에 의탁하여 강토를 개척해서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이곳에 1500보 둘레의 성곽과 궁궐, 전각 및 여러 관사, 무기고, 곡식 창고를 지을 터를 마련하였다. 일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와 두루 나라 안의 장정, 인부,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宮闕)과 집들은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때를 기다려 그해 10월에 시작해서 갑진 2월(44년)에야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궐로 들어가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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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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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대성동 고분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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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대성동 고분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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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 신화는 김해 지방에서 하나의 통합된 정치 집단이 등장하여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을 전하는 자료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수로왕 신화는 건국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의 전승 과정에서 여러 전승이 복합되고 변형되었을 것이기에 신화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대체로 9간 무리가 모여 구지봉에 하강한 황금알에서 나온 동자를 추대하여 수로왕으로 모셨다는 줄거리는 가야 초기의 역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대략 기본 줄거리를 따라가면서 추정이 가능한 역사적 해석을 정리해 보도록 하자.

(가)는 수로왕 신화의 핵심으로서 수로가 천강하여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이 부분은 내용상 또한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신화의 내용을 따라가면서 몇몇 중요한 부분을 짚어 보도록 하자.

▣ 9간의 시대

(가)-① 부분은 수로가 등장하기 이전 단계, 즉 9간이 다스리던 시기를 보여 준다. 수로왕 이전에 등장하는 ‘9간’의 존재는 신라 박혁거세 신화의 ‘6촌장’의 존재와 서로 비교된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바 있는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에 인용되어 있는 김유신 비문(金庾信碑文)에 김유신의 출자를 설명하는 가운에 “수로왕이 구지봉에 올라 가락 9촌(駕洛九村)을 바라보았다.”라고 하였다. 가락 9촌의 존재는 곧 「가락국기」의 9간과 서로 통하는 내용이다. 9간은 김해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었던 소단위 세력 집단들인 9촌의 대표자들로, 그들은 수로의 강림 이전부터 존재하던 재지 세력일 것이다. 이들 9간이 통치하던 사회를 국가 형성 단계로 볼 때에는 이른바 군장 사회(Chiefdom)의 단계로 비정하기도 한다. 수로왕 신화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이들은 수로가 내려오기 이전부터 있었던 토착 세력인 것이다.

그런데 9간이 다스리던 시절의 백성 수에 대하여 ‘1백 호 7만 5천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1백 호인데 주민 수가 7만 5천 명이라고 한다면 1호에 750명이 됨으로써 비정상적인 가호 규모가 된다. 그렇다고 주민의 수를 1백 호에 맞추어 줄이면 750명 정도가 적절한데 이 또한 국가를 세울 수 있는 인적 기반이 못 된다. 따라서 1백 호의 ‘백(百)’ 자는 ‘만(萬)’ 자의 착오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어느 정도 호구 수와 인구 수가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이 시기에 7만 5천 명이라는 주민의 수를 인정할 수 있을까. 사실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에 수만 명의 주민들이 함께 하나의 사회를 이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3세기의 사정을 전하는 중국의 역사책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에는 변한 지역을 설명하면서 “큰 나라는 4, 5천 가이며 작은 나라는 6, 7백 가이다. 모두 4, 5만 호이다(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라는 기사가 있다. 이를 근거로 추정하면 김해 지역 주민들의 수는 대략 4, 5천 가(家)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위 「가락국기」의 내용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는 가야가 소국 단계일 때의 주민 수라기보다는, 가야 연맹체의 중심 국가로 성장하여 보다 큰 세력을 떨치던 시기의 주민 규모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같은 『삼국지』 마한 조에는 “큰 나라[大國]는 1만여 가(家)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마한의 중심 국가인 백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관가야가 전성기일 때에는 그러한 대국의 규모를 넘어설 가능성도 있다.

▣ 수로 신화의 천강(天降)과 난생(卵生)의 모티브

(가)-② 부분은 9간 등이 구지봉에 모여 ‘구지가’를 부르면서 공동 제의를 벌이는 모습인데, 단지 하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했다기보다는 그 이전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제의 모습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 형성 이전의 사회 풍속과 신앙 체계가 이러한 모습에 반영된 것이다. 여기서 거북에 대한 신앙과 제례를 통해 토착 세력이 지모 신(地母神)에 대한 의례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다시 천신(天神)과 연관된 내용도 갖고 있다.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았다. 그 줄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쌓인 금빛 상자가 있었다. 열어 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즉 수로왕의 출현 장면 묘사는 고조선의 단군 신화 및 고구려의 주몽 신화와 같은 계통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주인공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강(天降) 신화적 요소와 알로 태어나는 난생(卵生)적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이는 가야국 지배 계층의 관념이나 세계관 등이 한반도 북쪽의 주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앞서 신라 박혁거세 신화의 내용 중에 나타나듯이 고조선 유민들과 부여계 주민들의 남하 결과,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정치적 격동이 일어나는 상황을 고려하면, 가야국 지배 계층의 출신도 고조선 등과 연관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9간도 본래는 이주민의 성격을 갖고 있었을 테지만, 수로왕 등장 무렵에는 이미 토착 세력으로서의 성격이 더 두드러졌을 것이다. 그리고 9간이 토착 세력이라고 한다면 수로왕 등은 9간보다 늦은 시기에 정착한 이주민 성격의 세력 집단으로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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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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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봉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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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봉 지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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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로의 가락국 건국

