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한반도 신탁 통치안
  • 3.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조선에 관한 결정’
  • 1) 점령 직후 주한 미군 사령부의 신탁 통치안 반대 입장
  • 바. 미 군정의 과도 정부 수립 구상과 미 국무부의 입장

미 군정의 임정에 대한 이중적 태도는 인공을 타도하고 남한의 혁명적 정세에 대응하려는 미봉적 조치만은 아니었고, 미 군정 나름의 뚜렷한 정책 구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미 군정은 10월에 들어 임정 요인들의 개별적 활용 또는 간판 활용에서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조치’들을 구상하였다. 그것은 맥아더 사령부와 미 군정이 간헐적으로 제기하던 남한의 정계 통합을 통한 ‘자문 기구’와 ‘과도 정부’ 수립 계획이었다. 맥아더의 정치 고문 애치슨(George Atcheson)은 10월 15일 ‘장차 집행부 내지 행정부적인 정권 기관으로 발전할 수 있는 조직’으로 전 한국 인민 집행 위원회(全韓國人民執行委員會, National Korean Peoples Executive Committee)를 구성할 것을 국무 장관에게 건의하였다. 그는 이 위원회에는 현재 하지 장군의 고문 회의가 고문으로 참여하거나 적당한 시기에 위원회로 통합될 수 있을 것이며, 초기 단계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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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김구,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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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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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애치슨의 구상은 이후 하지와 그의 정치 고문 랭던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하지는 애치슨의 구상을 받아 과도 행정부 수립 경로를 보다 논리적으로 제시하였다. 하지는 상부에 보내는 11월 5일자 전문에서 ‘고문 회의를 확대하여 통합 고문 회의(統合顧問會議, Coalition Advisory Council) 구성 → 군정 감독하에 고문 회의 주도로 과도적인 한국 행정부(AIB Korean Administration) 설치 → 총선거로 국민 정부(Popular Government)를 수립’하는 경로를 제시하였다. 하지의 전문은 미 군정 나름대로 이후 한국에서 수립될 정부의 발전 방향과 발전 단계를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새로 수립될 과도 행정부의 원형은 기존 고문 회의의 확대판이라는 점을 밝힘으로써 그 기구의 정치적 성격을 암시하였다.

미 군정의 과도 정부 형태에 대한 구상은 랭던의 정무 위원회(政務委員會, Governing Commission) 구상에 와서 한층 구체화되었다. 랭던은 ‘① 군정 내에 김구를 중심으로 한 회의체(Council)를 구성하고, 이 회의체가 정무 위원회를 조직, ② 정무 위원회와 군정을 통합하고, 군정을 한국인 조직으로 대체, ③ 정무 위원회가 과도 정부(Interim Government)로 군정을 계승, ④ 정무 위원회는 국가 수반을 선거로 선출하고, 국가 수반은 정부를 구성’한다는 발전 경로를 제시하였다.

앞에서 지적한 하지의 전문이 미 군정이 구상했던 과도 정부 형태의 논리적 발전 경로를 제시하였다면, 랭던의 정무 위원회 구상은 한국의 내부 정세에 맞추어 정부 수립의 경로와 방법을 보다 포괄적이고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랭던 구상의 가장 큰 특징은 이것이 국무부의 신탁 통치안과 국제 민간 행정 기구안을 내용적으로 대체하였다는 점이다.

랭던은 정무 위원회 구상을 건의하는 전문의 첫머리에서 공개적으로 신탁 통치의 기각을 주장하였다. 또 랭던은 국제 민간 행정 기구안을 충분히 숙지한 상태에서 정무 위원회 구상을 작성하였다. 오히려 랭던은 자신의 정무 위원회 구상이 신탁 통치안과 국제 민간 행정 기구안의 원안 노릇을 하였던 ’SWNCC 79/1’과 ’SWNCC 101/4’를 관련 근거로 하여 작성되었고, 이를 대체하기 위한 것임을 전문에서 밝혔다. 흥미롭게도 랭던은 해방 이전 시점에서는 국무부 실무 관리들 가운데 한반도 신탁 통치안을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이었다.

