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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천도

동모산에서 상경으로 수도를 옮기다

794년(성왕 1)

발해의 천도 대표 이미지

상경성

동북아역사넷(동북아역사재단)

1 개요

698년 대조영(大祚榮)이 동모산(東牟山)에서 발해(당시에는 진국)를 건국하고, 2대 무왕(武王) 때 현주(顯州)로, 3대 문왕(文王) 때 상경(上京)으로 천도하였다. 문왕 말에 동경(東京)으로 천도하였으나 5대 성왕(成王) 때 다시 상경으로 돌아왔다. 그 뒤 상경은 멸망 때까지 수도로 유지되었다.

2 첫 번째 도읍지 동모산

698년 대조영은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우고 진국(振國)이라 하였다. 동모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1949년 중국 길림성(吉林省) 돈화시(敦化市) 육정산(六頂山) 고분군에서 정혜공주 무덤과 묘비가 발견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묘비에서는 정혜공주가 문왕의 둘째 딸로 진릉(珍陵)에 배장(陪葬)되었다고 하였는데, 진릉이 발해 초기의 왕릉이라고 한다면 대조영의 도읍지 역시 그 일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이곳에 위치한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이 동모산에 해당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것이 현재는 거의 통설로 굳어져 버렸다. 결국 발해 최초의 도읍지는 현재의 돈화 지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에는 산성인 성산자산성과 또 평지 유적인 영승(永勝) 유적, 그리고 발해 초기의 왕실 무덤군인 육정산 고분군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나중에 옛 도읍지라는 의미에서 ‘구국(舊國)’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원래 ‘국(國)’이라는 글자는 국가란 의미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도, 성읍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은 발해의 행정 구역인 5경 15부 62주 중 15부에 속하지 않는 3개의 독주주(獨奏州) 가운데 하나인 동주(銅州)로 편제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에서 독주주라고 하는 것은 부(府)에 소속되지 않고 중앙에 직접 업무를 전달하는 주(州)를 말한다.

3 두 번째 도읍지 현주

발해가 다음으로 수도로 삼은 곳은 현주(顯州)였다. 이곳은 나중에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가 된다. 중경 현덕부 자리는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에 있는 서고성(西古城)으로 알려져 있으며, 주변에서는 발해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 무덤이 발견되었다. 발해가 천보(天寶) 연간, 또는 천보 연간 이전에 이곳에 도읍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언제, 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천보 연간이라고 하는 것은 당(唐)에서 ‘천보’라는 연호를 사용한 시기(742~756)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 학자들은 대체로 무왕 시기(719~737)에 현주로 천도해서 문왕 시기인 천보 말년(756년경)에 다시 상경으로 천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도읍지 상경

다음 수도는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이다. 상경 용천부의 유지는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시(寧安市)에 있는 ‘동경성(東京城)’이라고 부르던 성터이며 현재는 보통 ‘상경성’으로 지칭하고 있다. 여기에는 아직까지 당시의 성벽, 궁전 자리, 문터, 절터, 우물터 등이 곳곳에 남아 있다. 『신당서(新唐書)』발해전에는 문왕이 756년(문왕 20) 홀한하(忽汗河) 동쪽의 이곳으로 천도했다고 되어 있다.

문왕이 상경으로 천도한 이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 있다. 거란족이 세운 요의 역사인 『요사(遼史)』에는 발해가 상경성에 도읍한 것이 남조, 즉 중국 당에 대한 방비에서 비롯되었음을 암시하는 구절이 있다. 그렇다면 이 때 당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755년(문왕 19) 11월 안록산(安祿山)이 난을 일으키고 이듬해 정월에는 황제를 자칭하게 된다. 안록산은 난을 일으켰을 때 평로(平盧)·범양(范陽)·하동(河東) 절도사(節度使)를 겸하고 있었는데, 평로는 현재의 요녕성(遼寧省) 조양시(朝陽市), 범양은 현재의 북경(北京) 등으로 발해와 멀지 않은 지역이었다. 발해는 안록산이 서쪽에 대한 공격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언젠가는 동쪽으로 공격해 올 것이라고 판단하여, 사전에 이를 대비할 목적으로 당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상경으로 천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왕은 상경으로 천도한 뒤 문물·제도의 정비 작업을 가속화하여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지만, 천도 원인은 안록산의 난으로 인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5 동경으로, 다시 상경으로

문왕은 정원(貞元) 연간(785~804), 대략 780년대 후반에 수도를 다시 동경(東京) 용원부(龍原府)로 옮기게 된다. 동경 용원부의 유적은 길림성(吉林省) 혼춘시(琿春市)에 있는 팔련성(八連城)으로 알려져 있다. 그 천도 원인은 분명하지 않은데, 문왕이 이곳으로 천도한 뒤에는 그의 개혁 정치가 한계를 드러내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표출되었던 것 같다. 그는 이미 노쇠하여 추진력을 잃게 되었고, 그의 뒤를 이을 동궁(東宮) 대굉림(大宏臨)마저 일찍 사망하여 보좌할 만한 세력까지 잃게 되었다. 문왕이 793년(문왕 57) 3월에 사망하자 대원의(大元義)가 즉위하게 되었는데 그는 문왕의 직계가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문왕에게 다른 아들이나 손자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왕위 계승은 정상적이지 못하였으며 아마도 찬탈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는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피살되었다. 대원의의 뒤를 이어 즉위한 5대 성왕(成王) 대화여(大華璵)는 대굉림의 아들로, 즉위 후에 내분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793년 무렵 즉위하자마자 상경 용천부로 수도를 옮기고 연호를 중흥(中興)으로 고쳤다. 대화여는 곧 사망했지만, 이때의 천도가 마지막 천도로 발해는 멸망하는 926년(대인선 21)까지 130여 년간 이곳을 수도로 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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