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과 좌절
  • 2. 대한제국의 수립과정
  • 2) 황제 즉위 상소와 황제권의 위상
  • 가. 황제 즉위 상소와 제국의 명분

국왕 고종은 교전소를 통한 개혁을 일단 접고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여러 차례 갑오개혁 연루 인사들에 대한 탄핵 상소가 있었으나 이를 물리치는 한편, 왕후(명성황후) 장례 문제 등이 불거져 나오는 상황을 이용했다. 마침내 1897년 5월 1일부터 고종을 황제로 올리자는 존칭제호(尊稱帝號)에 관한 상소가 시작되었다. 전(前) 승지 이최응의 상소를 필두로 하여 유학자, 의사, 전임 및 현임 관료, 시민 등 다양한 계층의 상소가 이어졌다.

초기에 올려진 상소는 대개 전통적인 유교 사상에 바탕을 두어, 중국 황제의 제도와 같이 이제 조서∙칙서를 쓰기 때문에 이에 걸맞는 존칭으로 불러야 하며, 또 자주 독립의 나라로서 황제를 마음대로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최익현유인석과 같은 보수적인 유생들은 존왕양이의 관념에 의거하여 비록 중화의 문명을 이은 우리지만 이제 와서 의관∙문물 제도를 바꾸는 것은 불가하다며 소중화의 나라에서 황제 즉위를 한다는 것은 망령된 행위라고 반대하였다.

이때 전통적인 관념과 서구의 국제관계 양쪽을 고려하면서 새로운 논리로 황제 즉위의 타당성을 주장한 논자가 나타났다. 개명한 유교 지식인인 정교는 황제를 부를 수 있는 근거를 전통적인 유교 사상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서구의 만국공법에서 황제로 부르는 것이 지역의 넓고 좁음이나 복속된 나라를 두는 것과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또한 청과 일본에는 모두 황제 존호를 쓰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자주국으로서 황제로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웃한 청과 일본, 그리고 서양과 대등관계를 만들기 위해 황제로 즉위해야 한다는 주장은 점차 여론화하기 시작했다.

〔사료 2-2-01〕정교, 황제 칭호에 관한 상소문

“삼가 생각하건대, 신(臣)은 본래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에 넘치게 벼슬길에 올라 외람되게 지방관의 자리를 떠맡았습니다만, 보답할 방법을 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또한 임금님의 거룩한 은혜로 길러지는 한 존재입니다. (중략)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사람이 천하다고 저의 말까지 버리지는 마옵소서(중략)

생각하건대 우리 동방에 단군 성인께서 처음 나오셔서 하늘을 계승하여 임금의 자리에 올랐지만, 역사가가 ‘군(君)’이라는 칭호를 쓴 것은 곧 상고시대의 질박한 풍속으로 중국 오제(五帝) 중 하나인 고양(高陽)과 고신(高辛)을 그 일어선 지명으로 이름을 붙인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기자 성인께서 유경(柳京, 평양의 다른 이름)에 도읍을 세웠을 때 ‘왕’이라는 존귀한 칭호를 쓰셨으니 자자손손 계승하였습니다. (중략) 신라와 고려가 옛 제도를 따라 행하여, 그대로 ‘왕’의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중략) 고려의 태조도 창업을 하면서 이내 ‘천수(天授)’라는 기원을 세웠고, 광종도 ‘광덕(光德)’으로 기원(紀元)을 바꾸었습니다. 이는 모두 황제의 예를 따른 것이지만, 때의 마땅함에 응하여 칭호를 고친 예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 우리 조선은 대대로 여러 임금이 계승하면서 정치 제도를 모두 펼쳤지만, 오직 미처 칭호를 바꿀 겨를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덕은 숭상하되 허식은 숭상하지 않으며, 실질은 채용하되 명분은 채용하지 않는 뜻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오백년의 아름다운 운세에 응하시어 삼천 리의 강토를 다스리시며 자주독립의 기틀을 세우셨으니, 덕은 명분을 바르게 하기에 충분하여 오대륙과 대등한 권한을 잡으셨습니다. 이때가 칭호를 바꿀 만한 시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황제와 군주의 지위가 대등하여 그 존귀함이 거의 같으니 반드시 칭호를 바꿀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동서양의 나라를 가진 자의 위호(位號)와 관습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저 서유럽은 쓰는 문자가 다르기 때문에 그 황제와 군주의 칭호를 모두 한자의 의미로 견주어 번역하여 전했기 때문에, 뜻은 비록 같지만 음이 서로 다른 것입니다. 또한 어찌 꼭 우리 동아시아의 아름다운 칭호를 저 서유럽의 관습을 끌어들이겠습니까? (중략)

