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과 좌절
  • 5. 고종 개혁 정책의 좌절과 평가
  • 1) 외교 전략의 모색과 좌절
  • 나. 러일 전쟁에서의 중립화 선언과 좌절

고종은 유럽 열강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유럽 각지에 특명 전권 공사를 파견하였다. 1901년 3월 종래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공사를 겸직하고 있던 이범진을 러시아 공사로 임명하고, 민영찬을 주프랑스 공사로 새로 파견하였으며, 영국, 독일, 이태리 특명 전권 공사를 겸직했던 민철훈을 독일과 오스트리아 공사로 임명하고, 민영돈을 별도로 영국과 이탈리아 특명 전권 공사로 임명하였다. 고종 황제는 유럽에 파견한 특명 전권 공사들로 하여금 중립화 문제 등을 해당 국가와 협의하게 하였다.

또한 대한제국은 만국 평화 회의, 적십자회의 등 국제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하였다. 1900년 5월 외부대신 박제순으로 하여금 벨기에 전권대신에게 헤이그 평화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협조를 의뢰하였다. 이후 고종은 민영찬을 만국 평화 회의의 총재에게 보내 적십자회 가입과 만국 평화 회의의 사절단 파견 등을 타진하고 1903년 1월 가입 허가를 받았다.

1904년 러일 전쟁의 전운이 감돌자 대한제국의 내장원경이자 탁지부대신서리인 이용익은 중립화 추진 세력들과 연계하여 국외 중립화 선언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벨기에 고문과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어학교 등의 외국어 교사들과 연합하여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 고종 황제는 중립선언으로 한국이 전쟁의 위험에서 탈피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또한 중립 선언에 대해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공사들이 접수를 통보하자 이제 독립 불가침을 승인받은 것으로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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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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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서울에 주재한 영국공사 조던(J. N. Jordan)은 일본과 러시아 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한국 정부는 서울을 먼저 점령하는 측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 지시에 따라 움직일 것이 분명하므로 한국의 중립 선언이란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예견대로 일본이 먼저 서울을 점령하여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사실상 대한제국의 중립선언을 지지하는 열강은 없었다. 청일 전쟁 이래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화하려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중립화 정책을 반대하였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개전을 지지하였다. 대한제국이 일본, 러시아, 중국 등 주변 관련국들의 합의와 동의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이나 영국 혹은 프랑스를 상대로 한 중립화 요청은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한반도 주변 국제정세의 흐름과 열강의 동향을 정확하게 간파하지 못한 상황에서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는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중립화 외교 정책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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