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과 좌절
  • 2. 대한제국의 수립과정
  • 2) 황제 즉위 상소와 황제권의 위상
  • 나. 환구단에서 황제에 오르다

1897년 10월 11일 새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했다. 국호를 바꾼 것은 조선이라는 기자의 옛 강토 이름을 쓰는 것이 마땅치 않으며 이제 삼한의 땅을 통합하여 한 개의 왕통을 갖는 나라로 세운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전통과 단절함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고대의 삼한을 통합한 것을 들어 서양 만국공법상 ‘제국’이라는 영토 규정에 걸맞게 해석을 덧붙인 것이었다.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치들이 한결 같은 소리로 일제히 제의하면서 수십 차례나 글을 올렸으며, 정부 대신들이 8차례나 황제로 즉위하라고 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내내 거부하다가 9번째 요청하자, 마지못해 황위에 오른다는 말을 남겼다. 그야말로 짜여진 각본에 의해서였거나 아니면 의례상으로 절차를 다 거치면서 명분을 갖추고 황제에 오르기를 바랬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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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우 조성공사(1899년)
황궁우 조성공사(18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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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과 황궁우 모습(1899년경)
환구단과 황궁우 모습(1899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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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2일 새로 마련된 환구단에서 하늘에 고하는 의식을 행한 후, 고종은 드디어 황제로 올랐다. 고종은 황제에 올랐고, 왕후 민씨는 황후로 책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의정부 의정 심순택을 비롯한 백관들은 처음으로 만세 삼창을 하며 축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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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 전면 사진(1913년경)
환구단 전면 사진(1913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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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 대안문 앞에서 고종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인사들(1897년 10월)
경운궁 대안문 앞에서 고종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인사들(18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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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
환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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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2-2-05〕장례원경, 김규홍(金奎弘), 환구단 조성 상소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사전(祀典)에서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환구단(圜丘壇)의 의제(儀制)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이전에 남쪽 교외에서 단지 풍운뇌우(風雲雷雨)의 신들에게만 제사지냈는데, 단이나 담장이 법도에 맞지 않았으니 밝게 하늘을 섬기는 의식에서 볼 때 실로 마음이 편치 못하고 부끄러웠습니다. 동지절의 제사를 그대로 거행할 수 없으니 앞으로 단을 새로 쌓는 등의 절차에 대해 폐하의 재가를 바랍니다. 호천상제황(昊天上帝皇)과 지기(地祗)의 신위판과 종향하는 일월성신(日月星辰), 풍운뇌우(風雲雷雨), 악진(嶽鎭)⋅해독(海瀆)의 신패(信牌)를 만드는 것과 제사에 쓰는 희생과 제물 등의 제반 의식에 대해서는 역대 전례를 널리 살펴 마땅히 일정한 제도를 정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감히 함부로 할 수 없으므로, 현임과 전임 의정대신과 지방에 있는 유현(儒賢)에게 문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출전 : 『고종실록』 1897년 9월 21일)

〔사료 2-2-06〕고종 황제, 국호를 ‘대한’으로 정하다.

“경들과 의논하여 결정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정사를 모두 새롭게 시작하는 지금에 모든 예가 새로워졌으니 환구단에 처음으로 제사를 지내는 지금부터 의당 국호를 정하여 써야 한다. 대신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심순택이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기자가 옛날에 봉해진 조선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칭호로 삼았는데 애당초 합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나라는 오래되었으나 천명이 새로워졌으니 국호를 정하되 응당 전칙(典則)에 부합해야 합니다.”

조병세는 아뢰기를, “천명이 새로워지고 온갖 제도도 모두 새로워졌으니, 국호도 새로 정해야 마땅합니다. 앞으로 만억년토록 영원할 나라의 터전이 진실로 지금에 달려 있습니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곧 삼한의 땅인데, 국초에 천명을 받고 통합하여 하나가 되었으니,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하는 것은 불가한 것이 아니다. 또한 종종 각 나라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고 하였다. 이는 아마도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을 기다린 것이니, 천하에 공표하지 않더라도 천하가 모두 대한(大韓)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는 것이다.” (중략) 상이 이르기를, “국호가 이미 정해졌으니, 환구단에 행할 고유제(告由祭)의 제문과 반조문(頒詔文)에 모두 ‘대한(大韓)’으로 쓰도록 하라.”

(출전 : 『비서원일기』 1897년 10월 11일(음력 9월 16일))

〔사료 2-2-07〕황제 즉위식 - 그날의 모습

”11일 오후 2시 반 경운궁에서 시작하여 환구단까지 길가 좌우로 각 대대 군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섰으며 순검들도 몇 백 명이 틈틈이 질서 정연히 벌려 서서 황국의 위엄을 나타냈다. 좌우로 휘장을 쳐 잡인 왕래를 금하였고 조선 옛적에 쓰던 의장용 물건들을 고쳐 황색으로 만들어 호위하게 하였다. 시위대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하고 지나갈 때에는 위엄이 웅장하고 총 끝에 꽂힌 창들이 석양에 빛나더라. 육군장관들은 금수로 장식한 모자와 복장을 하였고, 허리에는 은빛 같은 군도를 금줄로 허리에 찼다. 또 그 중에 옛 풍속으로 조선 군복을 입은 관원들도 더러 있었으며 금관 조복한 관인들도 많이 있었다. 어가 앞에는 대황제 폐하의 태극 국기가 먼저 지나갔고, 대황제 폐하께서는 황룡포에 면류관을 쓰시고 금으로 채색한 연을 타시고, 그 뒤에 황태자 전하께서도 홍룡포를 입으시고 면류관을 쓰시며 붉은 연을 타고 지나갔다. 어가가 환구단에 이르자 제향에 쓸 각색 물건을 친히 둘러보고 오후 4시쯤 환어하였다.