〔사료 3-1-06〕 랭던의 '정무 위원회' 설치안

재한국 정치 고문 대리(랭던)가 국무 장관에게

해방된 한국에서 한 달간 관찰하고 난 후, 그리고 이전 한국에서의 업무 수행을 배경으로 하여, 본인은 신탁 통치를 현지의 현실적 조건에 맞출 수 없었을 뿐더러 도덕적⋅현실적 관점에서 그 적합성에 대하여 설복될 수도 없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 안을 기각시켜야 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중략)

이상의 이유로 본인은 신탁 통치를 대신하는 다른 방안을 지지합니다. 한국의 실제적 조건으로 볼 때 해방된 민족이 그들의 정부 형태를 선택할 자유에 저촉될 수도 있는 모든 조치를 삼간다는 우리의 정책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지역에 거주하는 민중의 3/4 정도는 심각하게 정부를 구상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가 정부이므로 그러한 구상은 분명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손을 쓰지 않는 한 상황은 변화하지 않을 것입니다. 중경의 소위 임시 정부와 접촉하게 되는 것에 대한 우리의 경계심은 현재로서는 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김구 그룹은 해방된 한국의 최초 정부로서의 경쟁 상대가 전혀 없으며, 모든 세력과 정당들이 이를 반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정의 임박한 환국에 대한 환호가 만연되어 있으며, 대대적인 환영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김구가 누리고 있는 평가는 미국으로 하여금 거의 비방이나 원망이 있을 수 없는 건설적인 대한 정책을 추진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정책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령관은 김구에게 군정 내에 몇몇 정치 그룹을 대표하는 협의체를 구성하게 하여, 한국의 정부 형태를 연구해서 마련할 것과 행정 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지시한다. 군정은 이 위원회에 대하여 모든 편의와 조언, 운영 자금을 제공한다.

(2) 행정 위원회를 군정과 통합시킨다(신속히 전 한국적 조직으로 수립한다.).

(3) 행정 위원회는 군정을 계승하여 과도 정부가 되며, 사령관에게는 거부권과 함께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미국인 감독과 고문의 임명권만을 남겨 둔다.

(4) 나머지 관련 3대국에 대하여 미국인 대신 동 행정 위원회에 감독관과 고문의 일부를 파견해 주도록 요청한다.

(5) 행정 위원회는 국가 수반을 선출하는 선거를 실시한다.

(6) 선출된 국가 수반은 새로이 정부를 재조직하여 외국과 조약을 맺고 외교 사절의 신임장을 제정하는 한편, 한국은 국제 연합에 가입한다.

【(주: 이러한 변화 과정의 어디쯤에선가 아마도 (4)와 (5)의 중간쯤에서 소련 측과 양군 철수 및 행정 위원회 권한의 소련군 지역까지의 확대에 관한 협정을 조인한다. 상기 방안을 추진하면서 소련 측에도 통보해야 할 것이며, 협의체로 하여금 소련군 지역 내 인사를 행정 위원회에 임명하게 함으로써 권한을 확장시킬 수 있도록 소련 측에 대하여 서울을 방문하도록 초청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소련 측의 참여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38도선 이남의 한국에 대해서만이라도 동 방안이 실행되어야 할 것이다.)】

(하략)

(출처: 김국태 편, 『해방 3년과 미국 I』 돌베개, 150~152쪽)