어떤 사람은 중국을 통일한 후라야 헤아려 볼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는 변변치 못한 선비의 물정 모르는 논리입니다. 한나라의 소열제는 성도(成都)처럼 구석진 곳에서 편안하였으며, 청나라의 태조는 만주에서 황제를 칭하였고, 터기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땅을 나누어 차지했으며, 러시아는 유럽의 서쪽 지방에서 위세를 가지고 다른 나라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이것이 모두 변두리 한 구석이라 하여 비난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오직 우리 동방이 이에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위엄을 낼 수 있는 곳이니, 하늘의 뜻이 이곳에 있음을 오늘날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중략)

근래에 거리에 떠도는 소문에는 황제로 높여 받든 이후에 외국에서 혹시 인정하지 않을까 의심하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세계에 통용되는 공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만국공법』에 ‘각국의 자주란 제나라의 의사에 따라 스스로 칭호를 높여 세울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옛날에 러시아 표트르 1세가 처음으로 황제라 칭하니, 프러시아와 네덜란드가 먼저 인정하였고 다른 나라도 나중에 인정했습니다. 그 후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황제를 칭하였으나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자주의 권리로 자기 뜻에 따라 칭호를 세웠지만, 다른 나라가 따라서 인정해 주었으니 진실로 공법을 따른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자주의 권리로 또한 자기 뜻에 따라 행하시어, 각국과 조약을 맺어 평화와 우호의 교분을 영원토록 두터이 하신다면 누가 앞뒤로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중략)

또 속히 위호를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멀리 있는 서양은 도리어 논할 겨를이 없습니다. 동아시아의 큰 나라인 청나라와 일본도 모두 이러한 칭호가 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이 지금껏 이를 거행하지 않는 것은 크게는 동양의 형세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정성과 힘을 다하여, 오직 황제의 자리에 나아가시도록 권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를 알아서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온갖 법도가 개혁되는 때에 온 천하로 하여금 눈을 씻고 면목이 일신되는 정치를 보게 하니, 지금이 바로 덕을 본받고, 때의 마땅함에 응하는 시기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속히 담당 관원에게 의식 절차를 조사해 찾도록 명령하시고 황제에 즉위하셔서, 하늘의 마음에 부합하시고 사람들의 바램에 따름으로써 자손에 전하여 억만 년의 한없는 기틀을 영원히 정하십시오.”

(출전 : 『대한계년사』권2, 1897년 10월)

[사료 설명 : 정교는 이 상소를 비서원에 올리려 했는데, 다른 사람들의 시샘을 받아 문표(門標)를 얻지 못하여 임금에게 전해지지 못했다고 주석을 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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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9월 농상공부 협판 권재형은 서양의 국제법전인 『공법회통』제84~86장의 구절을 인용하여 황제즉위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85장에는 ”관할 지역이 넓은 경우에는 황제로 불러도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분수에 넘칠 것 같다”라고 되어 있지만 이는 단정적인 표현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84장에는 있는 러시아 황제의 존칭 사례를 들어 처음에는 다른 나라가 인정하지 않았지만 결국 나중에 인정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실제 만국공법의 논리는 유럽 이외의 약소국들에 대해 황제로 자칭하는 것이 지나치다는 의미였지만, 권재형은 이를 자주국인 이상 황제를 칭하여도 될 수 있다는 상황논리로 바꾸어버린 것이어서 그야말로 견강부회였다. 그렇지만 그의 상소고종과 정부 대신들에게 가장 적합한 논리로 채택되었다.

