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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성 전투

고려, 떠오르는 몽골과 처음으로 대면하다

1218년(고종 5) ~ 1219년(고종 6)

1 개요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은 아마도 가장 널리 이름이 알려진 역사 속 인물 중 하나일 것이다. 칭기즈칸이 몽골의 부족들을 통합하고 대칸의 지위에 오른 것은 1206년의 일이었다. 그는 곧이어 인류 역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원정을 시작하였다. 몽골군이 도달한 동쪽의 끝은 고려였다. 그런데 몽골군이 본격적으로 고려에 침입해온 것은 1231년(고종(高宗) 18)의 일이었다. 칭기즈칸이 등장한 후로 25년만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유라시아 전역에 출몰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하던 몽골은 그 긴 시간 동안 대륙의 동쪽 끝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일까?

몽골이 고려와 처음 접촉한 것은 사실 1211년(희종 7)의 일이었다. 이해에 금(金)에 파견되었던 고려의 사신 10명이 도중에 몽골군의 습격으로 몰살당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일회적인 사건으로부터 7년여 만에 고려는 공식적으로 몽골과 처음 대면하게 되었다. 이른바 강동성 전투가 그것이고, 그 이후 양국은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되었다.

2 13세기 초반의 동북아시아 정세

강동성 전투가 일어나게 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그에 앞선 약 10여 년의 시간 동안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다소 복잡하지만 살펴보아야 한다.

13세기 초반, 칭기즈칸이 등장하면서 세계사는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그는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던 몽골족을 차례로 정벌하면서 통합하고, 1206년 드디어 대칸의 지위에 올랐다. 숨고를 틈도 없이 몽골족은 사방으로 정복전쟁을 개시하였다. 우선 서쪽으로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西夏)를 공격하여 복속시켰으니, 이것이 1210년의 일이었다. 바로 이듬해부터는 몽골 남쪽, 그러니까 북중국 일대와 만주 일대에 자리 잡고 한 세기 동안 세력을 떨치던 여진족의 금(金)이 목표가 되었다. 약 3년에 걸친 전쟁 끝에 금(金)은 매년 막대한 양의 금과 은, 비단 등을 바치기로 약속하면서 항복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215년, 금이 수도를 중도(中都), 즉 지금의 베이징[北京]에서 남쪽의 변량(汴梁), 즉 지금의 카이펑[開封]으로 옮기자 칭기즈칸은 다시 한 번 원정군을 일으켜 북중국을 차지해버렸다.

한편 금의 치하에 있던 요동의 거란족은 금이 쇠약해지는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주도한 것은 당시 금에서 천호(千戶)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던 야율유가(耶律留可)라는 자였다. 그는 1211년 금에 반기를 들었고, 곧이어 몽골에 투항할 뜻을 표명함으로써 그들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어서 1215년에는 금의 동경(東京), 지금의 랴오양[遼陽]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거란족 내부의 주도권 다툼 속에서 야율유가는 실권을 잃고 몽골에 투항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걸노(乞奴) 등이 이 무리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란 세력은 야율유가가 이끌고 돌아온 몽골군과 금나라 군대에 쫓겨 해주(海州)에서 개주(開州)로, 점차 남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한편 이에 앞서 야율유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금은 장군 포선만노(浦鮮萬奴)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는 거란족에게 패배한 뒤 도리어 금에 반기를 들고 요양으로 도주하여 자립하였다. 이것이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된 이른바 대진(大眞)으로, 1215년의 일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금 정벌을 일단 마무리한 몽골의 칭기즈칸은 그가 신임하던 장수 목화려(木華黎)를 파견하여 만주 일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우선 요서 일대를 장악한 목화려는 곧이어 포선만노가 자리 잡고 있던 요동으로 밀고 들어갔다. 포선만노는 일단 아들을 인질로 보내면서 항복을 청하였으나, 몽골군이 잠시 물러나자 동쪽으로 이동하여 두만강 유역을 근거지로 다시 자립하였으니, 고려에서는 이를 ‘동진(東眞)’이라고 불렀다.

복잡한 상황을 정리하자면, 강동성 전투가 있었던 1218년(고종 5)을 전후하여 고려의 북쪽 경계 일대의 상황을 복원해보면 다음과 같다. 두만강 유역에는 포선만노가 이끄는 동진국이, 압록강 유역에서 고려의 서북면에 걸쳐서는 거란의 일파가, 그리고 그 북쪽에는 그들을 추격하는 몽골군의 한 일파가 자리 잡고 서로 겨루었다. 그리고 그 격렬한 회오리의 남쪽에 고려가 있었다.

