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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한 전쟁

고조선의 마지막 전쟁

기원전 109년 ~ 기원전 108년

1 개요

기원전 109~108년에 있었던 고조선과 한(漢)의 전쟁이다. 한의 대군이 고조선의 왕도인 왕검성(王儉城)을 포위하고 양국 간에 치열한 교전이 이루어졌으나 오래도록 승부가 나지 않았다. 결국 왕검성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성이 함락되었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2 전쟁의 배경

고조선은 위만(衛滿) 시기부터 한의 외신(外臣) 지위를 획득하였다. 한은 건국 이후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집권 체제를 갖추는 한편, 자국의 영향력 밖에 있는 이민족들 또한 일원적 천하의 구성원으로 포섭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한 수단이 외신제(外臣制)였다.

위만이 정변을 통해 고조선의 왕이 되고 눈에 띄는 실력자로 부상하자 한은 요동태수(遼東太守)를 통해 위만을 외신으로 삼았다. 위만에게는 이민족들이 한의 국경을 침입하는 것을 제어하는 역할을 맡기는 한편, 이민족의 군장(君長)들이 한과 교섭할 때의 중개자 역할을 부여하였다. 그 결과 위만이 이끄는 고조선은 강력한 위세와 부를 얻을 수 있었다. 위만은 형식적으로 한에 신하의 예를 갖추었지만 내부 정치에 대해서는 일절 간섭을 받지 않았고 독자성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右渠王) 대에 이르러 한과 주변국 내지 종족들 사이의 중개권을 지니고 있는 고조선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짐에 따라 양국 사이에는 갈등이 발생하였다. 『사기(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주변국들이 한나라의 천자를 알현하는 것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한의 외신이면서도 주변국이 입조하는 것을 막는 조선의 행태를 한은 묵과할 수 없었다.

한 무제(漢武帝)는 기원전 109년 섭하(涉何)를 사신으로 보내 이러한 행태를 문제 삼아 경고하였으나 우거왕은 수용하지 않았다. 섭하는 귀국 도중 자신을 전송하던 고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달아났는데, 무제는 이를 벌하지 않고 오히려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에 분개한 고조선은 군사를 일으켜 섭하를 살해하였고, 무제는 고조선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규정하고 대대적인 정벌을 지시하였다.

3 고조선 정벌군의 출정과 전쟁의 양상

한의 고조선 정벌군은 두 개의 군단으로 나뉘어 편성되었다. 우선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㒒)이 산동(山東) 반도 쪽에서 7,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배를 이용해 바다를 건넜다. 그 다음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가 5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요동 쪽에서 육로로 진공하였다. 고조선 원정군의 상당수는 죄를 지은 범죄자들을 모집한 것이었다.

전쟁 초기 군사적 우세를 점한 것은 고조선이었다. 순체의 부하인 졸정(卒正) 다(多)가 선제 공격을 하였으나, 고조선 군대에 크게 패하였다. 수군을 거느린 누선장군 양복은 해로를 이용했기 때문에 빠르게 왕검성 부근까지 이를 수는 있었지만 고조선군의 공격을 받아 일패도지하여 병사들을 모두 잃고 양복 본인도 산 속에 몸을 숨기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좌장군 순체의 본진마저 패수(浿水)에서 고조선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발이 묶이고 말았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무제는 다시 사신을 보내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고조선 역시 당장은 전쟁에서 이기고 있었으나 한과 같은 대국과 군사적 대결을 벌이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이에 태자(太子)를 보내 잘못을 사죄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태자가 사죄의 뜻으로 바치는 말 5,000필과 군량미를 지닌 채 무리 1만여 명을 이끌고 패수를 건너려 하자 변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한군(漢軍) 측에서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다. 태자 역시 한군을 믿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무장을 해제했다가 오히려 자신이 살해당할 것을 우려하여 결국 패수를 건너지 않고 돌아오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에 협상이 결렬된 것이다.

강화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전열을 정비했던 탓일까. 재개된 전쟁은 앞서와 달리 한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좌장군 순체의 군대가 패수에서 고조선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고 왕검성까지 진공하여 성의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 양복 역시 흩어졌던 자신의 군사들을 수습하여 왕검성 남쪽에 주둔하며 포위에 동참하였다. 하지만 왕검성의 수비는 매우 견고하여 몇 달에 걸친 공세에도 함락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오히려 공격하는 측인 한나라군에서 발생하였다.

