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과 좌절
  • 3. 대한제국의 권력구조와 정치 개혁운동
  • 1) 대한제국의 정치 제도와 개혁운동
  • 나. 유교 지식인들의 입헌 정체의 이해와 정치 제도 개혁론

한편 전통적인 유교에 입각하면서도 서구의 정체를 수용하려는 논자들도 있었다. 당시 유교 지식인들은 갑오개혁을 서구의 근대 정치, 혹은 일본의 입헌 정치를 도입하는 것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반면, 일부에서는 서구의 정치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1899년 1월 전병훈은 국가의 언로를 넓히기 위해 외국의 하의원을 본받아 매해 정월 수도에 모여 국가상 주요 사안을 통의하여 결정하자고 하였으며, 이러한 상소는 중추원에도 올려져 ‘특설 하의원’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사료 3-1-03〕안태원(安泰遠), 「민회의 폐단에 대한 상소」(1898년 12월 9일)

“근년에 와서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요원한 것을 따르는 무리들이 우리의 좋은 법과 아름다운 규례는 버리고 저들의 신기한 기술과 교묘한 재주만 좋아해서,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미혹시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마음을 현란하게 해서 다른 나라의 민주와 공화의 제도를 채용하여 우리나라의 군주 전제의 법을 변경하려고 하였습니다. 끝내 갑오년(1894)과 을미년(1895)의 변란도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군권(君權)과 민권(民權)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비록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군권과 민권의 실제를 은연중에 분리시켜서 두 갈래로 만들고 전자를 뒤로 하고 후자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이 무리들은 권력이 백성들에게 있다고 여겨 백성들을 쫓아가기를, 마치 옛날에 벼슬을 못하면 벼슬을 얻지 못해서 근심하고 벼슬을 얻은 뒤에는 벼슬을 잃을까봐 근심하는 자들이 외척에게 붙고 환관과 결탁하며 다른 나라와 내통하고 외적과 연계를 맺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민(民)이란 온 천하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령 한 군(郡)의 인구가 1만 명이라고 하면 뭇사람들이 이의 없이 모두 복종하는 사람 1,2명을 뽑고 한 도(道)의 인구가 100만 명이라고 하면 뭇사람들이 따라 복종하는 사람 100명, 200명을 뽑아서 모두 서울에 모여 조정의 정사를 의논하게 한다면, 이는 또한 나무꾼에게 묻고 풍속을 담은 노래에서 채용하여 정치에 일조가 되게 하는 데에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이른바 민회라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직임을 맡은 자들은 저잣거리 장사치의 자식들에 지나지 않는데, 더러는 외국의 종교에 젖고 더러는 권세가의 집에 드나드는 자들로서 서로 모여 당(黨)을 결성한 것입니다.”

(출전 : 『고종실록』1898년 12월 9일조)

〔사료 3-1-04〕전병훈(全秉薰), 「여섯 가지 급한 임무」(1899년 1월 1일)

“언로(言路)를 활짝 열어놓는다는 것은, 예를 들면 순(舜) 임금이 사방의 문을 활짝 열고 사방 백성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과 같고, 한(漢) 나라 고조(高祖)가 매우 신속하게 간언을 따랐던 것처럼 하는 것으로, 이는 천하의 지혜 있는 자들을 나오게 하여 나를 위해 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언할 일이 있으면 북을 두드리고 세워놓은 나무에 호소하는 글을 붙이며 소경이 교훈적인 말을 올리고 공인(工人)들이 경계할 말을 아뢰면 선비들이 의견을 올리고 백성들이 논의하는 등등의 규례는 아직 옛날대로 다 회복되지 않았는데, 그 직임만 폐지하였으니 장차 폐하께 이목이 되어 줄 신하가 없을까 두렵습니다. 만일 발호하여 전횡하는 조짐이라도 있게 되면 누가 다시 그 책임을 지겠습니까? 또한 외국의 하의원(下議院) 규례를 원용하여 각 고을에 칙명을 내려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게 하여 매년 1월에 모두 수도에 모아 놓고서 민과 나라의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논의하고 진달하여 서로 협력해서 일을 해나가게 해야 하니, 그런 뒤에야 많은 계책이 다 모여들고 정치의 방도가 크게 진전될 것입니다.”