(가)-③은 수로왕이 즉위하는 과정이다. 본격적인 개국 신화의 핵심적 요소이다. 그런데 수로가 왕이 되는 과정은 9간이 합의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로서 신성성을 갖는 수로를 합의하여 왕으로 추대하는 형태였다. 즉 토착 세력들의 합의에 의하여 왕권이 창출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보다 구체적인 역사상을 상정해 본다면, 김해 지역에는 이미 소단위 정치 집단으로서 9촌이 있었고, 이들 9촌이 연합하여 일종의 연맹체적인 정치 단위를 형성하고 있었다. 즉 9촌의 9간이 공동으로 제의를 열거나 수로의 추대를 합의하는 과정은, 이미 그 이전부터 9간의 연맹체적인 기구가 있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9간의 연맹체 단계만 하더라도 아직 ‘왕’의 존재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수로의 등장으로 비로소 9간의 합의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으니, 이때 비로소 9간과 수로 집단이 이전보다 더 강력하게 결합된 ‘가락국’이라는 소국이 출현하게 되었음을 반영한다.

김수로 신화가 건국 신화의 요소를 갖추었음은 곧 ‘가락국’이라는 국명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락국이라는 국명은 여러 가지 표현으로 나타난다. 중국 사료(『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 등)에서는 '구야국(狗邪國)'이라 하였고 일본 사료(『일본서기(日本書記)』와 『고사기(古事記)』 등)에서는 가야국(加羅國)으로 등장한다.

▣ 6가야는 실재하였을까

그런데 이 수로왕 신화에는 6가야의 존재가 등장한다. 바로 하늘에서 구지봉으로 6개의 알이 한꺼번에 내려왔다는 기록과, 이들 6개의 알에서 태어난 인물들이 모두 6가야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6개 알과 관련된 내용은 가락국 건국 신화의 본래 모습과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지리지 및 『세종실록』 지리지 김해 조에 실린 수로왕 신화에는 황금알 한 개로 되어 있다. 오히려 이 부분이 본래의 설화적인 원형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바, 6가야 연맹설의 실체는 이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6가야의 이름이 실린 자료는 『삼국유사』 5가야 조 기사가 유일하다. 6가야의 이름은 그 후 조선 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읍지 등의 역사기록에 끊임없이 사용되었다. 6가야의 등장은 수로 신화의 6개 알 이야기가 주된 논거를 이룬다.

6가야 중 금관가야는 지금의 김해시, 아라가야는 함안군 가야읍, 고령가야는 상주시 함창읍, 대가야는 고령군 고령읍, 성산가야는 성주군 성주읍, 소가야는 고성군 고성읍을 가리킨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인용된 『본조사략(本朝史略)』에 따르면 태조 왕건이 940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쳐 금관가야, 고령가야, 비화가야을 넣고 나머지 아라가야, 성산가야는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새로 5가야가 된 비화가야는 지금의 창녕을 가리킨다. 그런데 기존 6가야의 이름을 바꾼다는 것 자체가 성립되기 힘들다. 따라서 6가야의 이름 또한 의구심을 떨쳐 내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김수로 신화에서 6개의 알에서 태어난 아이가 수로왕과 더불어 5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했는데, 김수로는 김해 지방에서 알이 천강해서 태어나 추대를 받을 수 있었지만, 수로왕과 함께 김해에서 태어난 다른 다섯 사람은 무엇을 근거로 다른 곳에 가서 왕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설화에서는 전혀 설명이 없다. 이 또한 의심스러운 대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가락국의 김수로 건국 신화에 덧붙여진 6란 설화나 5가야 시조 설화는 가야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신라 말 고려 초의 혼란기에 생겨난 이야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당시에는 반(反)신라적인 관념에 의해 옛 고구려와 백제 땅에서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나타났듯이 옛 가야 지역에서도 후가야를 표방하는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 호족은 과거 가야 시대의 전설을 되살려 스스로 가야 소국의 왕손임을 인정받고자 고구려 왕건에게 요청하였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6가야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다시 지방 제도의 개편에 따라 고려 왕조는 이 지역 호족들의 세력 관계를 조정하여 5가야로 재정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금관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소가야, 성산가야, 비화가야 등의 이름은 옛 가야의 국가 이름이 아니라, 신라 말 고려 초의 명칭으로 봄이 타당하겠다. 「가락국기」에서는 수로왕의 금관가야를 제외한 나머지를 5가야라 하였고, 『본조사략』에서는 대가야를 제외한 나머지를 5가야라 하고 있다

따라서 이 5가야나 6가야는 실재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신라 말 고려 초에 등장한 허구의 전설이었다. 따라서 6가야의 개념은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6가야라는 명칭을 통하여 고려 초기까지도 과거 가야 지역의 주민들은 스스로를 가야국의 후손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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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傳) 고령 가야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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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락국 태조왕 탄강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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