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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건국

고구려의 유민들, 말갈과 함께 발해를 건국하다!

698년(고왕 1)

발해 건국 대표 이미지

동모산 전경

동북아역사넷(동북아역사재단)

1 영주(營州)에서의 이탈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은 고구려의 민들을 강제로 당으로 이주시켰다. 당은 고구려의 유력한 지배층들을 당 내지의 빈 땅으로 옮겨 그들의 인적, 물적 기반을 철저히 파괴하였다. 발해의 건국 주역들이 당의 영주(營州: 지금의 요령성 조양) 지역에서 처음 일어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였다. 696년 5월, 영주에서는 거란족 추장 이진충(李盡忠)이 당의 지배에 저항하며 영주도독(營州都督) 조문홰(趙文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진충은 스스로를 가한(可汗)이라 불렀다. 당은 즉시 조인사(曹仁師), 장현우(張玄遇), 이다조(李多祚), 마인절(麻仁節) 등 28명의 장군을 보내 토벌하게 하였다. 당은 이진충의 이름을 이진멸(李盡滅)로, 손만영의 이름은 손만참(孫萬斬)으로 바꾸는 등 적개심을 드러냈으나 9월이 되도록 성과는 없었고 오히려 이들에게 계속 패배하며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었다. 영주 지역은 당의 통제가 불가능한 혼란한 상황이 되었고 이 틈을 타 이곳에 강제로 옮겨졌던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거란족(契丹族), 해족(奚族), 말갈족(靺鞨族) 등은 탈출을 시도하였다. 대조영의 아버지인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이끄는 집단과 걸사비우(乞四比羽)가 이끄는 집단은 이때 영주를 빠져나와 함께 동쪽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2 발해의 건국 과정

당이 거란의 공격을 막는데 집중하면서 걸걸중상 집단과 걸사비우 집단은 초반에는 비교적 안전하게 동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당도 거란을 막는데 집중하였으므로 이들의 동향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 같다. 이들이 요해처를 마련하여 성벽을 쌓고 방어 체계를 공고하게 만들어 나가자 당은 걸걸중상에게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에 봉하며 회유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는 다시 당의 지배 아래 들어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당은 우록금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를 보내어 이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해고와의 교전 중에 걸사비우가 죽자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무리를 통솔하여 천문령(天門嶺: 송화강의 지류인 휘발하와 혼하가 나뉘는 지점으로 합달령으로 추정됨)을 넘었다. 이 천문령 부근에서 대조영의 군사와 이해고가 이끄는 당군이 일전을 치뤘다. 이 전투에서 이해고만 탈출하여 돌아왔다고 기록할 정도로 당군은 크게 패배하였다. 돌궐은 요동 지역에 대한 당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하고 거란과 해(奚)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대조영도 이러한 가운데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더 이동하여 계루부(桂婁部: 여기서는 고구려를 의미)의 옛 땅을 차지하고 동모산(東牟山)에 도읍을 정하였다.

동모산은 지금의 길림성 돈화시에 위치한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으로,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는 동모산이 영주로부터 2,000리 떨어진 곳이라고 되어 있다. 대조영 세력은 영주로부터 2,000리나 되는 긴 여정을 당군과 싸우면서 이동하였고 동모산에 이르러 698년 진국을 건국한 것이다. 그런데 698년 대조영이 세운 국가의 국호가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에서는 대조영이 진국왕(振國王)이 되었다고 기록하였고 『책부원구(冊府元龜)』 에서도 대조영이 세운 국가를 진국(振國)으로 기록하였다. 한편 최치원도 발해의 국호를 진국(振國)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당서』에서는 진국왕(震國王)으로 기록하였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인용한 『통전(通典)』에서는 진단(震旦)이라고 하였다.

이 중에서 진국(震國)은 무측천이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에 봉하였다는 기사에서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이 당에서 일어난 발해와 신라의 쟁장사건(爭長事件)에서 당이 신라의 손을 들어준 것을 감사한 표문에서 발해를 진국(振國)이라고 칭하고 있으므로 발해가 존속한 동시기의 신라의 기록에 적힌 진국(振國)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진국에서 발해(渤海)로 국호를 바꾸는 것은 713년의 일이다.

3 발해의 주민 구성

대조영은 사서에 ‘고려별종(高麗別種)’, ‘속말말갈(粟末靺鞨)’, ‘고려구장(高麗舊將: 고구려의 옛 장군)’으로 그 출자가 상당히 복잡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중 어느 하나만으로 대조영을 설명할 수 없고 이 세 가지가 모두 합쳐진 것이 대조영의 실체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즉 대조영은 혈통적으로는 말갈인이나 그 선대에 이미 고구려로 들어와 고구려화된 ‘말갈계 고구려인’으로 보는 것이 그의 정체성에 가까운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 걸걸중상과 달리 성은 대, 이름은 조영이라는 한화된 그의 이름은 그와 선대(先代)의 고구려화의 척도로써 그 정도에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지표이다.

발해의 주민 구성 역시 이러한 대조영의 출자 및 발해의 건국 세력과 밀접하게 연관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조영과 아버지 걸걸중상, 그리고 걸사비우가 영주를 탈출하면서 이끌었던 무리는 당시 영주로 강제 이주된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무리로 이들은 함께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하는 주역이 된다.

발해의 주민 구성은 이러한 발해의 건국 세력에 따라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의 무리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과거에는 발해의 지배계층을 고구려인, 피지배계층을 말갈인으로 보아, 이분법적 구분을 부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적 구조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발해를 건국한 세력들이 집단적으로 묻힌 육정산 고분군(六頂山 古墳群)의 발굴 성과를 분석한 연구를 통해서도 지배계층이 고구려인, 말갈계 고구려인, 말갈인으로 구성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고구려인이 발해 건국에 주도권을 장악했던 것은 사실이다. 『송막기문(松漠紀聞)』에 기록된 발해의 성씨는 왕성(王姓)인 대(大), 고(高), 장(張), 양(楊), 두(竇), 오(烏), 이(李)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고씨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계통의 인물들이 발해 건국 후에도 상층의 지배계층으로 활약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지방의 하층 지배계층이기는 하나 발해의 지방 통치를 원활하게 해준 말갈인 수령(首領)의 존재를 통해서도 발해의 지배계층이 오로지 고구려인만으로 구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발해가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의 무리가 합쳐졌다는 『구당서』의 기록과 대조영이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발해를 세우니 고구려의 유민들이 점점 모여 들었다고 기록한 『신당서』의 개략적인 설명에서 발해의 주민 구성이 고구려계와 말갈계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이미 앞서 살펴본 건국 과정과 건국 집단을 통해서도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러한 이원적인 주민 구성은 발해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고구려적 요소를 더 강조하는가 또는 말갈적 요소를 더 강조하는가로 나누어 해석하는 토대가 되었다. 즉 발해의 주민 구성을 근거로 남한과 북한, 그리고 일본의 연구자들은 고구려인의 국가로, 중국과 러시아는 말갈인의 국가로 발해의 국가적 정체성을 규정한 것이다.

특히 중국은 발해의 피지배계층의 대다수가 말갈인이었기 때문에 ‘발해는 말갈의 나라다’라고 하는 피지배자주체론에 입각하여 발해의 국가 성격을 규정하였고, 그 말갈이 중국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발해사는 중국사다’라는 논리로 발해사를 중국사에 귀속시키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필요에 따라 지역별로 지배자주체론과 피지배자주체론을 교차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이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팽창주의적 역사인식으로서 역사 해석에서 분명히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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