다음으로 정무 위원회 구상은 남한의 정계 통합을 그 실현의 전제로 하였다. 미 군정은 이 무렵 한국인의 정치적 통합 필요성을 거듭 공개적으로 표명하였고, 특히 임정의 귀국이 다가오자 정치적 통합의 중심으로서 임정의 역할을 암시하였다. 랭던이 정무 위원회 구상을 상부에 전송한 시점은 김구가 귀국하기 사흘 전이었지만, 랭던의 예상은 김구로 하여금 정무 위원회의 모태가 될 정치 단체의 대표체를 조직하게 하는 것이었다. 랭던의 이러한 발상은 그 이전의 고문 회의 설치, 미 군정의 이승만⋅임정 활용 의사의 연장선상에서 미 군정이 우익 중심의 남한 정계 통합을 정부 수립의 전제 조건으로 인식하였고, 그 방향에서의 미 군정 활동을 인정받고자 하였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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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환영 시민 대회에서 하지에게 소개받는 이승만
연합군 환영 시민 대회에서 하지에게 소개받는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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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던 구상은 나름대로 군정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점에도 주목하여야 한다. 랭던은 미국인의 감독과 거부권을 전제로 군정을 한국인으로 점차 대체할 것을 제기하였다. 이 제안 역시 미 군정이 진주 이후 전직 관료⋅경찰, 친일파 및 한민당 인사들을 중심으로 통치 기구를 충원했던 조치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군정에 한국인들을 충원할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미 군정은 이후 이러한 조치를 군정의 ‘한국인화(Koreanization)’로 명명했다.

마지막으로 랭던 구상은 소련과의 관계에서 대단히 공세적인 자세를 드러냈다. 정무 위원회 구상은 ‘국가 수반을 선출하기 이전에 소련 측과 양군 철수 및 정무 위원회 권한의 북한으로의 확장에 관한 협정을 맺고, 회의체가 소련군 지역 내 인사를 정무 위원회에 임명할 수 있도록 위의 계획을 사전에 소련 측에 통지할 것, 만약 소련 측의 참여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38도선 이남에 대해서만이라도 이 계획이 실행되어야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소련과의 협의를 거치지 않은 미 군정의 선제적⋅일방적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미 군정은 소련의 협조를 구하지 못할 경우 남한만이라도 이 계획을 추진할 것이라는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2)

랭던 구상이 정무 위원회 권한의 북한으로의 확장을 통하여 분할 점령 상태를 해소하려 했다는 점은 ’SWNCC 79/1’과 ’SWNCC 101/4’가 상정한 ‘양군 점령의 통합’이나 ‘통일 행정 기구’ 설치 방침과도 맥이 닿아 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랭던 스스로 정무 위원회 구상이 위의 두 문서를 관련 근거로 하였고, 이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다만 그 통합의 주체에서 국무부안이 미 군정을 염두에 두었다면 랭던 구상은 정무 위원회가 군정을 대신하고 있다. 이러한 발상으로 보건대 미 군정은 남북 통합과 분할 점령의 해소를 미⋅소 군정의 점령 통치를 통합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미 군정은 미국이 주도하는 점령 통합과 통일적인 행정 기구의 설치를 점령의 목표로 인식하였고, 그 임무가 완수된 뒤 미군을 조속히 철수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 군정은 38도선의 철폐와 남북의 행정적⋅경제적 통합을 위한 소련과의 사전 협상을 상부에 여러 차례 제기하였다. 미국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한국 문제에 관하여 사전에 두 가지를 제안하였다. 그 하나는 신탁 통치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북한 통일 행정의 수립 문제였다.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미국의 이러한 초기 입장은 미 군정의 견해를 일정하게 반영한 것이었다. 미 군정은 미소 공위 개최 이전에 열린 미⋅소 양군 대표자 회담에서도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였고, 또 미소 공위 본 회담에서도 이 문제를 초기 입장으로 제시하는 등 이 문제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았다.