11일 밤 장안의 사가와 각 전에서는 등불을 밝게 달아 길들이 낮과 같이 밝으며, 가을 달 또한 밝은 빛을 검정 구름 틈으로 내려 비추었다. 집집마다 태극 국기를 높이 걸어 인민의 애국심을 표하며, 각 대대 병정들과 각처 순검들이 규칙 있고 예절 있게 파수하여 분란이 일어나거나 비상한 일이 없이 하며, 길에 다니는 사람들도 얼굴에 기꺼운 빛이 나타나더라. 12일 새벽에 공교롭게 비가 와서 의복들이 젖고 찬 기운이 성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경사를 즐거워하는 마음이 다 크므로 여간 젖은 옷과 추위를 생각지들 아니하고 질서 정연히 사람마다 당한 직무를 착실히 하였다.

12일 오전 2시에 다시 우의를 베푸시고 황단에 임하셔서 하나님께 제사하시고 황제의 지위에 나아가심을 고하시고 오전 네시 반에 환어하셨으며, 동일 정오 12시에 만조 백관이 예복을 갖추고 경운궁에 나아가 대황제 폐하, 황태후 폐하, 황태자 전하, 황태비 전하께 크게 하례를 올리니 백관이 즐거워들 하더라.

13일에 폐하께서 각국 사신을 청하셔서 황제 지위에 나아가심을 선고하시고 각국 사신들이 다 하례를 올리더라. 이왕 신문에도 한 말이어니와 세계에 조선 대황제 폐하보다 더 높은 임금이 없고 조선 신민 보다 더 높은 신민이 세계에 없으니 조선 신민이 되어 지금부터 더 열심히 나라 위엄과 권리와 영광과 명예를 더 아끼고 더 돋우어 세계에 제일등국 대접을 받을 도리들을 하는 것이 대황제 폐하를 위하여 정성 있는 것을 보이는 것이요, 동포 형제에게 정의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세계에 났던 장부의 사업이라. 구습과 잡심을 다들 버리고 문명 진보하는 애국애민하는 의리를 밝히는 백성들이 관민 간에 다 되기를 우리는 간절히 비노라”

(출전 :『독립신문』 1897년 10월 14일)

〔사료 2-2-08〕고종, 황제 즉위식 후의 소감

“짐이 덕이 없어 왕에 오른 지 34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가 결국 옛날에는 없었던 변을 당하였다. 그리고 정치도 짐의 뜻대로 되지 않아 눈에 근심이 가득하였고, 늘 혼자 생각할 때는 등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그러나 지금 막대한 의식으로 걸맞지도 않는 제위(帝位)에 올리기 위해 여러 신하들이 소장을 올려 간청하였고, 대신들도 글을 올려 간청하고 있으며, 6군(軍)과 모든 백성들도 합문(閤門) 밖에 엎드려 간청하고 있으니 상하가 서로 고집만 피우고 있으면 그칠 날이 없으므로 그 대동단결한 여론을 끝까지 물리칠 수 없어 오랜 시일 동안 상의한 끝에 부득이 여론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런 커다란 행사는 예의를 참작하여 알맞게 시행해야 할 것이다”

(출전 : 황현, 『매천야록』제2권, 1897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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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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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2-2-09〕『독립신문』, 황제 즉위식에 대한 논평

“광무 원년 10월 12일은 조선 역사에서 몇 만년을 지내더라도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지라. 조선이 몇 천 년을 왕국으로 지내어 가끔 청국에 속하여 속국대접을 받고 청국에 종이 되어 지낸 때가 많이 있더니, 하나님이 도우시어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드셔서 이달 12일에 대군주폐하께서 조선 역사 이후 처음으로 대황제 지위에 나아가시고 그날부터는 조선이 다만 자주독립국뿐이 아니라 자주독립한 대황제국이 되었다. 나라가 이렇게 영광이 된 것을 어찌 조선인민이 되어 하느님을 대하여 감격한 생각이 아니 나리요”

(출전 : 『독립신문』 1897년 10월 14일)

〔대한제국 역사 칼럼 03〕고종 황제의 즉위식 장소, ‘환구단’인가, 아니면 ‘원구단’이 맞는가?

이 장소는 1897년 고종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옛 남별궁(南別宮) 터에 단을 만들어 조성한 단지이다. 중국 베이징 천단(天壇)에 위치한 원구단(圓丘壇)의 양식을 참조하여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단으로 만든 것이다. 1899년 3층 8각 지붕을 갖춘 황궁우(皇穹宇)를 축조하고 신위판(神位版)을 봉안하였다. 또한 1902년에는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石鼓壇)을 황궁우 옆에 세웠다. 그러나 1913년 일제에 의해 환구단은 철거되고 이듬해 그 자리에 조선호텔이 들어서면서 원래의 의미는 퇴색해 버렸다. 1967년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이 곳의 명칭은 한자 표기와 독음을 환구단(圜丘壇)과 원구단(圓丘壇, 혹은 圜丘壇)으로 혼용되었는데, 2005년 문화재청에서 한자표기로는 『고종실록』에 근거하여 ‘환구단(圜丘壇)’으로, 한글로는 『독립신문』의 기사에 따라 ‘환구단’으로 정하였다.

지금까지 통상적으로 부르고 있는 원구단은 이제 잘못된 표기가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전에 『조선왕조실록』과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여러 차례 원구단(圜丘壇)으로 읽었던 것은 과연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하늘을 상징하여 제단의 형태를 둥근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원구’라는 이름이 보다 적합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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