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과 좌절
  • 2. 대한제국의 수립과정
  • 3) 독립협회와 대한제국의 상징화 작업
  • 나. 독립협회의 독립문 건립운동

한편 아관파천 이후 개화 지식인층은 1896년 7월 2일 처음으로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만들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 독립문 건립의 의미는 “단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구주 열강으로부터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인식되었다. 1)

독립 협회 창립 당시 회칙에 의하면,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건설하기 위한 사무를 관장하는 회로서 구성하고 회장 1명, 위원장 1명, 위원 20명, 간사 20명, 서기 약간 명과 회계장 1명으로 구성하도록 하였다. 2) 초대 회장인 안경수와 위원장 이완용 등은 대신급의 관료로서, 이완용은 외부대신 겸 학부, 농상공부 임시서리대신이었다. 17명의 위원들도 대개 대신과 협판, 국장급 전현직 관료로 되어 있었으며 간사원 18명 중에서도 17명이 전현직 관리들이었다. 이들이 대한제국의 관료로서 독립 협회의 초기 주도층으로 등장하였다.

독립 협회의 목적이 공포되자 각계 각층으로부터 즉각적이고 광범위한 호응을 얻었다. 독립 협회는 『독립신문』을 통하여 보조금 헌납자를 공고하는 한편, 헌납자가 헌금표에 협회 가입의 의사를 표시하면 회원으로 입회시켰다. 독립 협회는 전국민을 상대로 하여 독립문 건립 모금 운동에 나섰으므로 회원수는 배가되었다. 1896년 11월 독립 협회에 등록된 회원수는 2,000명 내외였으나 1898년 7월에는 3,000여 명으로 증가하였고, 이후 1898년 11월에는 회원수가 4,173명으로 급증하였다.

1896년 11월 21일 오후 2시 30분 독립문 정초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날 정초식에는 회원, 일반시민, 정부 각부 대신, 외국 공사와 영사, 외빈, 각 학교 학도 등 5,000~6,000명이 참석하여, 돈의문 밖 서쪽 교외에 수레들이 운집하고 노약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때 왕태자는 1,000원의 거액을 하사하였으며, 이에 따라 정부 각 대신과 모든 관료들이 수십 전부터 100원까지 보조금을 헌납하기도 하였다. 1897년 8월까지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5,897원 19전 2리의 성금을 헌납하였다.

〔사료 2-3-02〕독립문 정초식 장면(1896년 11월 21일)

“독립관 연회 말. 지나간 토요일 오후 2시 반에 독립문 주춧돌 놓는 예식을 독립공원 땅에서 시행하였는데, 일기도 매우 좋거니와 각색 일이 절차가 있게 되어 갔고 사람이 내외국민 아울러 5,6천 명이 왔더라. 독립문 들어 가는 데는 푸른 나무로 홍예를 만들어 조선 국기로 좌우를 단장하고 문 위에는 흰 바탕에 붉은 글자로 ‘독립문’이라 써 높이 달고 문에는 독립 협회기를 훌륭하게 만들어 바람에 흔들리게 하였으며, 청한 손님들 있는 밖으로는 목책으로 울타리를 하여 그 안에 정부 높은 관원들과 각 학교 학원들과 외국 공∙영사와 그 외 외국 신사들과 여러 외국 부인네들이 많이 앉고 서고 하였으며, 새로 세우는 (독립)문의 주추를 벌써 높이 모았는데, 좌우에 넉자 높이까지 돌로 쌌는데 한편은 회장과 연설하는 사람들과 기도하는 교사가 섰고 또 한편은 배재 학당 학도들이 섰더라. 단 밑으로는 앞문까지는 각 관립학교 학도들이 섰고, 영어 학교 학도들은 길 들어오는 좌우에 벌여 서서 보기에 매우 정제하더라. 회장 안경수씨가 예식을 열고 배재 학당 학도들이 조선가를 부르고 회장이 주춧돌을 놓고 교사 아펜젤러씨가 조선 말로 하나님께 축수하되, ”조선대군주 폐하와 왕태자 전하께서 성체가 안강하시고 조선 독립이 몇 만 년을 지나도 무너지지 않게 되며 조선전국 인민이 점점 학문이 늘고 재산이 늘어 새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더라.

회장 안경수씨가 연설하되, “독립 협회가 처음에 시작할 때에 다만 회원이 불과 4,5인이더니 오늘날 회원이 여러 천명이요. 조선 인민들이 나라가 독립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알 것이 심지어 하향 궁곡에 사는 인민 중에서 독립문 세우는데 돈을 보조하는 사람들이 있고 외국 사람 중에서도 돈 낸 사람들이 많이 있는지라. 이것을 보면 조선 사람들도 일을 하려고들 거들면 일이 되는 것이라. 오늘부터 조선서 만사를 독립 협회가 하듯이 시작하여 모두 합심하여 하기를 바란다.”고 하며, 또 회원들과 보조금 낸 사람들을 다 감사한다고 하며 오신 손님들을 다 치하하더라.

