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과 좌절
  • 2. 대한제국의 수립과정
  • 1) 대한제국의 모색
  • 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1895년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 고종은 달력을 개정하여 태양력으로 바꿀 것을 선포했다. 2일 후인 음력 11월 17일은 양력으로 1896년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었다. 새 연호는 이미 건양(建陽)으로 정해졌다. 이제 밝은 해를 맞이할 것을 희망해야 하나, 새해 벽두부터 단발령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몰아쳤다.

당시 고종과 세자는 친일 세력의 강요에 못 이겨 사회 개혁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도록 하였다. 조선에서 오랫동안 전통으로 굳어진 머리를 땋는 풍습을 바꿔 머리카락을 깎도록 모든 남자들에게 강제하였다.

그러나 그날 하루 종일 바람이 불고 흙이 섞인 비가 내려 하늘이 어두웠다. 통곡 소리가 서울 안에 가득 찼다. 일반 백성들 중에는 억지로 머리카락을 잘리고는 울분과 원망을 참지 못해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까지 있었다. 단발 강제 시행에 따른 크고 작은 저항은 각처에서 일어났다.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붙인 새해의 개시가 이틀 앞으로 다가온 조선 전역에는 을씨년스러운 겨울 북풍이 휘몰아칠 기세였다. 이 사건의 발단은 몇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5년 3월 23일(양력 4월 17일) 청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청나라와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곧 삼국 간섭으로 인해 일본은 조선 내정에 더 이상 간섭하기 어려웠다. 이때 조선 정부는 친러정책으로 전환하려고 하였다. 이에 다급해진 일본은 친러 정책의 핵심 인물이라고 지목한 명성황후 민씨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에 일본 수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직업군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주한 일본 공사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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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낭인들
을미사변 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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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미우라 주한 일본 공사는 일단의 일본인과 일본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살해하였다. 이 사건을 ‘을미사변’이라 한다. 친러파의 수장인 명성황후가 제거되자 일본은 곧바로 친일 내각인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다. 김홍집 내각은 을미사변에 대한 처리에서 일본인의 참여를 부정하였고 도리어 명성황후의 잘못을 열거하면서 폐후(廢后)한다는 조칙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베베르(Weber, Karl Ivanovich) 등 외국사절들은 을미사변을 일본인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미우라 주한 일본 공사를 추궁하였다. 일본 정부는 조사단을 급파하여 을미사변이 일본 정부와는 관계없이 미우라 주한 일본 공사가 독단적으로 행한 것으로 돌렸다. 이후 미우라 등 을미사변 관련자 48명은 히로시마(廣島) 재판소에 회부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면소되어 석방되었다.

이렇게 을미사변을 통해 재등장한 친일 내각은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단발령 등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갑오개혁 당시 유생들이 크게 반발했던 변복령보다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국모(國母)의 시해 후 반포된 단발령 때문에 유생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이들은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효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유교 사상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국수보복(國讐報復)’을 명분으로 한 항일 의병이 전국 여러 지역에서 봉기하기 시작하였다.

〔사료 2-1-01〕이도재의 연호 제정과 단발령에 반대하는 상소

“어제 갑자기 내각이 두 장의 글을 제출하면서 신(臣)에게 연서(聯署)를 하라고 하였는데, 하나는 연호(年號)를 정하는 문제이고 하나는 머리를 깎는 문제였습니다. 신이 갑자기 당한 일이라 깜짝 놀라면서 붓을 대지 못하였는데, 구차스럽게 의견을 달리 하자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임금을 높이는 것은 형식만 일삼지 말고 실속이 있기를 일삼아야 하며, 백성을 교화하는 것은 그 외형적으로 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교화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란이 빈번하고 나라의 형편이 위태로우며 백성이 쪼들리고 강한 이웃 나라가 으르렁대며 엿보는 형편에서 설사 위아래가 한마음으로 서둘러 실속 있는 일에 힘쓰더라도 오히려 수습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건원(建元)하는 것과 같은 일은 허명(虛名)이나 차리는 말단적인 일입니다. 그러므로 몇 년을 두고 나라가 부유해지고 군사가 강해지기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중략)

게다가 단발(斷髮)에 대한 논의는 전혀 옳지 않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우리나라는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래로 머리를 뒤로 묶어 길게 땋는 풍속이 점차 높게 상투를 트는 풍속으로 변하였으며 머리칼을 아끼는 것을 큰일로 여겼습니다. 이제 만약 하루아침에 깎아버린다면 4천 년 동안 굳어진 풍습은 변화시키기 어렵고 많은 백성들의 흉흉해하는 심정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어찌 격렬한 변란의 계기가 될 것을 모르겠습니까? 옛날에 청(淸) 나라 사람이 연경(燕京)에 들어가 무력으로 관면(冠冕)을 찢어버렸더니 쌓인 울분이 300년 간 풀리지 않아 머리를 기른 비적(匪賊)이 한번 소리를 지르자 사방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나서는 통에 수십 년간 군사를 동원해서야 겨우 평정하였으니, 이는 충분한 교훈이 될 만합니다. 정말 나라에 이롭다면 신은 비록 목숨이 다하더라도 결코 사양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감히 한 줌의 짧은 머리칼을 아끼려고 나라의 계책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단지 여러 차례 생각해 보아도 그것이 이로운 것은 보이지 않고 해로운 점만 당장 보이므로, 감히 마음을 속이고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 이미 내린 명을 빨리 취소하시고, 신의 직임을 해임하여 시골로 돌아갈 수 있게 함으로써, 사리에 어둡고 논의를 달리하는 자들의 경계로 삼으소서.”

(출전 : 『고종실록』1895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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