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과 좌절
  • 2. 대한제국의 수립과정
  • 1) 대한제국의 모색
  • 라. 구본신참과 교전소의 설치

한편 고종은 9월 24일 의정부를 개편하면서 향후 개혁의 원칙을 새롭게 천명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제도를 새로 정하는 것은 바로 옛 법을 그대로 따르면서 새 규정을 참고하는 것으로, 무릇 백성들과 나라에 편리한 것이라면 참작하여 절충하되 되도록 꼭 실행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옛 것을 기본으로 하여 신식을 참고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을 세웠다. 1) 당시 갑오개혁 이후 법과 규율이 문란해지고 옛 법은 폐지되고 새 법은 아직 세워지지 못한 상태였다. 마치 법이 없는 나라처럼 되었다고 한다.

〔대한제국 역사 칼럼 01〕대한제국의 이념으로 구본신참(舊本新參)이란 무엇인가?

구본신참’은 구래의 제도, 이념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서양식 제도를 참고하여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구본을 종전의 낡은 체제로 해석하고 신참을 새로운 신식 제도 개혁으로 간주하여, 용어를 도치시켜 실제로는 ‘신본구참(新本舊參)’이었다는 작명도 있었다. 신참은 서양식 혹은 일본식 제도로서 갑오개혁에서 추진된 것이었고, 구본은 전통적인 조선 왕조의 통치방식인 유교적인 이념에 기반하여 덕망가적인 지배 등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해석들은 원래 용어인 ‘구본신참’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런데 구본이라는 것은 대한제국의 여러 제도와 정책으로 보아 갑오개혁 이전의 구제도로 복귀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개항 이후 서양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복고적 혹은 복구적인 체제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신참으로 해석되는 부분도 새로운 서양식 제도로 대체되거나 이식되는 차원으로 이해하기는 곤란하다. 대한제국을 만들어가는 고종 황제와 집권 세력은 모두 동일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구본(舊本)’을 근거로 하되 이를 근대적으로 탈바꿈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전통적인 요소와 토대를 기본으로 하여, 다른 신식으로 대체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본(舊本)을 상향시켜 신참(新參)으로 전환”하는 방식이었다. 양전(量田) 원칙을 예로 들면 토지 측량의 단위를 예로부터 써왔던 결부제(結負制)로 채택하였다. 또 1902년 도량형 규칙을 발포하면서 양전척의 기준을 주척 5척으로 삼았는데, 길이의 크기를 종전과 달리 미터법 1m에 일치시켰다. 이렇게 전통적인 측량기준을 근대적인 국제기준으로 변경시키고 있었다(『관보』「도량형규칙」1901년 10월 21일). 이와 같이 대한제국의 모든 제도 개혁과 정책은 ‘구본’을 기본으로 해서 이를 그 자체로 ‘근대적’인 것으로 바꾸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옛 것을 기본으로 한다면 갑오개혁 이전 구질서로 회귀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방향은 무엇일까. 고종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도록 고안된 의정부 제도를 만들고 나서도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잠시 머물려고 했던 고종의 의도와 달리 아관파천은 1년 이상 계속되었다(1896. 2.11~1897.2.25). 1897년 2월 말이 돼서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이웃한 경운궁 수리를 마치고 환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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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새로이 국가의 기본 제도와 법률 개정에 모색할 때였다. 3월 16일 고종은 신구 법전의 절충과 법규 작성을 위한 기구를 설립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3월 23일 교전소(校典所)가 설치되었다.

〔사료 2-1-08〕고종, 교전소 설치를 명령하다.

“오늘 정부 신하들을 불러들여 이미 대면하여 설명한 한 바가 있다. 모든 정무에서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것은, 관제가 혹 많이 변경되었거나 규칙 가운데 아직도 불편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군주와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만일 정신을 가다듬어 잘 다스리려 노력했다면, 나라의 위급한 형편과 백성들의 황급한 사정이 어떻게 이처럼 심할 수 있겠는가. 지금이 바로 경장(更張)할 한 번의 기회이다. 지금부터 별도로 하나의 기관을 설치하여 신구의 전식(典式)과 제반 법규를 절충한 다음 모아서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 삼가 준수할 바탕을 삼도록 하고, 의논하여 정할 인원은 별도로 선출하여 들이라.”

(출전 : 『비서원일기』1897년 3월 16일(음력 2월 14일))

〔사료 2-1-09〕남정철, 교전소 설치 요청서

의정부 참정 내부대신 남정철이 아뢰기를, “이번달 16일 삼가 받은 조칙에서 ‘지금부터 하나의 기구를 설치하여 신구 전식(典式)과 제반 법규를 절충하여 모아서 하나의 법전으로 만들고 인원을 의논하여 선정하여 들이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중추원에 처소를 설치하여 교전소라 칭하고 위원을 뽑아 들이고, 각 부(府)와 부(部), 원(院)의 규칙과 제도는 각기 해당 부서로 하여금 교전소에 보내면, 이를 헤아려 모아서 법률을 만드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

(출전 : 『고종실록』 1897년 3월 23일)

1897년 4월 12일에 열린 교전소 1차 회의에 참석한 면모를 보면, 대신으로 박정양, 윤용선, 이완용이 있었고, 고문관으로 르장드르(李善得), 그레이트하우스(具禮), 브라운(柏卓安) 등 서양인 고문관 및 서재필이 참석하였다. 주요 대신들과 외국인 고문관들이 합석한 고위 회의였다. 관제사무위원은 윤용선, 고영희, 이상재, 이채연, 브라운 등이었고, 형률조사위원은 박정양, 김가진, 성기운, 권형진, 그레이트하우스 등이었다.