3 거란족과 몽골군이 압록강을 넘어 들어오다

북쪽과 서쪽에서 몽골군과 금나라 군대에 밀리고 있던 거란족은 드디어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들어왔다. 1216(고종 3) 8월의 일이며, 이때 고려는 이른바 무신집권기였다. 당시는 최충헌(崔忠獻)이라는 무신 권력자가 국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휘두르던 때였다. 이때 고려를 침공한 거란족의 수는 대략 수 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남하하면서 각지의 성을 공격하고 약탈하였다. 그러면서 고려에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협박하였다. “대요(大遼)가 나라를 세운 지 2백여 년이 되었고 중간에 여진(女眞)의 침범을 당한 지 또 백 년이나 되었다. 여진에게 함락되었던 여러 고을을 모두 수복하였는데 다만 파속로(婆速路) 한 성만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여러 번 공격하니 바야흐로 항복을 받았다. 관리는 그전대로 임용하였고 백성들도 또한 전과 같이 편안히 살고 있다.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시 대군을 보내어 살육할 것이며 가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고려 정부는 즉시 대응군을 파견하였다. 노원순(盧元純) 등이 이끈 고려군은 9월 초 청천강 인근에서 적을 격파하고, 강 이북에 남아있던 거란군을 차례로 제압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거란군의 후속부대들이 차례로 남하하면서 그해 12월에는 개경 인근의 황주(黃州)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봄까지 개경 인근의 여러 고을을 두들겼다. 이어서 거란군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철원·원주·춘천 일대를 공격했다가 고려군의 반격을 받고는 대관령을 넘어 강릉을, 다시 북쪽으로 선회하여 안변·함흥 등의 성을 점거하였고, 일부는 여진족의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후 거란군의 주력부대는 세력을 다시 결집하여 고려의 동북면으로 진입한 후 서진하여, 1218(고종 5) 9월 무렵 평양의 동북쪽에 있는 강동성(江東城)을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두 해에 걸친 거란군의 분탕질로 고려의 양계 일대는 마비되기에 이르렀다. 이규보(李奎報)는 이들이 저지른 횡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하였다. “나라 창고를 점거해 먹고서 그 나머지 저장해 놓은 것도 불사르고, 남의 여자를 약탈해 욕보이고서 찢어 죽여 길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으며, 주군(州郡)은 서에서 동에까지 거의 폐허가 되어 버렸고, 사찰은 열에 아홉이 불타 버렸다.”

한편 두만강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동진국의 포선만노는 거란군을 추격해 온 몽골의 두 장수 합진(哈眞)과 찰랄(札剌)에게 1218년에 항복하였다.

4 강동성 전투

2년여에 걸쳐 거란족과 싸워온 고려군도, 그들을 추격하여 먼 길을 돌아온 몽골군이나 동진국 군대도 모두 강동성으로 향하였다. 몽골군의 장수 합진과 찰랄은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완안자연(完顔子淵)이 이끈 동진의 원군 2만과 함께 ‘거란적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고려에 진입하였다. 이들이 강동성에 도달한 것은 1218년(고종 5) 12월의 일이었다. 당초에는 단독작전을 펼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침 한겨울을 맞이하였던 탓에 몽골과 동진의 연합군은 고려에 군량을 요청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김취려(金就礪)를 출전시킴으로써, 강동성 공격을 위한 두 군대의 연합이 성사되었다.

성을 포위한 몽골-동진 연합군과 고려군은 거란군이 수비하고 있는 강동성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몽골군이 펼친 전술은 성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성 주위에 너비와 깊이 각각 3m씩의 큰 도랑을 파서 적의 탈출이나 출격을 봉쇄하는 방법으로 성 안을 압박하였다. 몽골군이 남문 쪽을, 동진군이 서문 쪽을, 그리고 고려군이 동문 쪽을 각각 맡아 같은 방법으로 도랑을 파면서 적군을 압박하였다. 막다른 길에 몰리자 거란군 40여 명이 성을 넘어 항복하였고, 수장인 금산왕자(金山王子)는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성을 포위한 지 한 달 남짓 만에 전투가 종결된 것이다. 성문을 열고 나와서 항복한 거란의 관리와 군졸, 부녀자 등은 총 5만여 명에 달했다. 이들 가운데 1백여 명은 목을 베고, 포로 700명과 고려인으로서 포로로 붙잡혔던 200명을 고려에 돌려보냈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카치운이 끌고 갔다.

5 형제의 맹약

몽골의 장수 합진과 찰랄은 강동성 전투를 마무리한 후 고려의 조충(趙沖)·김취려와 함께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함께 강동성을 공격하면서 양군의 지휘부 사이에서는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는데, 승전을 거둔 이후 구체적으로 맹약을 맺었던 것이다. 맹약의 내용은 “두 나라는 길이 형제가 되어, 만세 뒤의 자손에 이르기까지 오늘을 잊지 않게 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사실 몽골군은 한반도에 들어올 때부터 거란을 물리치고 고려와 형제의 맹약을 맺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몽골을 오랑캐들 중에서도 가장 흉악하고 사나우며, 이전에 우호관계를 맺은 일도 없었다는 이유로 꺼려하였다. 사실 형제의 맹약이라는 것은 몽골과 고려 사이의 정부 대 정부의 맹약이라기보다는 원정군의 사령관들끼리 맺은 것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몽골군은 철수하면서 고려 조정에 사신을 보내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을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사신으로 온 포리대완(浦里帒完)이라는 자는 고려에 와서 매우 무례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국왕이 앉아있는 전상(殿上)에까지 올라와 품속에서 문서를 꺼내 왕의 손을 잡고 쥐어주는 식이었다. 우호적인 맹약을 맺었다고는 하나, 고려인들이 눈에 그의 태도는 강압적이고 야만적인 자세였다.

형제 맹약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후의 상황을 통해 보면 대개 고려에서 매년 일정한 공물(貢物)을 바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후로 몽골의 사신은 매년 10명 안팎씩 동진을 거쳐서 고려에 왔고, 이들은 그때마다 고려로부터 수달피나 비단 등 각종 물품을 거두어 돌아갔다. 고려에서는 여기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는데, 1225년(고종 12)에는 사신으로 왔던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 근처에서 피살당하면서 몽골의 사신 파견은 중단되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며, 몽골과 고려 간의 긴 전쟁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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