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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천도

고구려, 나라의 중심을 옮기다

427년(장수왕 15)

고구려의 천도 대표 이미지

평양 보통문(6세기 중엽 초축, 1473년 개축)

문화재청

1 개요

고구려가 행한 도읍 이전을 말한다. 고구려의 건국지인 지금의 중국 요녕성(遼寧省) 환인(桓仁) 지역에서 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 지역으로의 이동이 첫 번째 천도이고, 집안지역에서 평양 지역으로의 이동이 두 번째 천도이다.

2 졸본(卒本),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 건국 지역은 졸본천(卒本川) 비류수(沸流水) 가라고 한다. 이곳은 중국 요녕성 환인 지역으로 혼강(渾江)의 중・하류에 해당하는데, 혼강의 지류 중 하나인 부이강(富爾江)의 옛 이름이 비류수이다.

환인 지역에서 고구려 도성으로 기능하였던 곳으로는 하고성자촌(下古城子村)에 있는 성터와 오녀산성(五女山城)이 지목된다. 하고성자성은 혼강 서쪽 평지에 있으며 흙으로 쌓은 방형의 토성이다. 오녀산성은 하고성자촌의 동쪽에 위치한 높이 820m의 산 위에 돌로 쌓은 성으로, 북쪽・서쪽・남쪽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형성되어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도성은 평상시에 거주하는 평시성과 비상시에 들어가 사용하는 방어용 산성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구조였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이에 따라 많은 이들이 하고성자성과 오녀산성을 각각 고구려 도성제에서 평시성과 방어용 성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고구려 시조 추모는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아 도읍을 세웠다고 한다. ‘서쪽 산 위에 쌓은 성’은 곧 오녀산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홀본’과 ‘졸본’은 통하는 말이므로 결국 졸본은 오녀산성보다 동쪽에 위치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때문에 환인현 북전자향(北甸子鄕) 동쪽 평지에 위치한 나합성(蝲蛤城)을 오녀산성과 짝을 이루는 졸본 시기 고구려 평지 도성으로 보기도 한다.

3 국내성(國內城)으로의 천도

졸본에 자리하고 있던 고구려는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그 시기가 유리왕(琉璃王)대라고 전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서기 2년(유리왕 21)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려고 준비한 돼지가 달아나자 설지(薛支)라는 신하가 이를 찾는 과정에서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이라는 곳에 이르렀다고 한다. 설지는 이 지역의 산수가 수려하고 물산이 풍부한 점을 들어 왕에게 천도를 건의한다. 이에 국내 지역을 방문하여 지세를 살펴본 유리왕은 다음해인 서기 3년(유리왕 22)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삼국사기』 기록을 그대로 믿는 경우도 있지만 한편에서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에 따르면 고구려의 신대왕(新大王)인 백고(伯固)가 죽고 나서 큰 아들인 발기(拔奇)와 작은 아들인 이이모(伊夷模)가 왕위 다툼을 벌이게 되었는데, 국인들이 이이모를 왕으로 삼았다. 그가 곧 산상왕(山上王)이다. 이에 발기가 자신을 따르는 연노부(涓奴部)를 이끌고 비류수 유역에 자리를 잡고, 과거 고구려에 항복했던 호족(胡族)들마저 산상왕 이이모를 배신하자 이이모는 새로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이 바로 『삼국지』가 저술되던 당시의 고구려 도성이라는 것이다.

유리왕대 천도에 의문을 품는 이들은 이 기록을 근거로 고구려가 졸본 지역에서 국내성 지역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서기 3년이 아니라 산상왕대 초기라고 보고 있다. 마침 『삼국사기』에는 209년(산상왕 13)에 환도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졸본 지역에서 국내성 지역으로의 천도 시기에 대해서는 그밖에도 태조대왕(太祖大王)대 설이나 신대왕대 설 등 이설이 존재한다.

4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 국내성

고구려는 집안 지역을 오랫동안 도읍으로 삼아 발전하였다. 집안 지역에서 고구려의 도성은 평시성인 국내성과 방어성인 환도성(丸都城) 체제로 운영되었다. 즉,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평상시에는 평지에 자리하고 있는 국내성에 거주하던 왕은 외적의 침입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산 위에 마련해 놓은 환도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하곤 하였다.

