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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의 정변

태조 왕건의 혈통을 잇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다

1009년(목종 12)

1 개요

1009년(목종 12)에 고려의 서북면을 지키던 강조(康兆)가 국왕 목종(穆宗)을 시해하고 새로 현종[고려](顯宗)을 옹립한 사건이다. 목종의 후계를 둘러싼 정치적 급류 속에서 다소 예기치 못하게 발생했으며, 이후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여 2차 거란의 고려 침입을 일으키는 빌미로 이용되었다.

2 목종 대의 정국과 후계 선정 문제

강조의 정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의 정세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제5대 국왕인 경종[고려](景宗)의 맏아들인 왕송(王誦)은 아버지가 승하할 당시 2세에 불과했다. 이에 경종은 사망하기 전에 어린 아들 대신 사촌형제인 22세의 왕치(王治)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니, 그가 바로 제6대 국왕 성종[고려](成宗)이다. 성종은 자신의 조카인 왕송을 990년(성종 9)에 개녕군(開寧君)으로 책봉했고, 궁궐에서 기르며 학문을 가르쳤다. 그리고 997년(성종 16)에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 그를 불러 차기 국왕으로 삼았다. 18세의 나이로 고려의 제7대 국왕으로 즉위한 왕송이 바로 목종이다.

목종은 그 후 12년 동안 고려의 국왕 자리에 있었다. 그의 재위 기간에도 고려의 국가 체제 정비는 꾸준히 이루어졌다. 가령 관료 및 군인들에게 지급하는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했고, 서경(西京)을 호경(鎬京)이라 개칭했으며, 지방관의 조직 체계도 손질을 하였다. 또 북방 지역에 많은 성을 쌓아 여진의 노략질을 막고 국가의 영역을 확정하는 데에도 힘썼다.

목종대에 관한 기록은 매우 소략하여 자세한 통치 활동을 추적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그나마 이 시기의 특징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千秋太后)의 깊숙한 정치 관여라는 상황이다. 고려 초의 국왕들이 대개 20~30세 무렵 즉위했던 것을 감안하면, 18세라는 목종의 즉위 당시의 나이는 아주 어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천추태후는 자신의 외가 쪽 친척인 김치양(金致陽)과 손을 잡고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당시 김치양은 관직 임명을 마음대로 하여 그의 세력이 조정에 가득했으며, 300여 칸이나 되는 거대하고 화려한 집을 지어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김치양이라는 인물은 일찍이 성종대부터 천추태후와 정을 통하고 있다고 지목되어, 성종에 의해 장형(杖刑)에 처해지고 귀양을 간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목종이 즉위하자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여 천추태후와의 결탁을 바탕으로 권력을 거머쥐었던 것이다.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김치양의 고향인 동주(洞州)에 성수사(星宿寺)라는 사당을 짓고, 또 궁성에 시왕사(十王寺)를 세웠는데, 종(鐘)에 “동국(東國)에 태어난 당세에는 태후와 같이 선종(善種)을 닦고, 서방(西方)으로 가는 뒷날에는 태후와 함께 보리(菩提)를 증(證) 하리라.”는 명문을 새기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003년(목종 6)에는 이들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기까지 하였다. 목종은 김치양을 내치려 했으나 어머니의 심기를 상하게 할까 두려워 차마 하지 못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 시점에서 심각해졌다. 기록에 따르면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자신들의 아이를 목종의 후계자로 세우려 하였다고 한다. 아직 아들이 없는 목종의 상태를 이용하려 한 것이다. 이는 고려의 왕통(王統)을 바꾸려는 엄청난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을 제거하려 하였다.

목종보다 12세 아래였던 대량원군 왕순은 당시 유일하게 남아있던 태조 왕건의 손자였다. 태조 왕건(太祖 王建)과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김씨(金氏) 사이에서 태어난 안종(安宗) 왕욱(王郁)이 그의 아버지였고, 어머니는 경종(景宗)의 왕비였던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皇甫氏)였다. 왕순은 경종의 사후에 왕욱이 헌정왕후와 정을 통하여 낳은 아이였던 것이다.

헌정왕후는 천추태후의 친여동생이었다. 고려 초에는 태조 왕건의 자식과 손자 세대에서 극심한 근친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헌정왕후와 천추태후는 태조 왕건의 손녀이자 성종의 여동생이었으며, 당시의 관례에 따라 자신의 사촌오빠인 경종의 부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왕순은 어머니와 아버지 양측 모두를 통해 직접적으로 태조 왕건의 혈통을 이어받은 가장 순혈의 왕족이었다. 이러한 면에서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태어난 아이보다 왕순이 목종 사후의 왕위계승자로 지목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천추태후의 정치적 견제를 받아 왕순은 절에 머물렀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일찍 사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왕순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없었고, 절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천추태후에 의해 지속적으로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목종의 후계를 둘러싸고 복잡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을 때, 궁궐에 크게 불이 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목종은 이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아 병이 들었고, 급기야 정사를 보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목종은 자신의 측근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외부와의 소식을 차단하고, 이들과 후계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목종은 신임하는 신하였던 채충순(蔡忠順)을 불러 문서 두 통을 내놓았다. 하나는 당시 목종의 총애를 받던 발해 출신의 유충정(劉忠正)이 올린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량원군 왕순이 올린 것이었다. 유충정이 올린 문서에는 김치양이 차기 왕위를 노리며 세력을 규합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왕순이 올린 문서에는 자신을 독약으로 죽이려 한 음모가 있었다는 말이 있었다. 채충순은 이를 보고 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목종은 왕순을 후계로 삼으려 한다고 하며 그를 보좌할 것을 부탁했다.

