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잡록(雜錄)⋅필기(筆記)류 자료를 통해 본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4. 천민들의 삶
  • 2) 천민 취급을 받았던 재인과 백정

조선 시대에는 천인은 아니었지만 천인 취급을 받았던 이들이 있었다. 조례(皂隷)⋅나장(羅將)⋅일수(日守)⋅조졸(漕卒)⋅봉수군⋅역졸(驛卒) 등 이른바 ‘신량역천(身良役賤)’층이 그들이다. 이들은 신분상으로는 양인이었지만 하는 일이 천하다고 하여 천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보다 더 천하게 여겨진 부류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백정(白丁)이다.

백정은 본래 고려 시대의 재인(才人)과 화척(禾尺)을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대에 하나로 합쳐서 부른 이름이다. 고려 시대의 재인과 화척은 유랑 생활을 하던 존재로 천인 취급을 받았다. 조선 정부는 이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통합하기 위해 천하게 불리던 재인이나 화척 대신에 고려 시대의 일반 백성을 뜻하는 백정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아울러 백정들에게 호적을 만들어 주고 평민과 섞여 살게 하는 등의 조치도 취하였다. 이렇게 하여 백정호적을 갖게 되었고 신분상으로는 양인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조치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그들을 ‘신백정(新白丁)’이라 부르며 계속 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반이나 관료들은 노비처럼 멋대로 부리기까지 하였다.

백정에 대한 법제적인 규제도 다시 강화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재인이나 백정을 집단적으로 거주시켜 관리하고 거주지를 마음대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백정은 재인과 화척의 합칭이지만 『경국대전』에 ‘재인과 백정’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 화척만 백정으로 불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능에 종사하는 재인과 도살업을 담당하던 화척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자연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재인이나 백정이 거주지를 떠나 생활하는 것은 불법이었지만 일정한 주거 없이 떠돌아다니며 활동하는 이들이 많았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는 재인이나 광대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구걸을 하거나 때로 도둑질을 하는 등 폐해가 심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때문에 정부에서는 재인이나 백정들이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것을 철저히 단속하도록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재인과 백정 가운데 특히 재인은 직업의 특성상 유랑 생활에 더 적합하였다. 이들은 다양한 연예 활동을 벌였겠지만 그러한 상황을 보여 주는 자료는 많지 않다. 다음은 재인의 한 부류인 사당패에 대한 자료이다.

〔사료 4-2-01〕

나라의 남쪽에 무당 같으면서 무당이 아니고 광대 같으면서 광대가 아니고 거지 같으면서 거지도 아닌 자들이 무리 지어 다니면서 음탕한 짓을 한다. 손에 부채 하나 들고 그때그때 놀이를 하고 남의 집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다니면서 옷과 음식을 구하니 그들을 방언으로 ‘사당(社堂)’이라고 한다. 그 우두머리를 거사(居士)라고 하는데 거사는 단지 작은 북을 울리며 염불만 한다. 사당패 여자는 노래와 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잘 꾀는 것을 능사로 하여, 대낮에 사람 많은 가운데서도 입술을 깨물고 손을 잡고 온갖 방법으로 돈을 요구하는 것을 태연하게 자행하여 얼굴을 붉히지도 않는다.

이옥(李鈺, 1760~1812), 『봉성문여(鳳城文餘)』, 「사당(社堂)」

사당패에 소속된 여성들이 가무는 물론 매춘 행위까지 했던 상황을 볼 수 있다. 때문에 위의 글을 쓴 이옥(李鈺, 1760~1812)은 사당패에 대해 “생명을 가진 무리 가운데 가장 추잡하고 더러워 천륜과 인도를 상하게 하는 것이 이 무리보다 더한 자들이 없으며 아무리 암내 내는 돼지라 하더라고 하지 않을 그런 짓을 많이 한다.”고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기도 하였다. 이옥에 따르면 정부에서 사당을 적발하는 대로 관비(官婢)로 만들자 사당들은 숨어 지냈다고 한다. 사당패에 대한 자료가 드문 것도 이러한 비밀스럽게 활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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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사계풍속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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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근, 「풍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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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화척의 후예인 백정들은 재인들과는 달리 마을에 거주하며 도살이나 유기(柳器) 제조 등에 종사하였다. 유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유기의 우리말인 ‘고리’를 붙여 ‘고리백정(古里白丁)’이라고도 불렀다. 이들 백정은 다른 마을 사람들로부터 심한 멸시를 받았다. 1809년(순조 9) 개성부의 한 백정이 혼인을 하면서 관복(冠服)을 입고 일산(日傘)을 받쳤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관복을 빌려 준 사람을 난타하고 백정의 집을 부순 후 개성부에 호소한 사건은 백정들의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잘 보여 준다. 마을 사람들은 심지어 관청에서 그 죄를 엄히 다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개성부 건물에 돌을 던지며 소란을 피우기까지 하였다.

