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한반도 신탁 통치안
  • 4.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
  • 1) 국내 언론의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 보도의 전말
  • 가. 미 군정의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 국내 최초 보도 경위에 대한 조사

1945년 말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의 한국 관련 내용이 국내에 보도되자 국내에서는 반탁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1945년 연말과 1946년 벽두부터 남한에 몰아닥친 반탁 투쟁의 열풍과 신탁 통치 논쟁은 남한 정치에 좌⋅우 대립이 확고히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기간은 해방 직후 정치사를 가르는 하나의 분기라고 할 수 있는만큼 세밀한 관찰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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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 통치 반대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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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해명해야 할 것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의 국내 전달과 확산 과정이다. 모스크바에서 ‘조선에 관한 결정’이 공식 발표된 것이 1945년 12월 28일 정오이니 이는 한국 시각으로 28일 오후 6시였고, 워싱턴 D.C 시간으로는 28일 새벽 4시가 된다. 주한 미군 사령부가 결정 내용을 워싱턴으로부터 공식 통보를 받은 것은 29일 오후였다. 하지만 이미 27일부터 국내에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이하 ‘삼상 회의’)에서 소련이 5년간의 신탁 통치를 주장했다는 오보(誤報)가 날아들어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이에 자극을 받은 한국인들의 신탁 통치 반대 여론이 비등하기 시작하였다. 신문 등 언론을 통하여 분출하기 시작한 반탁 열풍은 시위, 철시, 동맹 휴학 등 대중 운동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반탁 운동의 열풍에 미 군정도 아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군정청 공보부는 한국인의 여론 동정을 관찰하여 주간 단위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특히 삼상 회의 결정의 국내 전달 이후 반탁 투쟁이 절정에 달했던 연말 연시 며칠 동안에 대해서는 한국인들의 여론 동정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공보부는 그날 그날의 사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일지를 작성했고, 아래와 같이 하루 단위로 이름을 붙여 주었다.

<표 4-1-1>1945년 말⋅1946년 초 신탁 통치 파동 일지

날 짜 명 명 비 고
1945. 12. 28 오보의 날 결정적 오보는 하루 전에 있었고, 이날은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의
반탁 성명이 잇따름
1945. 12. 29 해명의 날 하지와 아놀드의 기자 회견, 한국인 정치 지도자들과 면담을 통하여
삼상 회의 결정의 진의를 설명하고 자제를 요청
1945. 12. 30 암살의 날 한민당 수석 총무 송진우가 암살당함
1945. 12. 31 우익 시위의 날 반탁 운동 최고조에 달함
1946. 1. 1 도전과 취소의 날 중경 임정의 정부 수립 운동이 미 군정 제지로 저지당함
1946. 1. 2 평온의 날  
1946. 1. 3 좌익 시위의 날  

(출처: 「정계 동향」(Political Trends) 15호, 1946. 1. 5)

미 점령군 사령관 하지는 반탁 소동이 지나간 후 삼상 회의 결정에 대하여 일찍 통고를 받았더라면 이러한 불쾌한 사건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국무부가 필요한 정보를 제때에 제공해 주지 않았다고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미 군정이 워싱턴으로부터 삼상 회의 결정 내용을 공식 전달받은 29일 이전까지는 미 군정도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외국 통신사의 보도를 통하여 삼상 회의 결정을 접했다고 한다. 하지는 특히 UP 통신과 AP 통신의 28일자 오보를 지적하였다. 또 하지 장군과 군정 장관 아놀드는 29일 기자 회견과 정치 지도자 영수 회담을 열어 한국인을 진정시키는 한편 언론의 오보를 지적하면서 삼상 회의 결정 내용을 해설해 주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미 군정은 반탁 열기의 폭발적 분출에 매우 당황하였다. 오보 사건 발생 이후 주한 미군 사령부 정보부와 군정청 공보부 등, 미 군정 각 부서는 한국인 정치 지도자들의 동정과 여론 동향을 예의 추적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신탁 통치안의 국내 전달이 몰고 온 소동의 전말에 관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1) 이 보고서 역시 미 군정 당국을 오보의 희생자처럼 묘사하였다.

