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과 좌절
  • 4. 대한제국기의 개혁사업
  • 4) 교육 개혁과 일상생활의 변화
  • 다. 서울 도로의 정비와 건설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침탈이 개항장을 중심으로 점차 확대되었다. 1883년 인천이 개항장이 되면서 대한제국의 수도 서울에 외세의 영향이 크게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서울의 시가지는 전통적인 요소가 남아있으면서도 서양의 영향을 받아 근대화된 시설, 거리, 교통, 인구의 이동 등 다양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1882년 조청수륙무역장정의 독소조항으로 인하여 서울의 양화진과 시가지들이 개시장(開市場)으로 개방됨에 따라서 양인과 일본인의 거주와 유입, 그리고 상행위가 급속하게 확대되었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에서는 외국인의 거류지를 제한하고자 하는 여론에 힘입어 주거지를 규제하려고 하였으나 일본을 비롯한 서양 열강의 반대로 말미암아 실패하고 말았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정국의 변화를 꾀한 고종은 그해 9월 ‘한성 내 도로의 폭을 개정하는 건’이라는 내부령을 내렸다. 황토현에서 흥인지문까지, 그리고 대광통교에서 숭례문까지의 큰 도로를 침범한 가옥들을 모두 철거하고, 너비 50여척 내지 70~80척이 되는 본래의 도로 공간을 다시 되찾아 도로변의 상가를 새로 정비토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사료 4-4-07〕「내부령 9호, 한성내 도로의 폭을 규정하는 건(1896년 9월 29일)」

내부령 9호, 황토현(黃土峴)으로부터 흥인지문(興仁之門)까지와 대광통교(大廣通橋)로부터 숭례문(崇禮門)까지는 일국의 대도(大道)이거늘 가옥이 길을 침범하고 내(川)를 넘는 것은 법에서 당연히 금할지라. 양 길의 원래 너비는 혹 50여 척이오, 7~80척 되는 곳이 많으니 현재 상황의 상무(商務)와 비교하면 필요로 하는 길의 폭에 지나치다 할 지라. 법을 세워 개량함이 가(可)하다. 그 예는 다음과 같음.

  • 1. 황토현으로부터 흥인지문까지와 대광통교로부터 숭례문까지 도로의 폭을 새로 정하여 55척으로써 규칙에 따르고 도로 양변에 있는 나머지 땅은 상민(商民)에게 관허(官許)하여 임시로 집[假家]을 지을 수 있게 함.
  • 2. 임시로 지은 집의 전면 기둥의 높이는 9척으로써 규칙을 정하고 그 건축하는 제도는 일자(一字) 모양으로 하여 요철(凹凸)이 없게 함.
  • 3. 임시로 지은 집의 지붕은 일체 볏짚을 쓰지 못하게 하고 그 외 재료는 각기 뜻에 따라 적용케 함.
  • 4. 임시로 지은 집을 위의 방식대로 조성하면 현재 모양에 비하여 비용이 많이 들 것이니 한성에 금일 상업 상황을 헤아리건대 아직 다 시행할 수 없어서 그 철훼함이 번거로워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일 것이고, 또 55척 길 폭은 조정의 의행(儀行)을 충분히 가능하게 할 것이니, 종전 가마가 움직일 때 길을 침범한 가옥을 파괴한다는 옛 규례는 정지하여 폐지케 함.
  • 5. 관이 허가한 임시로 지은 집은 아직 10년으로써 한정하고 기한을 채운 후에는 상업이 번성하고 왕성하여 길의 좁음을 싫어하는 때는 길의 원 폭은 다시 환수함.

(출전 : 『관보』442호, 1896년 9월 30일)

〔사료 4-4-08〕「철도와 도로의 이로움」

“정부에서 미국 사람과 서울 인천 사이에 철도를 약조하여 미국 돈 200만원 가량이 국중에 들어 올 터인즉, 이 일에 인연하여 벌어 먹고 살 사람이 조선 안에 여러 천명이 될 터이요. 철도가 된 후에는 농민과 상인들이 철도로 인연하여 직업들이 흥왕할 터이요. 또 조선 백성들에게 철도가 큰 학교가 될지라. 개화란 말은 들었으되, 아직까지 조선백성들이 개화의 실상을 보지 못한 고로, 종시도 개화를 모르는 인민이 많이 있는지라. 만일 철도 왕래하는 것을 보거들면 개화 학문이 어떠한 것인 줄을 조금 짐작할 듯하며, 높은 학문과 제조법을 배우고자 하는 백성이 많이 생길 터이요. 또 들으니 서울서 부산까지와 서울서 의주까지 철도 놓는단 말이 있으니 만일 이 약조들이 잘 될 것 같으면 그 중간에 있는 백성들도 또한 큰 이익을 볼 터이라.

정부에서 근일에 경성 내외 긴요한 큰 길들을 수정하여 개천을 곧게 치고 도로를 편편히 하는 고로 인민과 우마가 왕래하기가 편하게 되고 또 민간에 병이 적을 터이니 이것은 정부의 큰 사업이요, 백성에게 큰 이익이리라.

(출전 : 『독립신문』, 1896년 7월 2일)

1896년 고종은 경운궁을 수리하여 증축하는 사업을 추진했고, 이후 세계 만국에 완전한 독립국이라는 상징으로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1897년 1월 독립서고일을 제정한 뒤 3월말 서소문 일대를 측량하였고 경운궁의 동쪽문인 대안문 앞 방사상 도로 건설과 함께 가까운 지점인 남별궁에 환구단(圜丘壇)을 세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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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서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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