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과 좌절
  • 4. 대한제국기의 개혁사업
  • 1) 대한제국의 국가 제도와 군사 제도 개혁
  • 다. 징병제 논의와 한계

1903년에는 군사력의 강화라는 목표 아래 징병제가 국가적인 과제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군사력 증강 문제는 국경 방어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청나라의 의화단 사건을 교훈삼아 내란의 발발이 외국군의 개입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내부의 반란을 철저히 진압하겠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1901년 8월 원수부에서는 국민 중에서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18세 이상의 남자를 병적에 편입하여 3년간 훈련시킨 후에 귀가케 한다는 징병제 시행안을 마련하였다.

1902년 11월 법부협판 이기동은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징병제의 시행을 주장하였다. 그는 예전의 병농일치제의 이념을 이상으로 하고 토지세를 매결당 30냥을 부가함으로써 재정문제를 해결하면서 징병의 비용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의정부 회의에서는 대다수가 세금을 증액하자는 안에는 찬성하였으나 징병제 실시는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통과시키지 않았다.

〔사료 4-1-09〕법부협판, 이기동(李基東) 징병제 요구안

“가만히 삼가 생각컨대, 나라에서 재화가 나는 것은 토지이므로, 옛날의 위정자는 10분의 1세의 원칙에 따라 백성들에게 거두는 것을 정공(正供)으로 삼았고 이로써 국가재정을 부유하게 하였다. 우리 조정에서도 세금을 처음 정할 때 역시 이 제도를 준수하였습니다. 그런데 토지의 소출과 세금으로 납부한 바를 비교하면 10분의 1의 배가 넘을 정도로 가볍습니다. 가령 1결 토지의 소출 곡식이 20석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데, 산과 들, 기름진 땅과 척박한 땅의 구분이 있어 1결에 대한 납부는 25냥에서 30냥의 한도가 있으므로 20석의 곡가를 30냥의 세금 납부와 비교해보면 20분의 1세에 불과합니다. 하물며 지금 곡가가 폭등하고 있으니 더욱 저렴한 것입니다. 무릇 10분의 1세는 선왕의 제도라 본래 무거운 세금이 아닙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시작하여 매결당 30냥을 더하는 것을 법으로 정하고, 이로써 징병의 비용으로 삼는다면, 병사는 이루 다 쓸 수 없을 것이며 재정은 부족할까 걱정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혹시 창졸간에 더 세금을 거두는 것이 민간의 원망을 살 것이라는 지적이 있으나,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결세(結稅)를 납부하는 사람은 토지를 소유한 백성이고 백성 중에 조금 부유한 자입니다. 빈민은 토지가 없는 자이므로 애초에 관계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농민이 아니면 병사를 부양할 수 없고, 병사가 아니면 농민을 보호할 수 없어 병사와 농민은 서로 의지하는 법입니다. 무사할 때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지금 비상시에는 어떠하겠습니까. 징병제를 일거에 시행하여 사람들이 장교와 병사가 되게 하면 막강해져서 내우외환은 우려할 것이 못됩니다.”

(출전 : 『주본5』제63책, 1902년 10월, 687~688쪽)

1903년 3월 고종 황제는 징병제 실시에 대한 조칙을 전격 반포하였다. 과거 5위도총부 하의 5위 체제와 같이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전통적인 군제의 복귀를 명목으로 하여 국민들에게 징병제의 실시를 설득하려고 하였다.

〔사료 4-1-10〕고종 황제 징병제 실시에 대한 조칙

“옛날에는 군대가 농민에게 보유되어 사농공상의 사민(四民)이 모두 무예를 익혔다. 국가가 무사할 때는 각기 생업에 종사하고 유사시에는 향(鄕), 수(遂). 주(州), 현(縣)에서 각자 출병하였다. 그리하여 천하를 지휘하여도 지휘관의 지휘에 팔이 손을 부리듯이 잘 통솔이 되었다. 그러나 겸병(兼竝)이 일어나 그 법이 폐지된 후 군제가 무상하게 변화되며 일정함이 없게 되자, 매번 군사를 징발할 때마다 소요가 발생하였고, 또 갑자기 소집하여 시장 사람들을 몰아가듯이 하였으니, 어찌 저러한 병사를 쓰겠는가. 이는 나라에 군대가 없는 것이니, 나라에 군대가 없다면 나라는 나라가 아닌 것이다. 내가 미리 면밀하게 방비에 유념한 지 몇 해가 되었다. 각국의 징병규칙은 옛 제도와 부합한 것으로서 그 상세함은 보다 더 한 것이 있다. 육해군제는 그것을 참작하여 장점을 취하여 부대를 편성하여 이미 정돈하였다. 또 우리 제도를 참작해서 서울로부터 지방까지 각자 부서를 나누어 5위(五衛)에 소속시켰으니, 이는 실로 도총부(都摠府)의 옛 제도를 따른 것으로 건국 이래의 일대 경장(更張)이다. 무릇 나라는 백성에 의지하고 백성은 나라에 의지하는 것이니, 백성이 편안하면 나라가 편안하고 나라가 편안하면 백성 역시 편안하다.”

(출전 : 『고종실록』 1903년 3월 15일)

이에 따라 원수부는 선비병(先備兵), 후비병(後備兵), 예비병(豫備兵), 국민병(國民兵) 등으로 징집하고 징병 연한을 17~40세로 하는 징병조례안을 검토하였다. 이는 일본의 군제를 모방하면서 전제군주제의 군사적 기반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여론은 양반층의 반발과 호적 제도의 미비가 징병제 시행의 걸림돌로 지적하고 있었고, 또한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국민교육이 선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행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징병제가 국민을 국가방위의 주체로 하는 제도라는 점에서 일정하게 국민의 정치 참여를 인정하고 국민 동원을 담보해 내지 못한다면 실시하기 어려운 제도였다. 또한 당시 민중의 소요와 반란을 각 지방의 진위대의 최우선 임무로 할 만큼 민중에 대한 위로부터의 압박과 압제를 수행하고 있었던 상황에서는 징병제는 곧바로 시행하기 어려웠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