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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수 전쟁

양제(煬帝)가 자초한 수(隋)의 멸망

598년 ~ 618년

고구려·수 전쟁 대표 이미지

고구려와 수의 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수(隋)의 중원 통일

수의 중국 통일은 남조와 북조로 중원이 분열되었던 5세기와는 다른 국제 관계의 전개를 예고하였다. 진(秦)과 한(漢)의 전례에서 알 수 있듯이 중원의 통일은 곧 국제 질서의 재편으로 이어졌고 수도 중원 중심의 일원적 국제 질서의 확립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와 돌궐로 대표되는 주변의 강국들은 병렬적이고 독립적이었던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중원 중심의 질서를 주변국에 강요하는 수와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 고구려의 대립은 불가피하였다.

2 590년 수 문제(隋文帝)의 새서(璽書) 내용

589년 수는 진(陳)을 멸망시키고 명실상부한 중원 통일을 완성한 후 시선을 고구려로 돌렸다. 고구려는 진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고구려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수 문제는 평원왕에게 새서를 내려 위협하였다. 그 내용에서는 고구려가 말갈과 거란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수의 노수(弩手)를 몰래 데려가 병기를 수리한 데에는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하였다. 또한 수에서 파견한 사신을 공관(空館)에 두고 눈과 귀를 막으면서 고구려 사신은 수의 정황을 은밀히 정탐하고 가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였다. 마지막으로 진을 멸망시킨 과정을 설명하면서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진에 비해 훨씬 쉽다고 하면서 고구려를 위협하고 있다.

3 수와의 전쟁 대비

수는 중원 중심의 일원적 국제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고, 고구려와 돌궐 등은 남북조 분열기의 다원적 국제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수와 주변국 사이의 갈등과 충돌은 언젠가는 일어날 예고된 사건이었다. 고구려는 수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평원왕을 이어 즉위한 영양왕도 수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영양왕은 즉위 다음해인 591년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며 책봉을 요청하였고 이에 수 문제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수레와 의복을 주었으며, 고구려는 이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 문제에게 감사를 표했다.

591년에만 고구려는 수에 사신을 두 차례 파견하였고 수도 고구려왕에게 수레와 의복을 내리는 등 양국은 표면적으로는 우호를 다지는 듯하였다. 사신(使臣)은 일종의 공인된 ‘스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수 문제의 새서에서도 고구려의 사신이 수의 정황을 은밀히 정탐하고 간다고 언급하였다. 실제 고구려가 영양왕 즉위 초 사신을 빈번하게 파견했던 것은 역시 수의 동태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고구려는 597년 요서 선제공격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수에 사신을 파견하여 최종적으로 정보 수집을 마쳤다.

4 고구려의 선제 공격과 수 문제의 반격

수는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거란과 말갈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면서 동북 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요서 지역은 수가 동북 지역으로 진출하는 거점이 되었으므로 고구려는 이 지역을 선제공격하여 수를 저지하는 전략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10년 가까이 수와의 전쟁을 충실히 준비해 온 영양왕의 자신감에서 비롯되었다.

598년 2월 영양왕은 고구려 군사와 함께 말갈을 동원하여 만여 명의 병력으로 요서를 공격하였다. 영주(營州) 총관(摠管) 위충(韋冲)이 일단 격퇴하였으나 수의 입장에서 고구려의 선제공격은 큰 충격이었다. 문제는 즉시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積)을 원수로 삼아 수군과 육군 30만 명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6월에는 영양왕에게 내렸던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 요동군공(遼東郡公) 의 작위를 삭탈하여 고구려의 요서 선제공격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였다.

육군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산해관의 서북쪽인 임유관(臨渝關)에 이르렀으나 홍수를 만나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고 전염병까지 창궐하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산동에서 출발한 주라후(周羅睺)가 이끌던 수군도 표류하면서 퇴각하였다. 수륙 양면에서 공격하려던 수의 원정군은 죽은 자가 열 명 중 여덟, 아홉이었다 고 할 정도로 커다란 피해만을 입고 이렇다 할 응징도 하지 못한 채 돌아갔다. 결국 고구려의 요서 선제 공격에 대한 수 문제의 반격은 실패로 끝났고, 영양왕은 수가 전열을 재정비하여 다시 침략할 것을 우려하여 사신을 파견하고 사죄의 표문을 보내는 선에서 598년의 고구려와 수의 전쟁은 마무리 되었다.