미 군정은 한국인들의 반탁 열기에 당황하면서 1945년 연말과 1946년 벽두를 긴장 속에서 보냈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것은 미 군정이 워싱턴을 향하여 자신들을 오보의 희생자처럼 주장하면서도 정작 어떻게 그런 오보가 가능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추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그 오보가 전달된 뒤 반탁 운동이 조직되고 반탁 열기가 대중들 사이에 전파되는 속도가 미 군정을 긴장시킬 만큼 신속하고 광범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국내에 반탁 운동의 열기를 몰고 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삼상 회의 한국 관련 내용에 대한 『동아 일보』와 『조선 일보』의 1945년 12월 27일자 머리기사이다.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서가 공식 발표된 것이 서울 시각으로 12월 28일 오후 6시이므로 이 기사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서가 발표되기 하루 전, 그러니까 주한 미군 사령부가 결정서를 입수하기 이틀 전에 발표된 이른바 관측 보도이다. 아래의 인용문은 그 기사의 전문이다.

〔사료 3-2-01〕 1945년 12월 27일자 신문 기사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 회담을 계기로 조선 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을까 하는 관측이 농후해지고 있다. 즉 번즈 미 국무 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 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는 훈령을 받았다고 하며, 삼국 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미국이 ‘카이로 선언’에 따라 조선은 국민 투표로써 그 정부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것에 비하여,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 통치를 주장하여 38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 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워싱턴 25일발 합동 지급보(至急報).

(출처: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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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 오보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 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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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 당시 미⋅소 양측의 입장과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결정서의 내용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이른바 왜곡 보도이다. 이 기사는 반탁 운동을 격화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며칠간 모스크바 삼상 회의와 그 결정 내용에 대한 국내 신문의 보도 태도와 그 방향을 결정하였다. 당시 외신을 취급하던 국내 주요 통신사로는 합동 통신(合同通信)과 조선 통신(朝鮮通信)이 있었다. 합동 통신(KPP, Korean Pacific Press)은 우익 성향이었고, 외신 제휴사는 AP(Associated Press) 통신이었다. 조선 통신의 외신 제휴사는 UP(United Press) 통신이었다. 조선 통신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을 빨리 보도하지 않았다 하여 좌경사(左傾社)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고 한다.

모스크바 결정이 국내로 처음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 왜곡 보도에 대해서는 당시부터 국제적 모략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이후 일부 연구자들은 배후가 있었거나 최소한 당시 언론 기관을 통제하던 미국의 고의적인 ‘방조’가 있었을 것으로 분석하였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정황적 근거에 입각한 주장 차원에 머물고 말았지만, 최소한 기사의 출처와 취재⋅전달 과정을 추적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이 의혹을 해명하는 것은 미소 공위에 임하는 미국의 태도와 입장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군정청 공보부가 간행하였던 「정계 동향」 14호(1945. 12. 29)는 ‘미국이 즉시 독립을 원한 반면 소련은 신탁 통치를 주장하였다는 합동 통신사(KPP)의 기사 배포가 강력한 반소 감정을 일으켰다.’고 적었는데, 이 내용은 신탁 통치 소동을 정리한 미 군정의 보고서 「신탁 통치(Trusteeship)」 초고에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또 이 원고의 수정 원고와 최종 원고는 이 문장 앞에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성조기(Stars and Stripes)』 12월 27일자에 번즈 미 국무 장관은 소련의 신탁 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고 모스크바로 향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 다음 날 합동 통신사는 미국이 즉시 독립을 원한 반면 소련은 신탁 통치를 주장했다는 기사를 전파하였다.’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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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성조기』
『태평양 성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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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7일 동아 일보 기사의 출처를 구체적으로 지목한 것으로는 이 「신탁 통치」라는 보고서의 수정 원고와 최종 원고가 유일한데, 후일 미 육군부 군사처(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의 요청으로 호그(Leonard C. Hoag) 박사가 집필한 『주한 미 군정사(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War Policy and the First Year of Occupation, 1941∼1946)』도 이 서술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보고서 「신탁 통치」의 수정 원고와 최종 원고는 합동 통신사가 오보 내용을 전파했다는 서술의 전거로 「정계 동향」 15호를 들었는데 이는 14호의 오기(誤記)이다. 호그 박사의 『주한 미 군정사』도 이러한 오류를 반복한 것으로 보아 호그 박사는 「정계 동향」을 보고 위 내용을 집필한 것이 아니라 「신탁 통치」의 수정 원고나 최종 원고를 보고 집필한 것이 틀림없다.