〔사료 2-2-02〕농상공부 협판 권재형(權在衡), 황제의 존호에 대한 상소문

“신이 전날 관리들과 유생들이 올린 상소의 원본을 보니 칭호를 더 올리자고 한 것이 있었습니다. 신은 거듭 감탄하면서 선견지명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생각하여 보건대 ‘황(皇)’, ‘제(帝)’, ‘왕(王)’이라고 하는 것이 비록 글자는 다르지만, 한 나라를 주관하고 한 나라가 독립하여 외국에 의존하지 않으며 기준을 세우고 백성들에게 표준이 되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때문에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삼왕(요, 순, 우)보다 더 높이지 않았고 삼왕이 자처하는 것도 황제보다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후대에 ‘황’의 덕(德)과 ‘제’의 공(功)을 합쳐서 황제의 호칭으로 썼는데 한나라, 진나라,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에서 그대로 썼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오늘날 임금들의 가장 높은 존호는 오직 ‘황제’라는 것뿐입니다. (중략)

대체로 자식으로서 부모를 공경하고 신하로서 임금을 높이는 것은 사람의 천성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에 폐하의 신민으로서 누군들 춤추며 기뻐하면서 우리 폐하에게 빛나는 극존(極尊)의 칭호를 올리려 하지 않겠습니까? 폐하가 사양하여 즉시 받아들이지 않지만 신은 이 문제를 조금도 늦출 수 없다고 여깁니다. 만약 “왕을 황제로 올리는 것이 공법상 어렵다”고 하신다면 신은 만국공법에 근거하여 조목조목 명백히 밝히려고 합니다.

신은 예전에 정위량(丁韙良)이 번역한 『공법회통』을 읽었습니다. 그 제86장에는 ”임금이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가져야만 제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들과 나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자주의 왕국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그런데 자주의 왕국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낡은 견해를 미련스럽게 고집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갑오경장 이후로 독립하였다는 명색은 있으나 독립의 실상은 없고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아서 백성들의 의혹이 마음 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중략)

또한 제85장에는 ”관할하는 지역이 한 나라나 본국에만 그치지 않고 지역이 넓은 경우에는 황제로 불러도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분수에 넘치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를 통하여 황제의 칭호란 원래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러 나라를 겸하여 관할하고 있는 사실로 말하면 영국만한 나라가 없고 영토가 넓은 것으로 말하면 러시아만한 나라가 없는데 이런 나라들을 논하면서도 오히려 황제라고 부르는 것이 ”혹시 가능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혹시’라고 한 것은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어서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분수에 넘치는 것 같다”고 하였는데 ‘같다’라는 것 역시 단정하지 않은 말입니다. 주거나 빼앗는 경우에 모두 정해졌다는 말이 없으니 불러도 좋고 부르지 않아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터키가 황제라고 부르는 것은 영토가 넓어서가 아니며 일본이 황제라고 부르는 것은 원래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을 병합하기 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될 수 있다는 것과 될 수 없다는 것을 단정하지 않은 명백한 증거입니다.

또한 그 제84장에는 ”여러 나라들이 일률적으로 존칭을 쓸 수 없으며 명분과 실제가 부합되어야 어울릴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는 ”140년 전 러시아의 임금이 황제라고 칭호를 고쳤는데 처음에는 각 나라에서 좋아하지 않았으나 20여 년이 지나서 인정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것으로 미루어서 보건대 각 나라가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 하는 것도 따질 것이 못되며 오직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신은 이 몇 장 외에 따로 어떤 공법(公法)이 있어서 이와 다른지는 모르겠습니다. (중략) 오래된 나라에서 새로운 천명(天命)을 받아 명분과 실제가 서로 부합되게 한다면 선조의 공덕을 빛내고 후손에게 좋은 덕화를 남겨줄 수 있으며 또 먼 나라와 가까운 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전 : 『고종실록』 1897년 9월 25일)

