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한반도 신탁 통치안
  • 3.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조선에 관한 결정’
  • 1) 점령 직후 주한 미군 사령부의 신탁 통치안 반대 입장
  • 사. 주한 미 군정의 반탁 입장과 과도 정부 구상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지는 정치적 의미

10월과 11월에 맥아더 사령부와 주한 미군 사령부가 고안한 일련의 정부 수립 구상은 끝내 국무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양자의 교섭 과정에서 몇 가지 주목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

먼저 지적할 것은 맥아더 사령부와 주한 미군 사령부를 중심으로 한 현지 반소⋅반공 분위기의 조기 결집이다. 맥아더 사령부는 미 군정 전 시기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점령 직후의 정책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맥아더 사령부는 점령 초기 한반도 내부 정세에 대한 정보 수집, 군정 요원 및 군정에 필요한 미국인 고문과 한국인 정치가들의 차출과 충원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미 육군 태평양 사령부는 모든 요원의 관할 구역 내 출입에 대하여 허가 권한을 가졌고, 해방 이후 자연스럽게 미국 동아시아 정책의 신경 중추가 되었다. 일본 항복 이후 태평양 사령부는 태평양 전역(太平洋戰域)과 중국 전구(中國戰區) 양쪽을 모두 관할하게 되었다. 태평양 사령부는 점령 초기의 응급 조치로 관할 구역 내에서 한국 문제 전문가들을 수배하여 미 군정에 파견하였다 1)

또 하지와 마찬가지로 맥아더 사령부도 해방 직후 자신들의 역할을 장차 미⋅소 대립에 대한 대비책의 마련에 두었고, 이 방향에서 해당 지역의 정세 추이를 살피고 있었다. 맥아더와 그의 측근들은 대체로 미국 내에서 전통적인 아시아 중시주의자들로 분류되는 동시에 격렬한 반공주의자들이기도 하였다. 점령 초기에 맥아더 사령부를 중심으로 결집하였던 세력들은 기존의 정책 목표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독자적 목표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존 노선의 수정과 새로운 접근 방법을 적용할 수 있을 만한 영향력과 인적 결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군부, 정보 계통, 전통적으로 아시아에 깊은 이해 관계를 가진 자본가 및 선교사 집단의 동향이나 이들의 한국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을 유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 정가에서 이들의 움직임이 중요해지는 것은 중국 정세가 격화되어 ‘차이나 로비’가 강화되는 1949년 이후로, 매카시즘이 풍미하던 1950년대에 들어 절정에 달했으나 이들의 활동은 그 이전부터 상당히 활발하였다. 또 이승만의 미국인 지지자들은 대체로 이들과 중복되었다.

다음으로 미 군정 구상의 현실적 출발점이 자신들이 실행하고 있던 우익 중심의 정계 개편 노력, 조직적인 우익 육성에 있었다는 점이다. 즉 시기에 따라 고문 회의, 임정, 이승만에 대한 강조점의 차이가 조금씩 보이기는 하지만, 미 군정 구상이 이들 한민당, 임정, 이승만 세력의 통합을 자신들의 정부 구상 실현의 전제로 하였음은 명백했다. 미 군정은 정무 위원회 구상에 보이듯이 임정 귀국 후에는 이승만보다 김구에게 기대감을 표명하였으나, 이 시기 미 군정의 구상은 양자의 통합 내지 이승만과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 이하 ‘독촉 중협’)를 매개로 한 정계 통합에 주된 목표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미 군정 구상은 소련의 반응 또는 소련과의 협상을 예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무부의 신탁 통치 구상을 부인했던 측면에서 도발적이었다. 국무부는 랭던의 정무 위원회 구상을 반대한다는 것과 한반도 신탁 통치가 미국의 공식 정책임을 미 군정에 거듭 환기시켰다. 또 국무부가 미 군정의 과도 정부 형태 구상에 거부감을 느꼈던 이유 중의 하나로 신탁 통치안을 다른 지역에 광범하게 적용하려던 국무부의 의도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미 군정은 이후에도 자신들의 반탁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모스크바 삼상 회의가 열리기 전후해서는 집중적으로 반탁 의사를 상부에 타전하였다. 이러한 반탁 입장은 모스크바 협정 타결 뒤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미 군정이 국무부의 신탁 통치안을 끝내 불신하였던 이유로 미 군정의 조숙한 반공주의와 국무부의 국제주의적⋅자유주의적 성향의 차이, 또는 양자의 대소(對蘇) 대응 전술의 차이가 일반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이유는 미 군정이 신탁 통치안으로는 남한의 급박한 정치적 상황에 대처할 수 없다고 판단한 데 있었다. 미 군정은 한국인들의 자주적인 국가 건설 열망을 무한정 부인할 수 없었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나름의 대안적 계획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계획은 한국인들의 독립 정부에 대한 열망을 일정 부분 만족시켜 주어야 했으며, 동시에 미국의 대한 정책에 대한 지지 기반을 마련할 수 있어야 했다. 미 군정은 자신들의 주도하에 한국인 ‘자문 기구’ 내지 ‘과도 정부’를 만들고, 이를 우익 세력 육성과 결합시킴으로써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국무부와 미 군정 사이에 노정된 갈등은 정책상의 근본적인 입장 차이를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대한 정책의 적용 방법을 둘러싼 마찰로서, 이러한 대응 방법의 차이에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이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매개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베닝호프(Merrell H. Benninghoff) 2) 나 랭던 등이 해방 이전 전후 기획 과정에서 신탁 통치안을 다듬는 데 참여하였으며, 이들은 모두 신탁 통치안을 지지하였던 인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미국이 공식적인 대한 정책으로 가다듬어 왔던 신탁 통치 구상은 적용 첫 단계부터 한국인들의 반발과 현지 집행자들의 재고 요청을 받았다. 이제 국제 민간 행정 기구안이든, 정무 위원회 구상이든, 구체적 정책은 미⋅소 간 교섭과 한국 국내 정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점령 초기 대한 정책의 적용 과정에서 명백해졌다.

1)해방 직후 군정청의 한국인 고위 관리를 채용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던 윌리엄스나 임정에 관한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하지에게 제출하였던 윔스의 예가 대표적이다. 윌리엄스의 부친은 공주 지방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고, 영명 학교를 설립한 사람이다. 윔스의 부친 역시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선교사였다.
2)베닝호프는 와세다 대학 강사로 일본에서 수십 년간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동아시아 사정, 특히 일본 사정에 정통하였다. 1945년 8월 24일 부임하였고, 1945년 10월 국무부와 협의를 위하여 본국에 돌아갔다가 12월 24일 재차 부임하였다. 1946년 3월 미국으로 귀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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