국내성은 지금의 압록강과 통구하가 만나는 지점에 돌로 쌓은 방형의 성이다. 두 물길이 자연스럽게 성의 해자 역할을 하도록 조성되었다. 지금도 집안 시내에는 돌로 쌓은 성벽 유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학자들은 이 성 안에 고구려 왕궁과 관청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환도성은 지금의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에 해당한다. 국내성에서 통구하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산성자산성은 동쪽․북쪽․서쪽이 높은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고 트여 있는 남쪽에 돌로 성벽을 쌓아 틀어막은 천연의 요새이다. 산성자산성 내부에서는 왕궁 터를 비롯해 고구려 당시 조성된 여러 건물지가 발굴된 바 있다. 고구려는 이곳 국내성을 도읍으로 삼아 외적의 침입을 견디고 국난을 극복하며 힘차게 성장하였다.

5 세 번째 수도 평양(平壤)으로의 천도

427년(장수왕 15) 고구려는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 지역으로 옮겼다. 평양 지역은 과거 고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王儉城)이 있던 곳이고, 고조선 멸망 후 한사군(漢四郡) 중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이 설치되어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역사적 연원이 오래된 지역인 만큼 경제력이 뛰어나고 문화적으로도 크게 발달한 곳이었다.

국내성 지역은 지형적으로 협소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미 동북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강국으로 성장한 고구려의 도읍으로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미천왕(美川王)대에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된 평양 지역은 넓은 평야와 식량 생산력, 원활한 교통망까지 갖추어져 새로운 도읍지로 적임지였다. 실제로 평양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관심은 지대해서 고국원왕(故國原王)대에는 백제의 공격에 맞서 싸우다 왕이 이곳에서 전사하였고,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대에는 평양에 새롭게 9개의 절을 창건하며 적극적으로 경영 의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평양으로의 천도 이유에 대해 과거에는 남진 정책을 꼽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 외에도 다양한 경제․문화․군사적 배경들이 제시된 바 있다. 한편으로는 귀족 세력 견제를 통한 왕권 강화라는 정치적 목적이 제시되기도 한다. 실제로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북위에 보낸 글을 보면 장수왕(長壽王)대에 고구려에서 대신과 귀족 세력에 대한 대규모 숙청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장수왕대 천도하여 머무른 곳은 평양 지역에서도 동쪽에 위치한 대성산성(大城山城) 주변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졸본 지역이나 국내성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평지성과 산성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도성 체제를 유지하였다. 이중 산성은 대성산성으로 보는 데 이견이 없으나 평지성에 대해서는 대성산성 남쪽에 위치한 안학궁으로 보는 견해와 대성산성 서남쪽의 대동강변에 위치한 청암리토성(淸巖里土城)으로 보는 견해로 나뉘어져 있다.

6 장안성(長安城)으로의 이도

고구려는 552년(양원왕 8) 장안성을 새로 축조하고, 586년(평원왕 28)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런데 이 장안성은 지금의 평양 시가지에 조성되어 있는 성이다. 즉, 평양에서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평양 지역 내에서의 이동이므로 일반적으로 천도라 보지는 않는다. 『삼국사기』 에서도 ‘이도(移都)’라는 표현을 쓰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장안성 건설은 외벽 총 길이 16km, 내벽 길이까지 합할 경우 23km에 달하는 대규모 도시 건설 사업이었고 공사 기간만 수십 년이 이를 정도로 거대한 프로젝트였으므로 그 중요성은 천도에 못지않다.

이 무렵 고구려는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안으로는 안원왕 사후 왕위 계승과 관련한 대규모 싸움이 발생하여 여진이 남아 있는 상태였고, 대외적으로는 북쪽에서 돌궐 세력이 위협을 가하고 남쪽에서는 신라와 백제 연합군이 고구려의 내분을 틈타 한강 유역을 빼앗아 갔다. 장안성 축조는 이러한 대내외적인 군사적 위험에 대한 방어 체계 정비의 일환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장안성의 형태는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고구려 도성의 기본 형태를 벗어난 것이었다. 장안성은 고구려 최후의 도성으로서, 평지성과 산성의 이원화된 도성 체제가 하나로 결합한 형태로 평가받고 있다. 내성․중성․외성․북성의 4개 구역으로 구분되었으며, 일반 백성들의 거주 지역까지 방어 체계에 넣은 형태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성 내부에는 바둑판 형태로 격자형 도시 구획이 이루어졌다. 이를 두고 북위(北魏) 낙양성(洛陽城)이나 수나라 대흥성(大興城)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구려의 긴 역사는 이곳 장안성이 함락되며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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