그 다음에 한성 판윤 이채연씨가 조선 독립이 어찌하여 영구히 보존하는 문제를 가지고 연설을 하는데, 이 판윤은 말도 잘 하거니와 목소리도 높고 맑아 모두 한 말을 사람마다 알아듣고 말한 뜻인 즉 “조선 독립을 영구히 지키려면 전국 인민이 합심하여야 지키겠다”고 하여, 그 외에 좋은 말을 많이 하였더라.

그 다음은 배재 학당 학도들이 독립가를 노래하고 그 후 외부대신 리완용씨가 연설하되, 조선 전정이 어떠할꼬 한 문제를 가지고 연설을 하는데, 의론이 모두 사리에 꼭 들어맞고 이치가 있더라. “독립을 하면 나라가 미국과 같이 세계에 부강한 나라가 될 터이요. 만일 조선 인민이 합심을 못하여 서로 싸우고 서로 해하려고 할 지경이면 구라파에 있는 폴란드란 나라 모양으로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터이라. 세계 역사에 두 본보기가 있으니, 조선사람은 둘 중에 하나를 뽑아 미국 같이 독립이 되어 세계에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던지, 폴란드 같이 망하든지, 좌우간에 사람 하기에 있는지라. 조선 사람들은 미국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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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 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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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의사 제이슨(서재필)씨가 연설하되, 첫번에 영어로 외국 사람들을 대하여 ‘조선에 있는 외국 사람’이란 문제를 가지고 말을 하고, 또 조선 말로 연설하는데 대강 의사인즉, “나라가 독립을 하려면 사람이 혼자 서는 것과 같아서 다리가 튼튼해야 몸무게를 싣고 능히 걸어다니는 것이라. 나라의 다리는 곧 백성이요, 머리는 곧 정부라. 머리와 다리가 서로 도와 주어야 그 몸이 튼튼하여 능히 서고 앉기를 임의로 할 터인데, 만일 머리가 다리를 상하게 한다든지 다리가 머리를 상하게 하면 그 몸이 병이 들어 운동을 못할 터인즉, 정부와 백성이 서로 위해 주어야 나라가 튼튼히 되어 독립이 될 터이라. 지금 새로 세우는 독립문을 가지고 비유할진대, 독립문이 혼자 섰으되 그 문 짓기는 돌몽이가 여러 백개가 들어 서로 회와 모래에 합하여 서로 튼튼히 붙어 무게를 서로 받치고, 돌몽이마다 크고 잘고 다 힘을 써서 제 직무를 하여야 그 문이 여러 천 년이 되어도 무너지지 않고 혼자 섰지, 만일 그 중에 돌몽이 하나라도 제 직무를 못하여 물러나온다든지 떨어진다든지 하면 그 문이 혼자 설 수가 없는즉, 나라도 대소 인민이 사람마다 제 직무를 하여야 나라가 영구히 독립이 되리라.”고 하더라.

그 후에는 배재 학당 학원들이 진보가를 노래하고 그 후에 영어 학도들이 조련하는데 참 훌륭히들 하여 내외 국민이 다 칭찬하더라.

각 학교 학원들이 다 대군주 폐하를 위하여 만세를 부르고 독립 협회를 위하여 천세를 부르고 다른 외국가들을 부르더라. 청한 손님들이 독립관으로 들어가 차와 실과를 대접하고 회장 안경수씨가 연설하되, “조선과 외국 사이에 교제가 점점 친밀하여 서로 자주 모여 정다운 친구들 같이 바란다.”고 한 후, 미국 부공사 알렌씨는 미국을 몸 받아 대답하고 러시아는 공사가 못 온 까닭에 육군관원 쳐-빈스키씨가 대답하고 일본 대리 공사 가토씨가 일본을 몸 받아 대답하고 서울 있는 외국 사람들을 몸받아 탁지부 고문관 브라운씨가 대답하는 데 다 말하기를, “조선을 대하여 경축하노라” 하며, “조선 독립이 튼튼히 되어 가기를 다 바란다”하여 독립 협회를 치하를 많이 하고 이런 일이 조선에 많이 있기를 바란다고들 간절히 말들 하더라.”

(출전 : 『독립신문』 1896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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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과 독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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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독립 협회독립문의 건립과 아울러 이전 청나라 사신을 위한 영빈관으로 사용되다가 방치되었던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이라고 하고 집회 장소와 사무실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독립관이 완공되자 1897년 5월 23일 왕태자가 국문으로 친히 쓴 ‘독립관’의 현판식을 거행하고, 매 일요일 오후 3시에 회원들이 모여 강연회를 갖기로 하였다. 독립문은 원래 1897년 8월 13일 조선왕조 건국 505주년을 맞는 개국기원절에 맞춰 준공할 예정이었지만, 조금 늦어져 11월 20일에 완공되었다. 이때는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지 불과 한 달이 지난 때였다. 그래서 준공식은 성대한 기공식에 비하여 조촐하게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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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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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과 독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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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The Independent」1896년 6월 20일
2)독립신문』 1896년 7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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