고구려가 중원을 통일한 수를 선제공격했다는 것은 수의 입장에서는 큰 충격이자 치욕이었다. 또한 수군과 육군 모두 홍수, 전염병, 풍랑으로 인한 표류, 군량 수송의 중단 등의 악조건 속에서 성과 없이 피해만 입고 돌아왔기 때문에 이후 양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에 집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5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과 패배

문제의 뒤를 이어 양제가 즉위하였다. 양제는 순행(巡行)을 통한 적극적 대외팽창정책을 전개해나갔다. 607년 8월 양제가 북쪽 변경을 순행하던 도중 돌궐의 계민가한(啓民可汗)의 장막에서 우연히 고구려의 사신을 만났다. 고구려 사신은 돌궐과의 연합을 도모하여 수를 견제하고자 계민가한을 찾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계민가한은 이미 양제의 순행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 사신의 돌궐 방문을 숨길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고구려와의 화친을 수에게 알림으로써 중간자로서 돌궐의 위치를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양제의 입장에서도 돌궐의 장막에서 고구려 사신을 만난 것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양제는 고구려 사신에게 고구려 왕이 직접 입조할 것을 요구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계민가한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략하겠다고 통보하였다. 그러나 영양왕은 입조하지 않았고 수에 사신을 파견하지도 않았다. 결국 611년 2월 양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천명하고, 두 달 동안 천하의 군사를 모았다.

612년 양제가 직접 고구려와의 전쟁에 나서면서 조서를 내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영역은 과거 중국의 땅이었으므로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고, 조서를 보냈으나 면대하여 받지 않았으며, 수 조정에 알현하는 것도 즐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거란과 말갈을 이용하여 요서를 침범하고 백제와 신라가 수에 조공하는 길을 막았다고 지적하였다. 실제로 고구려는 600년 이후 수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고, 607년 계민가한의 장막에서 양제가 고구려의 사신을 우연히 목격한 것이 전부였다. 마침내 양제는 113만 3천 8백 명의 군사와 그 배가 되는 군량 수송 인원을 이끌고 고구려와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좌우 24군(軍)을 서로 40리 씩 떨어지게 진영을 이어 나가게 하니 깃발이 960리에 이르렀으며, 성대함이 이와 같은 것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출정이었다.

양제가 직접 지휘한 612년의 전쟁은 요동성을 포위하고, 평양성 근처에서 공방전을 하였으나 고구려 군의 견고한 방어와 군량의 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마침내 수나라 군대는 살수에서 크게 패배하고 돌아가는데 이것이 바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다. 양제는 군사만 잃고 소득 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612년 수가 거둔 전쟁의 성과로는 요수 서쪽에 무려라(武厲羅)를 함락시키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두었던 것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613년 정월 양제는 다시 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살수대첩으로 인해 수 군대의 피해가 컸던 만큼 수의 신료들은 전쟁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4월 양제는 군대를 이끌고 요하를 건넜다. 612년 첫 전쟁 당시에는 모든 결정권을 양제가 갖고 있어 사안을 보고하고 회답을 받는 시간이 오래 걸려 작전 수행이 지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번에는 여러 장수들이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신성과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양제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군대의 철수를 결정하였다. 고구려 군은 처음에는 수 군대의 철수가 고구려 군을 교란하기 위한 것으로 의심하면서 조심스럽게 뒤를 좇았다. 요수에 이르러 수 군대가 거의 다 건너간 것을 알고 그제서야 본격적인 공격을 가하여 수천 명을 죽였다. 양제의 2차 전쟁도 성과 없이 돌아가게 되었다.

두 번에 걸친 양제의 친정이 실패한 것은 역설적으로 양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에 집착하는 원인이 되었다. 614년 2월 양제는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하여 조서를 내려 군사를 징발하였다. 양제의 세 번째 고구려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내호아(來護兒)가 이끄는 수 군대는 비사성(卑奢城)에 이르러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고구려 역시 연이은 두 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군사들이 피폐한 상황이었고 더 이상 전쟁을 할 경우 고구려의 안위에도 문제가 있었으므로 영양왕은 사신을 보내 일단 화친을 청하고, 2차 전쟁에서 고구려에 투항했던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을 돌려보내면서 양제의 3차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결국 양제의 3차에 걸친 고구려와의 전쟁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수의 멸망을 재촉하는 원인이 되었다. 양제는 무리하게 전쟁을 지속함과 동시에 궁궐의 조영, 운하의 개통, 장성의 축조 등 토목공사도 병행하면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이러한 양제의 실정은 갖가지 모순들을 야기하였고 이로 인한 내부 반란이 폭발하면서 수는 멸망하였다. 양제의 고구려와의 전쟁에 대한 집착이 수의 멸망에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요서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고구려와 수의 전쟁으로 결국 수가 멸망하였지만 중원과 고구려의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당이 세워진 후에도 고구려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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