〔사료 2-2-03〕의정부 의정 심순택, 특진관 조병세 등의 상소

“(전략) 아! 우리나라가 세워진 지 500년 동안 훌륭한 임금들이 대를 이어오면서 공적을 거듭 빛내고 덕화를 거듭 폈는데, 예악, 전장, 의관 제도는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황제들의 제도에서 가감하고 한결같이 명나라 시대를 표준으로 삼았으니, 빛나는 문화와 두터운 예법이 곧바로 하나의 계통에 닿아 있는 것은 오직 우리나라만이 이러합니다. (중략) 지난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어려움을 통해 나라를 굳건히 하였으며 많은 근심 속에서도 폐하의 명철함이 열려 과단성을 크게 발휘한 관계로 여러 가지 법도가 바르게 되었으며 종묘사직이 힘을 입어 안정되어 위기를 극복하고 태산 반석 위에 올려놓았으며, 온 나라가 안정되어 요사한 기운을 없애어 원기가 왕성해진 덕입니다. 거듭 왕업을 넓히고 교화를 융성하게 하여 독립의 기틀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하니, 이것은 하늘이 말없이 도와주어 크나큰 명을 맞이할 기회입니다.

『만국공법』을 살펴보니, 그것에 이르기를 ”각국 자주라는 것은 의사에 따라 스스로 존호를 세우고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추대하게 할 수 있지만, 다른 나라로 하여금 승인하게 할 권한은 없다”고 합니다. 또 그 아래의 글에서는 ”어떤 나라에서 왕을 칭하거나 황제를 칭할 때에는 자기 나라에서 먼저 승인하고 다른 나라는 뒤에 승인한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존호를 정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스스로 세운다”고 하였으며 승인하는 것은 남이 하기 때문에 ”승인하게 할 권한은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요구할 권한이 없다고 해서 자기 스스로 존호를 세울 권리마저 포기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왕을 칭하거나 황제를 칭하는 나라는 다른 나라의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칭호를 높여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나라는 먼저 인정하고 어떤 나라는 나중에 인정하는 예가 있는 까닭입니다. 따라서 이른바 ”먼저 인정한다”고 하는 것은 칭호를 세우는 일보다 먼저 있는 일이 아니니, 다른 나라에서 인정하는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어찌 스스로 칭호를 높여 세우지도 않고 먼저 다른 나라의 인정을 바라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중략)

삼가 바라건대, 빨리 윤허를 내려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전 : 『고종실록』1897년 10월 1일)

〔대한제국 역사 칼럼 02〕고종 황제 즉위 근거가 된 만국공법은 어떤 책인가?

19세기 후반 동아시아 각국은 서양의 근대 국제법을 번역한 『만국공법(萬國公法)』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책은 중국에 파견된 미국 선교사 마틴(W.A.P.Martin, 丁韙良)이 1864년 미국 법학자 휘튼(Henry Wheaton)의 저서(『국제법원리(國際法原理)』,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1936)를 漢譯한 것이다. 이 책에는 국제간의 상호 교섭과 교류에 적용되는 국제법과 주권국가 간의 법적인 평등 원칙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틴은 번역과정에서 중국인에게 서양 국제법 수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기독교적 자연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유교적 색채도 강하게 띠게 하였고, 권리, 주권, 민주 등 근대 서양의 개념을 한자를 차용하여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 초간본 300부가 중국 각 지방 관아에 배포되었으나 처음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서양 열강이 개항장의 증설 등 영향력을 확대하자 서양과 교섭하는 원칙으로 국가 주권의 상호 존중, 평등 외교의 원칙, 국제법 조약의 준수 등의 규정을 준수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울지(T.D. Woolsey)의 『공법편람(公法便覽)』(1877, 번역)과 블룬칠리(J.C. Bluntschli)의 『공법회통(公法會通)』(1880, 번역) 등 다수의 국제법 책이 중국어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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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P. 마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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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도 1876년 조일 수호 조규 체결 이전에 이미 『만국공법』 책을 들여왔다고 한다. 1880년대 초반 구미 열강과 통상 조약을 맺을 때 이 책을 활용하여 청의 부당한 간섭을 배제하고 서양과 직접 통상 조약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80년 후반 영국의 거문도 점령이나 열강과의 개항통상 갈등으로 인하여 약소국인 조선에서는 공법(公法)과 공의(公義)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박영효, 「건백서(建白書)」, 1888). 또 조선 정부는 청일 전쟁 때 국외 중립 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가 주요 전쟁 지역이 되었고, 미국을 비롯한 다른 열강도 국제적인 조정을 하지 않았던 것에 크게 실망하였다. 그렇지만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는 고종의 황제 존칭을 주장하는 근거로 『공법회통』의 관련 조항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서양 중심의 근대 국제법 체계인 ‘만국공법’을 그대로 받아들여 종래 중국 중심의 화이질서관과 크게 충돌하였지만, 조약 통상, 국경 문제 등을 해결하는 외교뿐만 아니라 근대 국가의 정치⋅법률 제도 수립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만국공법 내용에는 문명국과 반개화국, 미개국 등 차별적인 질서관을 내포하고 있었고 조약 통상의 준수를 내세워 불평등한 국제질서를 고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황제즉위 상소는 9월과 10월에 14건이나 올려졌다. 공통적으로 중화의 계통을 계승하면서도 서양의 각 나라와 평등하게 왕래하여 각국의 황제와 평등하게 교류하고 있으므로 황제로 칭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사료 2-2-04〕1897년 황제즉위 상소 현황과 논거