랭던의 정무 위원회 구상이 국무부 대한 정책 원안(原案)을 문서적으로 절충하는 형식을 취하였으나 발상과 구체적인 실현 방법에서는 국무부의 그것과 달랐다. 양자는 모두 미군의 남한 점령 상태를 행정적으로 북한에 연장함으로써 분할 점령 상태를 해소한다는 공세성에서는 동일했다. 하지만 국무부 구상이 이러한 통합 이후의 통치 주체와 통치 방법을 여전히 국제 민간 행정 기구와 신탁 통치에 두었다면, 랭던 구상은 한국인 정치 지도자들을 통한 과도 정부의 구성과 이에 대한 미 군정의 원조를 상정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정무 위원회 구상의 핵심은 미국이 이후 한국 정부를 장악할 정치적 대표 집단, 즉 한국인 권력 집단을 미리 구성하고 이를 육성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집단에게 미 군정의 정치적⋅행정적 권한을 일정하게 제공함으로써 정치적 대표성을 부여하자는 것이다. 미 군정은 정치적 대표 집단의 구성에서 가급적 광범한 세력의 참여를 희망하였으나, 여기에는 보수 세력의 주도권과 남한의 비례적 우세가 전제되었다.

동경과 서울에서 구상했던 ‘적극적인 조치’는 독립 이전 단계에서 군정을 지탱해 줄 뿐만 아니라 군정을 대신할 수 있는 한국인 ‘과도 정부’의 설치로 모아졌고, 정무 위원회 구상은 그것의 가장 세련된 형태였다. 정무 위원회 구상은 국무부가 제시하였던 국제 민간 행정 기구안을 부분적으로 참조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그와 다른 미 군정 나름의 과도 정부 수립 구상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구상에는 미 군정이 점령 이후 취했던 일련의 조치와 활동들이 전제되어 있었고, 또한 그 시점에서 미 군정의 국내 정치에 대한 대처 방향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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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당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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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무부는 미 군정의 과도 정부 수립 구상이 계속 발전되자 이에 제동을 걸었다. 국무부가 미 군정 구상에 반대하였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이 안이 신탁 통치하의 국제 민간 행정 기구 설치라는 국무부안에 어긋나며, 국무부가 유지해 왔던 국제적 해결 방식을 교란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미 군정의 제안은 소련과의 사전 협상을 고려하지 않았고, 한국인 정치 세력을 조기에 투입할 경우 정부 수립 문제에서 한국인들의 주도성을 일정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 미 군정이 정무 위원회의 핵심 세력으로 상정한 임정 인사들의 효용성에 대한 평가이다. 해방 이전부터 국무부는 이승만(李承晩)과 김구로 대표되는 임정 요인(要人)들의 국민적 대표성과 정치적 역량을 불신하였다. 게다가 국무부는 이전부터 임정의 정부 자격을 부인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국무부는 이들에게 대표성을 부여하면 다른 정치 세력들이 반발하여 정치 불안만 가중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미국이 이전에 유지하였던 공식적 입장에 비추어 볼 때, 미 군정의 구상을 공개적으로 추진한다면 현실적으로 내외 여론의 비판과 소련의 반대를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1)맥아더 사령부의 정치 고문 대리였던 애치슨은 공산주의 세력의 활동에 비추어 보건대 한국인들이 정부 기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2)정무 위원회 구상에 나타난 강경한 대소(對蘇) 자세의 해석을 둘러싸고 연구자들 사이에서 평가가 다소 엇갈리고 있다. 커밍스, 서중석, 도진순은 정무 위원회 구상에 나타난 대소 자세로 볼 때, 미 군정은 일찍부터 남한에 반소⋅반공 방벽을 쌓으려 한 것으로, 정무 위원회 구상은 사실상 단정안의 원형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반면 박태균은 정무 위원회가 우익 중심 정계 통합 구상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보다 강조하는 입장에서, 정무 위원회 구상은 신탁 통치 대 단정이라는 ‘전략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따라서 단정안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무 위원회 구상이 ‘남한만이라도 확보’하자는 소극적 입장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며, 오히려 구상의 특징은 정무 위원회의 권한을 이북으로 확장하려는 공세적 시도와 이러한 구상을 국무부와 소련 측에 강요하는 저돌성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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