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한반도 신탁 통치안
  • 4.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
  • 2) 반탁 운동의 격화와 우익 내부의 동향
  • 나. 반탁 운동을 이용한 임정 측 정부 수립 운동의 좌절

하지 장군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 전달 이후에도 반탁 입장을 견지하였지만 공개적으로 반탁을 지지할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새로운 논리의 개발이 필요했으며, 따라서 그의 반탁 입장을 은밀히 개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 군정이 반탁 운동을 무한정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 군정은 반탁 운동이 군정에 대한 반대 운동, 또는 좌⋅우 어느 정치 세력이든 한국인들의 이니셔티브에 의한 독자적인 정부 수립 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 점은 미소 공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분석할 때 간과해서 안 될 것 중의 하나이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은 1945년 말의 반탁 운동을 임정 법통론(臨政法統論)에 입각한 정부 수립 운동으로 연결시켰다. 이후 우익의 임정 추대 운동은 항상 반탁 운동과 연결되어 실행되었다. 삼상 회의 결정이 국내에 알려지자 임정의 주도로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가 결성되었다. 이 위원회의 9개조 ‘행동 강령’에는 ‘임정의 절대 수호’와 ‘외국 군정 철폐’ 요구가 들어 있으며, 이 위원회의 주관으로 열린 12월 31일의 반탁 시위 대회에서는 “3천만 전 국민이 절대 지지하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우리의 정부로서 승인함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미 군정 정보 보고서 「정계 동향」이 ‘우익 시위의 날’로 명명했듯이 12월 31일의 반탁 운동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날 국민 총동원 위원회는 전국 총파업을 결의하였고, ‘국자(國字) 1⋅2’호 포고를 발표하여 정권 접수를 선언하였다. 중경 임정의 내무부장 신익희는 국자 제1호와 제2호 포고문에서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 기구 및 한인 직원은 전부 본 정부 지휘하에 예속하게 함”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시도에 적잖이 당황한 미 군정은 임정의 기도를 쿠데타로 규정하면서 단호한 태도로 저지하였다. 하지는 1946년 1월 1일 김구를 만나 임정의 기도를 저지시켰다. 하지는 자살하겠다고 날뛰는 김구를 겨우 진정시켜, 반탁 시위가 군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신탁 통치에 반대하기 위해 행해졌음을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밝히도록 설득하였다. 1월 1일의 면담 자리에서 하지는 “나를 속이면 죽여 버리겠다.”고 김구를 위협하였다. 면담 직후 김구를 대신하여 임정 선전 부장 엄항섭은 방송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파업을 중지하고 일터로 돌아갈 것을 요청하였다. 엄항섭은 자신들의 행동은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것이지 군정에 반대하는 것이 아님을 천명하였다. 반탁 운동의 절정에서 경찰 장악을 통하여 과도 정부를 수립하려던 임정의 기도는 결국 라디오 방송을 통한 정부 수립 선언이 발각되고, 미 군정이 경찰과의 접촉을 저지함으로써 무위로 돌아갔다. 임정은 방송을 통하여 미 군정의 체면을 세워 주었고, 미 군정 역시 장래 유용하게 이용할 수도 있는 임정 지도자들의 체면을 더 이상 손상시키지 않는 선에서 그들의 기도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 일화에서 주목할 것은 하지가 김구를 위협하면서 강조했던 내용이다. 하지는 반탁 운동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반탁 운동이 미 군정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홍보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미 군정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임정의 법통성과 정부로서의 위상을 더 한층 단호하게 부인하였다. 미 군정은 이후 ‘임정의 해체와 새로운 정당으로의 재편’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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