구분 날짜 주창자 전통적 논거 만국공법의 논거
5월
1일
전 승지
이최영(李㝡榮) 등
조서, 칙서 사용하나
아직 왕으로 불림.
 
5월
9일
유학
권달섭(權達燮) 등
건양 연호 사용,
자주 독립권
 
5월
16일
의관
임상준(任商準)
삼한 통합 계승  
5월
26일
유학
강무형(姜懋馨)
대군주를 높임  
5월 전 군수
정교(鄭喬)
신라 고려의 개원(改元) 『만국공법』 자주권,
청⋅일 제호(帝號)
9월
25일
농상공부 협판
권재형(權在衡)
  『공법회통』 제86장 자주국,
84장 러시아 황제
9월
26일
외부 협판
유기환(兪起煥)
명의 계통 따라 황제,
독립권 연호 설정 가능
 
9월
26일
충청도 유학
심노문(沈魯文) 등
독립 강조  
9월
28일
전 시독
김두병(金斗秉)
공덕의 존칭  
9월
29일
숭릉령
이건용(李建鎔)
삼한 통합 『만국공법』 독립 자주
9월
29일
봉조하
김재현(金在顯) 등
716명
송⋅명 계통 계승 구라파와 아메리카 여러나라
서로 평등하게 왕래, 공법에 근거
9월
30일
의정부 의정
심순택(沈舜澤) 등
정부대신
요순 이하 계통을
계승
각 나라 황제 칭호와 서로
평등하므로 처음에 황제의
이름이 없었더라도 제국
9월
30일
성균관 유생
이수병(李秀丙) 등
소중화(小華)로서
계통을 계승
 
10월
1일
의정부 의정
심순택(沈舜澤) 등
정부대신
중화 계통 계승 『만국공법』의 자주권 주장,
권재형의 주장을 재론
10월
2일
전 승지
김선주(金善柱)
   
10월
2일
유학
곽선곤(郭善坤)
   
10월
2일
시민 전 지사
정재승(丁載昇)
   
10월
2일
독립신문 논설   실질적인 독립자주권 우선 확보
10월
3일
의정부 의정
심순택(沈舜澤) 등
정부대신
묘제 천자의 의식 『만국공법』의 자주권 주장 재론
10월
10일
6품
편상훈(片相薰)
명의 정통론 계승  

일성록』, 『대한계년사』, 『대례의궤(大禮儀軌)』 상소문 제출 날자

그렇다고 해서 광범한 여론의 지지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당시 독립신문은 황제즉위상소에 대해 “나라가 자주독립하는 데 꼭 대황제가 계셔야 자주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왕국이라도 황국과 같이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지금 조선에 제일 요긴한 일은 자주독립 권리를 남에게 잃지 아니 하여야 할 터인즉, 관민이 대군주 폐하가 황제 되시는 것을 힘쓰는 것도 옳거니와 제일은 자주독립권리를 찾으며 지탱할 도리를 하여야 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1)

1)독립신문』 1897년 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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