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한반도 신탁 통치안
  • 4.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
  • 1) 국내 언론의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 보도의 전말
  • 라.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의 남한 내 보도에 대한 미국의 반응과 태도

이 기사가 국내의 통신사와 신문사를 통하여 그렇게까지 신속히 확산된 것은 미 군정이 방조와 묵인 이상으로 깊이 개입하였으리라는 추측에 무게를 더한다. 당시 미 군정은 엄격한 검열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고, 미 군정은 빈센트의 신탁 통치 발언 이래 신탁 통치 문제가 남한 정치에서 가지는 가연성(可燃性)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재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미 군정은 이전부터 신탁 통치가 국내 정국에 미칠 파장을 우려하며 신탁 통치라는 용어 대신 다른 용어를 사용할 것과, 나아가 신탁 통치 구상 자체의 변경을 본국에 요청하였다. 하지의 시도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까지 계속되었으나, 신탁 통치 자체의 수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태의 전개를 예의 주시하던 미 군정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가 막바지에 접어들자 미국 측이 신탁 통치안을 제안했다는 사실이 가져올 정치적 곤경을 예상하고, 미국에 쏟아질 비난의 방향을 소련으로 돌리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는 이후 타스 통신이 모스크바 회담에서 신탁 통치 제안자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공개하자, 국무부를 향해 제때에 필요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며 강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국무부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 참석한 미국 대표단에게 하지의 요청을 그때그때 전달하였고, 따라서 하지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 임하는 미국의 입장을 사전에 숙지하고 있었다며, 하지의 불평에 대하여 오히려 불쾌감을 표시하였다. 정작 하지가 놀란 것은 삼상 회의 결정이 미국 측 원안과는 다른 방향으로 타결되었다는 점이었다.

미 군정은 반탁 운동이 격화되자 이에 따른 국내 정세의 격화에 대하여 상부에 우려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미 군정은 국무부에 모스크바 결정의 정문(正文)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을 뿐, 『동아 일보』 왜곡 보도의 진위를 확인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미 군정은 이 왜곡 보도를 해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미 군정은 이 무렵 한국에 신탁 통치를 강요하고자 한 것은 소련이며 따라서 소련이 비난받아야 한다는 믿음을 한국인들 사이에 심어 주려 노력하였고, 국무부도 비슷한 태도를 취하였다.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과에 대하여 미국 언론에서는 ‘포츠담 선언을 옹호하려는 번즈의 노력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포괄적인 성과를 얻었다.’고 평하였으나, 소련에게 너무 많은 양보를 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미국 재계의 입장을 예민하게 반영하는 『월 스트리트 저널』은 삼상 회의를 전체적으로 논평하면서 일본의 점령 관리에 소련의 참여 기회를 확대한 것은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한국과 중국에 관한 협정은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평가하였다. 반면 트루먼은 번즈에게 ”우리는 소련과 더 이상 타협해서는 안 된다. …… 우리는 중국을 부흥시키고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한국에서도 똑같이 해야 한다. 나는 소련을 달래는 데 지쳤다.”고 말하면서 소련에 대한 보다 강경한 태도를 주문하였다. 미국의 주소 대사 해리만과 대리 대사 캐넌도 대소 강경 입장에 동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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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캐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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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정은 삼상 회의 결정 내용 자체에 대해서보다는 삼상 회의 결정 전달 과정을 문제 삼아 국무부에 불만을 표시했지만 사실은 결정 자체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는 삼상 회의 결정의 국내 보도 이후 국무부 조치에 대하여 강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그가 가진 불만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그의 신탁 통치 반대 의견이라든가 그 나름의 과도 정부 수립 구상이 무시되었다는 점이지만, 국무부가 충분한 사전 협의나 정보 전달 없이 원래의 미국 측 안과도 다른 결정을 해 버렸다는 점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국무부에 대한 그의 불만 표출은 점령 지역 사령관으로서는 무례하다 싶을 만큼 몇 차례에 걸쳐 집요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는 1946년 1월 2일 국무부가 삼상 회의 결과를 조기에 알려 주었더라면 한국인의 격렬한 반탁 운동과 같은 불유쾌한 사태를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불평을 늘어놓았고, 향후 국무부 뉴스 발표에는 신탁 통치의 ‘신’ 자도 꺼내지 말고, 한국인들로 하여금 그것을 잊도록 해 줄 것을 주문하였다. 하지는 이 문제가 다시 재발한다면 나는 더 이상 한국에 머물고 싶지 않다는 강경한 입장을 국무부에 전달하였다. 하지는 또 1월 내내 미⋅소 협상에 본인이 직접 연루되는 것을 꺼리면서 미소 공동 위원회의 협상을 전담할 고위 외교관이나 군부 대표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즉 하지는 자신이 이전부터 주장하였고, 삼상 회의 결정 4항이 요청하는 남북 간 교류와 통일을 위한 경제⋅행정 회담은 자기 책임하에 진행하겠지만, 임시 정부 구성과 관련한 정치 회담은 국무부를 대표하는 고위 관리와 육군부를 대표하는 고위 장군이 떠맡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는 정치 회담이 그 자신보다는 정부 간 교섭에 의하여 소집되도록 해 줄 것을 거듭 요청하였다.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에 대한 미국 내 비판과 현지 점령군 사령관의 불만을 의식하기라도 하듯 번즈 국무 장관은 12월 30일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조선의 신탁 관리가 불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였으며, 미 군정은 남한 언론을 통하여 번즈의 이러한 언급을 되풀이해서 강조하였다. 신탁 통치의 의미 자체를 축소하거나 부인하는 이러한 태도 때문에 번즈와 하지는 후일 1차 미소 공위가 무기 휴회된 뒤, 미국의 일부 언론으로부터 회담 결렬의 책임자로 지목되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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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즈 국무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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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정은 모스크바 결정의 국내 전달 이후 야기된 반탁 선전과 반탁 운동을 방조함으로써 그것이 남한 정치에 미치는 효과를 충분히 활용하였다. 즉 우익의 반탁 운동이 반소 여론을 조성하고, 남한에서 우익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는 한 미 군정에게 결코 해로울 것이 없었다. 이를 적절히 이용만 한다면 미래의 회담에서 미국 입장을 강화해 줄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반탁 소동으로 빨갱이와 백파가 균형을 이루게 되었고, 양쪽이 다 우리에게 도와 달라고 우는 소리를 하게 되었다.”는 하지의 지적처럼 우익은 반탁 운동으로 좌익과의 세력 불균형을 일시적으로 만회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지의 지적이 암시하듯이 이러한 사태는 미 군정으로서도 바람직한 것이었다.