이에 채충순은 뜻을 같이 하는 최항(崔沆), 유충정, 고영기(高英起) 등과 함께 왕순을 맞이해올 계획을 세웠고, 황보유의(皇甫兪義) 등에게 소수의 군사를 데리고 목종의 친필 편지를 가져가 왕순을 궁궐로 맞이해 오게 하였다. 또한 군사 100명을 개경 교외로 보내 왕순이 오는 길을 확보하도록 하는 한편, 서북면순검사(西北面巡檢使) 강조(康兆)를 개경으로 불러들여 호위를 맡기려 하였다. 목종의 이러한 신속한 조치에 김치양은 며칠간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강조가 조정 내 권력투쟁의 전면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목종이 우군으로 삼기 위해 소환한 강조가 왜 정변을 일으키게 되었을까.

3 정변의 발생과 강조의 권력 장악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강조가 처음부터 정변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목종의 명을 받고 군을 일으킨 강조는 개경으로 진격하여 동주(洞州)의 용천역(龍泉驛)까지 도달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위종정(魏從正)과 최창(崔昌)이라는 관리들을 만나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즉 목종은 이미 위독하고,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왕위를 찬탈하려 하고 있으며, 이 계획에 강조가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하여 왕명을 사칭해서 강조를 소환했다는 정보였다.

강조는 이 말을 그대로 믿고 부대로 돌아가 병력을 통제했다. 이 시점 이전의 위종정과 최창에 대해 전해지는 기록은 없다. 다만 모종의 일로 죄를 입고 축출되어 조정을 원망하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강조에게 거짓된 정보를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들은 이후에도 강조의 측근으로 남아서 활동을 한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이 때, 강조는 개경의 정보를 입수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강조를 꺼린 천추태후가 사람을 보내 교통의 요충지인 자비령(慈悲嶺)을 막고 사람이 다니지 못하도록 조치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정보의 부족으로 곤란해 하던 강조에게 바로 이 때 귀중한 전갈이 도착했다. 아들을 걱정한 강조의 아버지가 종을 승려로 변장시켜 편지를 숨겨서 강조에게 전달하게 한 것이다. 그 편지에는 목종이 이미 세상을 떠났고 김치양이 권세를 잡았으니, 이를 평정하라는 말이 담겨 있었다.

아마도 당시 목종이 궁궐에서 칩거하자 민간에 이러한 소문이 돌았던 듯하다. 소식을 전한 종은 지쳐서 바로 사망하여, 강조는 더 이상의 정보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같은 내용을 거듭 듣게 된 강조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에 부하인 이현운(李鉉雲) 등과 함께 군사 5천을 거느리고 개경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진군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조는 다시 한 번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목종이 아직 세상을 떠나지 않았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거병은 난을 진압한다는 대의명분에 맞는 것이 아니라 새로 난을 일으키는 것이 되어버렸기에, 강조는 고민에 빠졌다. 그런 강조에게 부하 장수들은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다고 부추겼다. 강조도 이에 동의하고, 결국 다시 군을 개경으로 진격시켰다. 정변의 시작이었다.

강조는 목종을 폐위시키고 새 국왕을 즉위시킬 계획을 세웠는데, 공교롭게도 왕순을 그 적임자로 지목하였다. 목종이 이미 왕순을 후계자로 선정하여 개경으로 불러들이려 한 것을 알지 못하고 내린 결정이었다고 한다. 강조는 부하에게 병사를 딸려 보내 왕순을 개경으로 맞이하게 하였다. 그리고 목종에게 장계를 올려, 간악한 무리들이 왕위를 넘보고 있는데 세자가 없으니, 자신이 왕순을 옹위하고 대궐로 가겠다고 하였다. 또한 간사한 무리를 제거한 뒤에 다시 모실 테니, 놀라지 말고 미리 궁궐 밖으로 나가 있도록 요청하였다.

강조와 그의 군대는 왕순보다 먼저 개경에 도착했다. 강조의 수하들은 궁궐 안으로 들어와 소란을 피우며, 강조를 향해 만세를 부르는 등 법석을 떨었다. 강조가 이를 사양했다고는 하나, 이미 목종은 화가 닥쳤음을 깨닫고 천추태후와 함께 통곡했다고 한다.