(출전 : 『고종실록』1899년 1월 1일조)

〔사료 3-1-05〕「특설하의원」(1899년 1월)

“영국 하의원의 규례를 모방하여 매년 정월에 향신(鄕紳) 400여 인을 서울에 모이게 하여 세금의 출입과 군수물자의 증감, 인물의 선악 등 민(民)과 국(國)에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 등 무릇 정책과 법령의 득실에 대하여 상의원(上議院)과 서로 논의하여 결정한 후 정부에 공문을 보낸다. 정부는 또한 심사 숙고하여 공론을 협의한 연후에 군주에게 보고하여 가부를 재가받는다. 그러므로 군주는 힘들이지 않고 다스린다. 이것이 서구에서 오래 민란을 거친 후에 다스림의 좋은 법으로 만든 것이니, 일국(一國)의 인재를 모두 기용한다는 아름다운 뜻을 지니고 있다. 이제 반드시 우리 나라에 세워서 실행한 연후에야 난민(亂民)이 가히 다스려질 수 있고 여러 대책이 필경 모아져서 영국의 강대함과 같이 다스려지게 될 것이다.”

(출전 : 『전안식(田案式)』(中B13G-89, 국사편찬위원회) 「건의9조(建議九條)」)

그렇지만 이들의 주장이 서구의 입헌 군주제나 대의 정치 제도를 그대로 도입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1899년경 이기는 「급무팔제의(急務八制議)」라는 글에서 세계의 정치체제를 크게 공화, 입헌, 전제의 세가지 형태로 나누어보면서 당우(唐虞) 이상의 시대를 왕이 없는 공화의 치세, 삼대를 입헌의 치세, 진한(奏漢) 이하를 전제의 치세로 보아 하⋅은⋅주 삼대사회를 이상적인 정치가 행해지는 입헌시기로 보았다.

〔사료 3-1-06〕이기(李沂), 「여덟 가지 제도 개혁에 급히 힘써야」(1899년경)

“지금 천하에 나라라고 부르는 것은 많다. 그러나 그 대요(大要)는 세 가지가 있다. 공화(共和), 입헌(立憲), 전제(專制)이다. 동양은 비록 일찍이 이와 같은 명칭이 없었으나 동양의 시대로 헤아려보면, 당우(唐虞) 이전은 공화(共和)의 다스림, 삼대(三代)는 입헌(立憲)의 다스림, 진한(秦漢) 이후는 전제(專制)의 다스림이었다. 세 가지 중에서 공화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며, 전제보다 더 좋지 않은 것은 없다. 성인이 다시 일어난다면 반드시 처할 곳이 있을 것이다. 천하를 가만히 생각건대, 곧 천하인의 천하이지 일인의 천하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삶이란 모두 기교로 서로 알력이 생기고 서로 싸우려고 한다. 내가 장차 힘으로써 이를 다스리려 한다면 또한 나보다 용맹한 자가 있을 것이다. 내가 장차 덕으로써 이를 다스리려 한다면 또한 나보다 어진 자가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천하에 싸움이 많았기 때문에 선양(禪讓: 요임금, 순임금과 같이 왕위를 혈족이 아니라 현명한 사람에게 물려주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그 시작에 대해서는 역사에는 명확한 근거가 없다. 대개 살펴보건대 ‘오제(五帝)는 관천하(官天下)했다’고 하는데, 이때 관(官)은 선양하여 이은 것을 말한다. 즉 요순보다 이전에도 그렇게 한 것이다. 지금과 비교하면 구미인의 대통령과 다르지 않다. 다만 연한이 다른 것이다. (중략) 금일에 도모할 것은 반드시 거문고 줄을 고쳐 팽팽하도록 한 연후에 할 것인데, 그러나 진한(秦漢) 이후는 낮아서 가히 행할 수 없고 당우 이전으로는 높아서 가히 바랄 수 없고, 가히 바라면서도 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삼대(三代)일 뿐이다.”

(출전 : 이기(李沂), 『해학유서(海鶴遺書)』 권2, 급무팔제의(急務八制議), 20~21쪽)

이처럼 대부분의 유교 지식인들의 주장은 서구의 입헌정체를 그대로 도입하자는 것이 아니라 종래 중국 삼대의 이상 정치를 본받는다는 것으로 입헌군주제를 실질적으로 실현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려운 한계성을 가진 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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