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과 좌절
  • 4. 대한제국기의 개혁사업
  • 2) 광무 양전 관계 발급 사업
  • 라. 광무 양전⋅지계 사업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

광무 양전⋅지계 사업은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에 비교해도 손색없는 근대적인 토지 제도의 수립 과정이었다. 측량기술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을 취하기는 했으나 서양의 신식 측량기술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였다. 종래 지주제를 서구의 근대 소유권의 개념으로 그대로 인정하고, 토지 소유자에게 관계를 발급하여 소유권자로 인정해주었다. 대한제국은 위로부터 근대화 개혁을 추진해 기존의 지주층과 대상인층을 근대적 지주⋅자본가로 전환시키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근대 국가를 수립하려고 했다. 이렇듯 광무개혁은 대한제국을 기존 구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근대 국가⋅근대 사회로 전환시키고 있었다.

〔대한제국 역사 칼럼 5〕대한제국 양전 관계 발급 사업은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과 어떻게 다른가?

대한제국의 양전⋅관계 발급 사업은 ‘토지 소유권의 법인’이라는 측면에 중요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이전의 양전 사업과 달리 토지 소유자에게 관계(官契)를 발급하였다. 즉 양전 사업을 통하여 개별토지와 토지 소유자를 조사하고, 그 토지 소유자가 매매문기 등을 제출하여 현실의 토지 소유자임을 확인하는 사정(査定) 과정을 거쳐 토지 소유권자로 확정되었다. 이 관계사업은 주도면밀하게 양전과정과 결합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사적 토지 소유에 대한 근대적 법인을 목표로 한 것이었고, 조선 후기 이래 지배적 소유 관계인 지주적 토지 소유를 그대로 온존시키면서 그것을 토대로 하여 근대적 토지 개혁을 추구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양전이란 어디까지나 국가적 수취의 입장에서 그 수조지(收租地)와 수조 대상자를 확정하는 과정이었으며, 특히 토지 소유권의 조사의 측면에서는 근대법적인 소유권 확정과 관리체계를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전 사업이 그 자체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한 사업은 오직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대한제국의 양전⋅지계 사업과 일본 제국주의의 토지 조사 사업은 지주적 토지 소유의 법인(法認)이라는 측면에서는 크게 다른 것이 아니었다. 대한제국의 토지 조사와 관계 발급에서도 이전의 모든 매매문기를 강제적으로 거둬들이고 새로이 관계로 환급함으로써 국가가 토지 소유권을 공인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관계 발급으로 취득한 소유권은 어떤 이유로도 취소할 수 없는 국가로부터 추인받은 배타적 소유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양 사업의 중요한 차이점은 외국인에게 토지 소유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한제국의 사업에서는 당시 외국인들의 침탈이 빈번해짐에 따라 증대된 토지의 매매 혹은 양여의 경우뿐만 아니라 전당(典當)의 경우에도 관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대한제국에서는 일정하게 소작농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정책이 취해졌다. 토지 조사 사업을 계기로 농민적 토지 소유나 소작권 등 농업에 대한 권리들은 배제되고 농민 수탈을 통해 식민지 농업체제를 갖추었다.

우리나라 토지 소유 제도는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에 의해서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이 정착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대한제국 고유의 양전⋅관계 발급 사업에 의해 형성될 것이었다.

그러나 1904년 1월 고종 황제는 이제 각 지방에서 막 시행하려던 관계 발급 사업을 갑자기 정지시켰다. 그리고 지계아문을 축소하여 탁지부 양지국에 소속시켰다. 그해 4월에는 급기야 관계 발급 사업을 폐지하고 말았다. 이는 러일 전쟁의 발발과 관련이 있었다. 대한제국의 양전 사업과 관계 발급 사업은 더 이상 실시되지 못하고 중단됨으로써 대한제국이 추구하는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의 독자적인 수립을 완수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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