즉 『동아 일보』 오보 기사의 출처와 국내 전파 과정을 미국 측 문헌을 통하여 정리하면,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 대한 오보가 국내에 전달된 직후 미 군정청 공보부 정보 보고서 「정계 동향」이 오보의 국내 전파자로 합동 통신사를 지목하였고, 이후 주한 미군 사령부 군사관의 한 명으로 보이는 「신탁 통치」 집필자가 ‘비공식’이라는 전제를 달아서 『성조기』를 오보의 출처로 지목하였다. ‘성조기’는 미 육군이 해외에 근무하는 미군들을 위해 발행하는 군인 신문이다.

『동아 일보』 27일자 기사의 출처가 국제 통신사가 아니라 『성조기』였다는 지적은 이 오보 소동이 모략이었다면 그 모략의 주체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다. 『동아 일보』 오보를 모략이라고 주장했던 논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오성은 이를 “국제적 통신 기관이 오랫동안 준비하여 착수한 모략”이라고 주장하였고, 또 다른 인물인 강대호는 “일 통신 기자의 모략적 관측 보도”라고 명명했지만 만약 기사의 출처가 ’성조기’라면 모략의 주체가 ‘일 통신 기자’나 ‘국제적 통신 기관’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동아 일보와 조선 일보의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 관한 ‘조선에 관한 결정’이라는 기사는 발신지가 워싱턴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그 취재원은 일본이 틀림없다. 미 군정 보고서 「신탁 통치」는 기사 출처로 『성조기』를 지목하였지만 필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 기사의 출처는 태평양 방면 미국 군인들을 위하여 일간으로 발행하던 『태평양 성조기(Pacific Stars and Stripes)』 12월 27일자였다.

보통 외국 통신사가 보내 오는 외신 기사는 ‘발신지, 보도일자, 발신사, 수신사’를 밝히는 것이 관행인데, 합동 통신사가 발신사를 밝히지 못한 것은 이 기사를 워싱턴의 통신사로부터 수신한 것이 아니라 『태평양 성조기』에서 2차적으로 인용했기 때문이다. 동아 일보 기사는 ‘워싱턴 25일발’로 되어 있고 발신지를 워싱턴처럼 보도하였으나, 발신사나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았다.

『태평양 성조기』는 12월 27일, ’평화 협정 체결에 가로놓인 난관을 종식시키기를 희망한다.’라는 제목으로 1면 우측 상단에 외신 종합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의 주요 관심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유럽 평화 협정이 타결될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고, 한국 관련 기사는 이 내용의 중간에 한 단락 끼여 들어 있다. 『태평양 성조기』는 한국 관련 기사를 쓴 사람이 UP 통신의 랄프 헤인젠(Ralph Heinzen) 기자라고 구체적으로 지목하였다. 앞의 동아 일보 기사는 『태평양 성조기』 기사의 한국 관련 내용을 그대로 전재 번역한 것이다.

필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랄프 헤인젠의 기사는 미국의 유력 일간지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월 스트리트 저널 등 어디에서도 취급되지 않았다. 『뉴욕 타임즈』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가 열리는 기간 동안 AP 통신이나 UP 통신을 통하여 회의 진행 경과와 회담장 주변 동정, 번즈 미 국무 장관, 베빈 영 외상, 몰로토프 소 외상의 일정과 반응을 차분하게 전하였을 뿐이다. 또 모스크바 삼상 회의 개최 하루 전인 12월 15일 런던 발 기사로 삼상 회의의 주요 의제들과 논점들을 점검하면서 포괄적인 협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였고, 12월 23일 일요일 판에는 ’미해결 과제들이 유럽의 지평선을 덮고 있다.’는 제하에 전후 유럽의 미해결 과제들이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해결될 수 있을지 우려 섞인 전망을 담은 장문의 해설 기사를 내보냈다.

1)이 보고서는 2차 대전 중 신탁 통치안이 강대국간에 논의되었던 과정, 신탁 통치안 및 모스크바 결정의 국내 전달 과정, 이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응, 미소 공동 위원회 논의에서 미⋅소 간의 접근 방법과 견해 차이 등을 주요 서술 내용으로 하고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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