백정은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지만 그들도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다음은 백정에게 사형수 처형을 맡긴 데 대해 백정들이 집단적으로 불만을 표출한 사건에 대한 자료이다.

〔사료 4-2-02〕

윤구종(尹九宗)이 대역죄에 걸려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은 으레 사형수를 쓰는데, 마침 그가 죽어 백정으로 대신 쓰려고 6명을 가두어 대기시켰다. 그런데 윤구종이 지레 죽는 바람에 그 백정들을 풀어 주니, 그들이 곧바로 남산(南山)으로 올라가 봉화를 올려 고의로 사죄를 범하면서까지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상이 군문(軍門)에 명하여 군대 훈련 날을 기다려 백정들을 심하게 매질하게 하고는 외딴 섬의 노비로 보냈다. 그러자 많은 백정들이 백사장에 모여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와서 전송하니 그 수가 거의 500명이나 되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청성잡기(靑城雜記)』

윤구종은 1792년(정조 16) 경종 비 단의왕후(端懿王后)의 능을 지날 때 “노론경종에게 신하의 의리가 없다”고 말하며 말에서 내리기를 거부하였던 골수 노론이다. 이 때문에 문제가 되어 친국을 받았고 국문을 받는 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윤구종의 처형을 위해 백정들이 차출되었으며 백정들이 그에 불만을 표시하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성대중의 아들 성해응(成海應, 1760~1839)에 따르면 백정 가운데 고리백정소를 잡는 백정보다 더 천시받았고 그 때문에 주현에서 사형시킬 죄수가 있으면 그들에게 형 집행을 맡기기도 하였다고 한다.(『연경재집』 권59, 「楊禾尺」) 자료에 나오는 백정고리백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부당한 처사에 맞섰던 데서 백정들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백정들의 그러한 모습은 다음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사료 4-2-03〕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한 자는 백정이다. 그렇지만 가장 두려워할 만한 자도 백정이니, 그들이 가장 천하기 때문이다. 문경의 공고(工庫)에 소속된 종이 백정을 구타하였는데, 백정이 죽자 재판을 하여 그를 사형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관아에서 종의 편을 들까 염려한 나머지 온 군내의 백정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칼날을 세우고 몰려와서는 마치 자신들의 원수를 갚듯이 하여, 기어이 직접 그의 사지를 갈가리 찢어 버리겠다고 관문에서 시끄럽게 굴었다. 이에 관아에서 간곡히 타이르니 그제야 돌아갔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청성잡기(靑城雜記)』

지방 관아에 소속된 종이 백정이 구타를 당해 죽이는 일이 발생하자 백정들이 억울하게 죽은 동료를 위해 집단행동까지 불사했던 것이다. 관노비에게 맞아 죽을 만큼 백정의 처지는 열악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출하고 있었다. 관아에서 백정들을 간곡히 타이르고서야 소란이 겨우 진정될 수 있었다고 한 데서 볼 수 있듯 백정들의 기세는 만만치 않았다. 최성환(崔瑆煥, 1813~1891)은 『고문비략(顧問備略)』에서 “지방의 부상청(負商廳)⋅고공청(雇工廳)⋅화랑(花郞)⋅재인(才人)⋅역촌(驛村)⋅백정촌(白丁村)의 부류가 서로 단합해 곳곳에서 봉기하여 사사로이 법령을 집행하고, 마을에서 판을 치고 고을에서 권세를 부리며 힘으로 지방 장관을 굴복시키곤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성환은 그런데도 관청에서는 무리들이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늘 달래기만 한다고 비판하였다. 하층민들이 결집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적극 개진하고 있던 상황을 잘 보여 주는데 백정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백정들의 의식이 변화했다고 해서 당장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결국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자유의 신분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사회적 차별은 여전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사회적 차별에 저항하는 운동을 벌여 나가야 했다. 조선 시대에 백정은 가장 긴 고난의 길을 걸었던 부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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