〔사료 4-1-01〕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의 국내 보도가 초래한 소동에 대한 하지의 평가

군단 참모 회의(Corps Staff Conference)

하지 장군이 한국의 상황을 요약하는 것으로 회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한국인의 전쟁(Korean War)’이 끝났다고 느꼈다. 김구는 지난 밤에 라디오에 나와서 싸움은 군정과 벌인 것이 아니라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모든 적대 행위를 끝내고 직장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했다.

하지 장군은 이에 앞서 그가 라디오에서 (연설할) 한국과 한국의 지도자들에 대한 매우 강력한 경고장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이 방법을 사용하기 전에 그는 김구를 불러들였고, 그를 두 시간하고 반 동안이나 호되게 꾸짖었다. 이는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하지는 김구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30분을 더 써야 했다. 김구가 장군의 격노로 납작하게(so flatly) 짓밟혔기 때문이다(한 참모 장교가 귀띔하기를 5분간 이어진 하지의 독설은 보통 사람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김구는 그의 모든 간부들을 데리고 한국을 떠날 것과 자살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하지 장군이 그를 정상에 가깝게 돌려놓았다. 김구는 라디오 연설을 하는 데 동의했다. 하지는 그에게 “나를 배신한다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기도 했지만, 김구는 배신하지 않았다.

하지 장군은 빨갱이들이 소란을 이용한다고 지적했다. 소란이 가져온 흥미로운 사실은 빨갱이와 백군(white force)의 균형이 얼추 맞게 되었고, 양쪽 모두 “우는 소리”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분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균형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번즈 국무 장관의 방송은 한국인들의 체면을 살려 주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명백히 그들의 불만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은 하지의 말을 듣지 않으려 했었다. 그러나 신탁 통치가 실시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발언은 미국 정부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출처: “Corps Staff Conference,” 1946.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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