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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대첩

우중문(于仲文),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612년(영양왕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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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612년(영양왕 23) 살수(薩水: 청천강)에서 을지문덕의 지략으로 고구려가 수를 크게 물리친 전투이다.

2 양제(煬帝)의 친정(親征)

612년(영양왕 23) 정월 양제는 113만 3,800명의 군사와 그 배가 되는 군량 운반자를 거느린 대병력을 이끌고 고구려와의 전쟁에 직접 나섰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현재 고구려의 영역은 원래 중국의 땅이었다는 것, 거란과 말갈의 일부를 고구려가 흡수한 것, 598년(영양왕 9) 고구려가 요서를 선제공격한 것, 수에 사신을 보내고자 하는 다른 나라들의 길을 막은 것, 고구려의 세금이 무겁고 흉년과 기근으로 백성들이 고통스럽다는 것 등을 들면서 수의 고구려 원정의 명분을 밝혔다.

2월 요수(遼水)에 이르자 양제가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부교(浮橋)를 만들게 하여 강을 건너고자 했으나 만든 부교가 짧았고 고구려군이 이를 틈 타 공격하였고 수의 맥철장(麥鐵杖), 전사웅(錢士雄), 맹차(孟叉) 등이 전사하여 첫 전투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다시 소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명하여 다리를 늘여 요하를 건너 고구려군을 대파하였다. 이에 승세를 타고 요동성 일대에 체류하면서 전진하지 못했다.

양제는 군사의 나아가고 멈추는 일을 모두 자신에게 보고하고, 자신의 결정에 따를 것을 명령하였던 까닭에, 수의 군대는 전쟁 수행에 있어서 신속한 대응과 대처가 어려웠다. 이에 고구려는 양제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명령 체계를 역이용하였다. 수의 군대가 양제의 명령을 기다리는 사이에, 고구려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방어체계를 보완했으므로, 수의 군대는 요동성조차도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다. 수의 군대가 이렇다 할 성과가 없자, 양제는 지지부진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장수들에게 “그대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힘을 다하지 않는데 내가 그대들을 죽이지 못하겠는가?”라고 엄포를 놓아 군기를 강화하기도 하였다.

3 수의 지휘부 분열과 군량의 부족

결국 수의 군대는 작전을 변경하여 수군과 육군으로 평양 진격을 결정하였다. 먼저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는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패수(浿水)로 들어와 평양에서 60리 떨어진 곳까지 진격하였다. 부총관(副摠管) 주법상(周法尙)은 육군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협공하자고 하였으나 내호아는 듣지 않고 수만 명을 가려 평양성으로 직행하였다. 고구려군은 거짓으로 패하면서 수군을 유인하여 치니 불과 수천 명만이 살아 돌아갔다.

육군은 9군(軍)으로 나누어 좌익위대장군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 우익위대장군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樂浪道), 좌효위대장군 형원항(荊元恒)은 요동도(遼東道), 우익위장군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沃沮道), 좌둔위대장군 신세웅(辛世雄)은 현도도(玄菟道), 우어위대장군 장근(張瑾)은 양평도(襄平道), 우무후장군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碣石道), 탁군태수 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遂城道), 검교우어위호분낭장 위문승(衛文昇)은 증지도(增地道)로 향하여 모두 압록강 서쪽에 모였다. 긴 원정로를 통과하면서 군사들은 지쳤고, 미리 지급받은 군량이나 무기류 등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급기야 몰래 군량을 버리는 자들도 많이 생겨나 중도에 군량은 이미 바닥이 난 상태였다.

정예부대가 압록강을 건널 준비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영류왕은 을지문덕을 보내어 수 군사의 상황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항복하고 수 군대가 군량난을 겪고 있고 매우 지친 상황임을 확인하였다. 을지문덕이 오기 전 양제는 왕이나 을지문덕이 오면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우중문은 항복한 을지문덕을 억류하려 하였으나,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을지문덕을 돌아가게 하였다. 우중문이 이내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 다시 할 말이 있으니 돌아오라 했지만, 을지문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넜다.

제 발로 들어왔던 을지문덕을 제 손으로 풀어준 우중문 등은 황제의 명령을 어겼으므로 매우 두려웠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좌익위대장군 우문술과 우익위대장군 우중문 사이에 의견의 대립이 생겼다.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추격하자고 하였고, 우문술은 부족한 식량을 걱정하며 돌아가자고 한 것이다. 우중문은 앞서 을지문덕의 처리 문제를 두고 유사룡과도 의견 대립을 겪고, 우문술과도 의견이 갈리자 “과거에는 군중(軍中)의 일을 결정하는 것이 한 사람에게 있었으나 지금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마음을 가졌으니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우문술 등이 우중문의 뜻에 따라 을지문덕을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수 군대의 지휘부는 분열하였고 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져 있었다. 을지문덕은 일부러 수 군사에 져주면서 평양성의 30리 지점까지 깊숙이 끌어들였다.

4 허를 찌른 살수에서의 전투

수 군사들은 고구려 군사와 하루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모두 이겼지만 이는 을지문덕의 의도적인 패배였다. 군량이 부족한 수 군사들은 전투 횟수가 많아질수록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졌다. 이때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시 한편을 써서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령한 계책은 천문을 다하였고, 神策究天文
신묘한 계산은 지리를 다하였다. 妙算窮地理
싸움에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戰勝功旣高
만족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란다. 知足願云止

을지문덕은 우중문의 공을 치하하는 척하며 철군을 권유하는 시를 보낸 것이다. 또한 우문술에게는 사람을 보내 다시 거짓으로 항복하며 수 군사가 철군하면 자신이 영양왕과 함께 황제가 머무는 곳으로 찾아뵙겠다고 하였다. 우문술은 평양성의 방어가 견고하고, 지칠 대로 지친 군사들을 데리고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을지문덕이 항복했다는 명분을 갖고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고구려군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사방의 적을 경계하는 방진(方陣)의 대형을 편성하여 철수하였다. 7월, 수 군대는 살수에 이르렀고 수 군대의 절반이 강을 건너자 미리 숨어 있던 고구려 군사가 뒤를 쳤다. 9군의 30만 5천명의 정예부대 중 요동성까지 돌아간 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5 을지문덕의 지략의 승리

612년(영양왕 23) 수와 고구려의 전쟁에서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역시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끈 을지문덕이다. 을지문덕은 수와의 전쟁에서 초지일관 수의 지휘부를 교란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삼국사기』열전에도 을지문덕이 침착하고 날쌔며 지략과 술수가 뛰어났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노자(老子)』의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로움이 없다(知足不辱 知止不殆)’의 구절을 인용하여 우중문을 회유하는 시를 썼을 정도로 문무를 겸비한 지략가였다.

살수대첩은 결국 을지문덕이 거짓 항복으로 수 군사의 동태를 파악하여 군량이 부족한 것을 알고 적재적소에 군사를 배치하여 싸움의 횟수를 늘여가며 전투력을 약화시키면서 고구려 영역 내로 유인한 전략적인 요인에 의한 바가 가장 컸다. 김부식은 사론(史論)에서 “수 군사를 거의 다 섬멸한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612년(영양왕 23)의 고구려와 수의 전쟁은 양제의 완전한 패배였고 을지문덕의 완벽한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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