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로 본 한국사
  • 형정풍속도(刑政風俗圖)를 통해 본 조선의 형정(刑政)
  • 4. 형정풍속도의 내용과 특징
  • 2) 고문의 내용과 특징
  • 마. 낙형

낙형(烙刑)은 단근질 또는 포락형(炮烙刑)이라 불린다. 왕용쿠안(王永寬)의 『혹형, 피와 전율의 중국사』에 따르면, 중국 은나라 주왕이 총애하던 비(妃) 달기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고심하다 달아오른 구리 그릇에 기어오른 개미가 바동거리는 것을 보고 착안해 그곳에 개미 대신 사람을 올려 그녀의 웃음을 찾아준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대 승려 해봉을 불에 달군 쇠막대로 발을 단근질한 김집을 오히려 처벌한 것으로 보아 비공식적이지만 낙형이 조선 초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 대까지 낙형은 상전이 자신의 노비를 사사로이 고문하는 방법으로 간간히 사용되었지만, 공식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부터 낙형은 역모자를 심문하는 고문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는데, 집권 초반에는 그도 낙형의 사용을 자제한 듯했지만, 점차 주된 고문 방식으로 일반화되었다.

낙형은 1733년(영조 9) 전격적으로 폐지되는데, 그 계기는 다음과 같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종기 치료를 위해 뜸 처방을 받은 후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사료 4-2-5-01〕

“뜸뜬 종기가 점차 견디기 어려움을 깨닫고, 이어 무신년 국문할 때의 죄수의 일을 생각하면 나도 몰래 마음에 움직임이 일어난다. ”

(『영조실록』 9년 8월 22일(庚午))

그가 직접 종기를 뜸뜰 때 느껴본 뜨거움이 무척 고통스러웠던 모양이다. 결국 영조는 “법을 벗어나 통쾌한 승복을 받더라도 휼형(恤刑)에는 흠이 된다.”하며 낙형을 폐지하였다. 그러나 낙형이 폐지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역옥에 대한 국청에서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낙형은 포도청이 도적을 다스릴 때나, 호세(豪勢)를 부리는 양반이 도망가거나 물건을 훔친 노비를 추심할 때 여전히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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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40〉 김윤보, 족지구지(足指灸之), 『사법제도연혁도보(司法制度沿革圖譜)』
〈도40〉 김윤보, 족지구지(足指灸之), 『사법제도연혁도보(司法制度沿革圖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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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형과 관련된 형정풍속도는 〈도40〉과 〈도41〉에서 볼 수 있는데, 두 그림 모두 배경은 생략되고 형정 내용만 담고 있다. 〈도40〉는 달군 쇠막대로 발가락을 지지기 직전에 결박된 죄인을 위협하고 있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얼핏 보아 포졸의 손에 들려 있는 막대가 회초리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아래쪽에 단으로 묶인 회초리 모양과 바로 옆에 놓인 막대는 다른 모양이며, 막대의 끝이 약간 뭉툭한 것으로 보아 달궈진 쇠막대임을 알 수 있다. 〈도41〉은 위의 방법과 달리 발가락 사이에 숯이나 화승과 같은 것을 끼워 불을 놓는 또 다른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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