4 분열과 배신으로 얼룩진 왕검성

순체는 패수에서 완강하게 방어를 하던 고조선군을 격파한 터라 그 기세가 사나웠고, 성을 함락하여 큰 전공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였다. 반면 양복은 전쟁 초기에 싸움에서 지고 병사를 많이 잃어 직접적인 전투에 소극적이었다. 전쟁에 임하는 태도가 상반되다 보니 두 장군은 왕검성 공략에 있어서 협조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고조선 측에서는 격렬하게 공격을 해 오는 순체보다는 싸움에 소극적인 양복 쪽이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여겼다. 싸움의 끝이 결국 좋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고조선의 대신들은 우거왕 몰래 사람을 보내 양복에게 항복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이는 양복 입장에서도 반가운 일이었다. 순체가 아닌 자신이 최종 항복을 받아낸다면 전쟁 초기의 실수를 일거에 만회할 수 있을 터였다.

왕검성은 굳세게 버텼고 시간이 흐를수록 순체와 양복 사이에는 반목이 심해졌다. 급기야 순체는 양복이 배신하여 고조선과 내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데 이르렀다. 왕검성 공격이 몇 달 째 교착 상태에 놓여 있자 무제는 공손수(公孫遂)를 사자로 보내 전황을 알아보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였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순체는 자신의 의심을 털어 놓은 후 양복을 체포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공손수가 동의하자 순체는 양복을 속여 자신의 진영으로 부른 후 갑작스럽게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양복이 지휘하던 군사들은 순체의 지휘권 아래 다시 편제되었다.

두 군대를 합친 순체는 왕검성을 더욱 맹렬히 공격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과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尼谿相) 삼(參), 장군(將軍) 왕겹(王唊) 등 고조선 상층부의 주요 구성원들은 결국 항복을 결심하고 왕검성을 빠져 나와 도주하였다. 그 과정에서 조선상 노인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거왕은 항복할 생각이 없었다. 이에 이계상 삼이 사람을 시켜 내부에서 우거왕을 살해하였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우거왕의 대신(大臣)이었던 성기(成己)가 우거왕 대신 구심점이 되어 저항을 이끌었던 것이다. 결국 우거왕의 아들인 장항(長降)과 조선상 노인의 아들인 최(最)가 나서 백성들을 회유하는 한편 성기마저 제거하고 나서야 전쟁이 끝났다. 왕검성은 함락되었다.

5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전쟁은 한의 승리로 끝났지만 영광스러운 개선은 없었다. 무제는 적을 앞에 두고 자중지란을 일으켜 추태를 보인 죄를 물어 순체의 목을 베어 길거리에 내버렸다. 순체와 행동을 같이 한 공손수는 그 전에 이미 죽임을 당한 터였다. 양복도 목숨을 잃을 뻔하였으나 속전(贖錢)을 내고 간신히 서인(庶人)으로 강등되는 데 그쳤다. 전쟁에 승리했음에도 한 장군 중 공을 세우고 열후(列侯)가 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군에 투항한 이계상 삼 등의 인물들은 완강하게 버티는 우거왕과 성기를 제거하는 등 고조선 정벌에 공을 세운 것을 인정받아 모두 열후에 봉해졌다. 하지만 이들의 말로 역시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열후로 봉해진 이후 도망친 고조선의 포로를 은닉했다는 죄로 감옥에 갇혀 죽거나, 고조선의 모반을 획책하였다는 죄로 형을 받아 죽기도 하였다.

고조선의 옛 땅에는 낙랑군(樂浪郡)·임둔군(臨屯郡)·진번군(眞番郡)·현도군(玄菟郡)의 네 개 군이 새롭게 설치되었다. 이 중 임둔군과 진번군은 오래지 않아 폐치되어 낙랑군과 현도군에 흡수되었고, 현도군 역시 원래 설치된 곳에서 요동 쪽으로 물러나게 되어 사실상 기능을 상실하였다. 고조선의 중심지에 설치되었던 낙랑군만이 오랜 기간 변군(邊郡)으로서 기능을 유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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