〔사료 2-2-10〕교전소 위원 임명

직책 위원 직책⋅성명 임명일
총재대원
(總裁大員)
의정부 의정 김병시(金炳始) 궁내부 특진관 조병세(趙秉世), 정범조(鄭範朝) 1897년
3월 23일
부총재대원
(副總裁大員)
의정부 찬정 김영수(金永壽), 박정양(朴定陽), 윤용선(尹容善),
의정부찬정⋅외부대신 이완용(李完用)
위원
(委員)
고문관 르장드르(李善得), 그레이트하우스(具禮), 브라운(柏卓安),
서재필(徐載弼)
지사원
(知事員)
중추원 의관 김가진(金嘉鎭). 법부 협판 권재형(權在衡). 외부 협판 고영희(高永喜).
한성부 판윤 이채연(李采淵). 회계원 경 성기운(成岐運).
의정부 총무국장 이상재(李商在). 중추원 의관 윤치호(尹致昊)
4월 15일
기사원
(記事員)
내부 지방국장 김중환(金重煥), 학부 학무국장 한창수(韓昌洙).
탁지부 재무관 김규희(金奎熙), 농상공부 참서관 서정직(徐廷稷).
외부 번역관 박용규(朴鎔奎). 6품 권유섭(權柔燮). 9품 고희경(高羲敬)
부총재대원 규장각 학사 민영준(閔泳駿, 4.26 임, 4.29 면), 김영수(金永壽, 4.23, 면),
윤용선(尹容善, 4.30 면)
 
지사원 김가진(金嘉鎭, 4.22), 성기운(成岐運, 4.27, 면), 권재형(權在衡, 4.29 면)  

(출전 : 『고종실록』 1897년 3월 23일, 4월 15일 ;
『관보』 1897년 4월 17일, 24일, 26일, 28일, 30일, 5월 1일 ;
『비서원일기』 1897년 2월 21일, 3월 14일 ;
『박정양전서』 3책, 권12 「종환일기(從宦日記)」 ;
독립신문』 1897년 3월 29일)

[사료 설명 : 교전소와 비슷하게 법률을 정비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던 기구로 이미 1895년 6월에 설립된 법률기초위원회가 있었다. 그러나 이 기구는 어디까지나 법률의 정비에 그치는 것이었지 국가 체제 전반을 규정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기능은 없었다. 1896년 3월에 설치된 교전소는 자문기관인 중추원 산하에 두고 주요 정부 부서의 관료들을 위원으로 배치하였다.]

교전소 회의규칙에 따르면 조선어와 영어로 서로 번역하였으며, 주요 법률과 관청의 제도를 개정할 때는 낭송과 토론에 이어 결정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의사결정 권한은 행정실무요원을 제외한 위원급 이상으로 한정하였고 최종적인 결론은 다수결의 원칙에 따르는 것으로 하였다.

비교적 순조롭게 교전소의 기구 제도를 토의⋅결정해오던 교전소회의는 제5차 회의에서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당시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독립 협회 운동을 했던 개혁론자들이 고종의 권력 남용을 제한하기 위해서 국가권력에서 왕권을 기능적으로 분리하고 근대 국가의 권력 분립 제도를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고종과 측근 세력들은 새로운 의정부관제를 중심으로 간관(諫官)제도 정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권력구조 개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당시 고종의 의향을 반영한 르장드르와 브라운 등 외국인 고문관들은 서재필 등 개혁론자들의 견해에 크게 반대하였다. 결국 교전소는 국정 제도 개혁을 둘러싸고 양단 간의 갈등이 심각해져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사료 2-1-11〕교전소의 정회 사태

“교전소에서는 벌써 열흘 동안을 회의도 못하였으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위원들이 모두 사직을 한 이가 많이 있고 또 정부에서든지 인민들이 교전소를 지탱하여 무슨 일이 성취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모양 같으므로, 다 흥을 잃고 가는 사람도 많고 있는 사람 중에도 오지 아니한 이가 많이 있으니, 아마 교전소는 자연히 속병이 들어 쉽게 죽을 모양이더라”

(출전 : 『독립신문』, 1897년 5월 11일)

1)“제도를 새로 정하는 것은 바로 옛 법을 그대로 따르면서 새 규정을 참고하는 것으로서 무릇 백성들과 나라에 편리한 것이라면 참작하고 절충하여 되도록 꼭 실행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自今內閣廢止, 還稱議政府. 新定典則, 是乃率舊章而參新規, 凡係民國便宜者, 斟酌折衷, 務在必行)” (『고종실록』 1896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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