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형정풍속도(刑政風俗圖)를 통해 본 조선의 형정(刑政)
  • 4. 형정풍속도의 내용과 특징
  • 2) 고문의 내용과 특징
  • 다. 압슬형

조선 시대 신장과 곤장 이외에 죄인의 자백을 받기 위한 방법으로 동원된 또 다른 고문 방법으로 압슬형(壓膝刑)이 있다. 이는 신장처럼 회초리로 때리는 대신 몸무게를 이용해 정강이를 짓누르며 고통을 주는 고문이다. 조선 시대 압슬형은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대부터 신장과 함께 사용되었던 기록이 보인다. 즉 원경왕후의 동생 민무회(閔無悔)가 세자에게 불충한 사건으로 신문을 받게 되었는데, 태종은 그에게 처음에는 두 사람을 동원해 압슬을 가했지만 승복하지 않자, 추가로 두 사람을 더 동원했더니 승복했다는 사실에서 그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1417년(태종 17) 압슬형은 십악(十惡)과 강도⋅살인 등 사용 죄목이 규정되었고, 그 방법도 1차에 2명, 2차에 4명, 3차에 6인으로 처벌 대상과 절차가 마련되었다. 일반적으로 압슬형은 죄인을 무릎 꿇린 채 판자를 얹고 사람이 올라가 짓눌러 무릎과 정강이를 고문하는 방식이었는데, 〈도30〉처럼 죄수의 허벅다리에 판자를 얹고 그 위에 포졸이 올라서 압박하는 방식도 더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그림의 제목으로는 올라간 사람이 양쪽을 널뛰듯 번갈아 밟는 형태로 시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경우 의자에 걸터앉은 것이 맨바닥에 무릎을 꿇리는 것보다 덜 고통스러워 보이기도 하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압슬은 압사(壓沙)라고 칭하였는데, “사금파리를 깨뜨려 깐 다음, 사람을 그 위에 꿇어앉히고, 무거운 돌로 누르면서 밟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조선 후기 압슬형은 다양한 수단이 동원되어 좀 더 가혹해졌는데, 〈도31〉, 〈도32〉, 〈도33〉 등과 같이 바닥에 방두(쌀되) 또는 수키와 등을 놓고 죄수를 그 위에 무릎꿇림과 동시에 그의 웃옷을 벗기거나 심지어 발가벗긴 채 회초리나 닥장 등으로 등과 허벅다리를 때리며 신문을 하고 있다.

1594년(선조 27) 역적모의로 공초(供招)를 받았던 오원종의 경우는 낙형(烙刑)을 받은 후 압슬과 회초리형을 추가로 받았지만 모두 참아내 주변을 놀라게 했던 예외적인 사례도 있지만, 통상적으로 죄인에게 압슬형을 가한 상태로 장형이 추가되면 죄인이 참지 못하고 실토할 정도로 가혹했다고 한다. 이처럼 압슬형은 주로 정치범에 대한 고문으로 사용되었는데, 영조는 “율문에도 없고 다른 어떤 형벌보다 참혹하다.”며 압슬형을 폐지하였고, 이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압슬형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위 그림처럼 상상을 초월한 방식으로 변형되어 은밀히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더 많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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