한편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으나, 목종이 보낸 사자와 강조가 보낸 사자는 함께 왕순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왕순을 모시고 개경으로 돌아와 국왕으로 즉위시켰으니, 바로 고려의 제8대 국왕 현종이다. 이어 강조는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세력을 적발하여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하여 태후와 함께 충주(忠州)로 내려가게 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목종을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태후는 연고가 있는 황주(黃州)로 보내졌다. 1009년(목종 12) 2월의 일이었다.

정변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강조는 이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은대(銀臺)와 중추원(中樞院), 남북 선휘원(宣徽院)을 폐지하고, 중대성(中臺省)을 설치하여 자신이 중대사(中臺使)를 맡고 부하 이현운(李鉉雲)을 중대부사(中臺副使)로 삼았다. 즉 국왕의 측근 기구를 통폐합하여 자신이 장악하고, 이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어 1009년(현종 즉위년) 3월에는 이부상서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의 자리를 차지하여 실질적인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내부적으로 권력 기구를 장악한 강조는 목종의 궁녀 100여 명을 내보내고 정자를 헐고 목종이 길렀던 진귀한 짐승들을 풀어주는 등의 일을 통해 민심 수습에 나섰다. 이어 사면령을 내리고 오래 묵은 세금을 면제해주며 요역을 줄여주는 등의 조치도 뒤따랐다. 또 관료들에게는 작을 올려주고 개경의 병사들에게는 베를 나누어주었고, 국경 지역에 이주되었던 사람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조치도 내렸다. 왕이 직접 나이가 많거나 병든 백성 수백 명을 궁궐로 초청하여 음식과 비단, 약 등을 내려주는 행사도 개최하였다.

또한 거란에도 즉시 사신을 보내 목종의 죽음과 현종의 즉위를 알리고, 이어 거란 태후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도 파견하였다. 물론 이러한 조치들은 국왕 현종의 명의로 내려진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강조가 민심을 수습하고 대외적으로 새 왕의 즉위를 인정받기 위해 내린 조치였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강조의 계획은 한동안 문제없이 흘러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010년(현종 원년)부터 뜻밖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거란이 강조의 정변과 현종의 즉위를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이다. 왜 1년이 지난 뒤에야 거란이 이러한 태도를 보인 것일까.

4 2차 고려-거란 전쟁의 발발과 강조의 몰락

고려와 거란은 994년(성종 13)에 화의를 맺은 뒤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목종대에는 별다른 마찰 없이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하지만 1004년(목종 7)에 거란이 대군을 일으켜 송을 공격하였고, ‘전연(澶淵)의 맹약’을 통해 힘의 우위를 확인하였다. 이런 상황의 변화는 거란과 고려, 송의 삼각 구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 자명하였다. 고려가 거란에 정상적으로 조공을 바치고 있는 이상, 거란이 고려에 무력을 행사할 명분은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적당한 구실이 생긴다면 언제든 거란은 고려를 한층 더 강하게 제압하려 시도할 수 있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때 그 계기가 만들어졌다. 고려의 변경에 배치되어 있던 하공진(河拱振)과 유종(柳宗)이라는 관리들이 인근의 여진 부족과 마찰을 빚었고, 큰 피해를 입은 이 부족들이 거란으로 가서 호소를 했던 것이다. 이 때 고려의 국왕 교체가 사실은 강조의 정변에 의한 것이라는 정보도 거란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거란의 황제 성종(聖宗)은 이를 대역(大逆)이라 규정하고,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아울러 즉시 사신을 고려에 파견하여 목종에 관한 일을 물었다.

고려 조정은 이에 대해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적으로 무마하려 하는 한편, 강조의 지휘 하에 30만의 군대를 북방에 배치하여 전쟁에 대비하였다. 거란은 고려의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선포하였고, 결국 1010년(현종 원년) 11월에 거란의 황제 성종이 직접 이끄는 40만의 대군이 고려로 침입하였다. 거란군은 강조가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기 위해 온 것이라고 선전하며 고려군의 항복을 유도했으나, 변방의 고려군은 이에 응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이에 거란군은 병력을 나누어 절반은 후방에 대기시키고 나머지 절반으로 남쪽을 향해 내려왔다.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은 통주전투(通州戰鬪) 초반에는 강조가 검차(劍車)를 활용한 전술로 거란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몇 차례 승리가 계속되자 강조는 방심하였고, 이 틈을 타 강공을 펼친 거란군에 의해 본진이 함락되어 강조와 이현운 등 휘하 장수들이 대거 사로잡히거나 전사하는 대패를 당하였다.

이 때 거란의 성종이 고려 장수들에게 항복을 권유하자 이현운은 충성을 맹세했으나, 강조는 고려 사람으로서 거란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반발하다가 처형을 당하였다. 정변을 일으켜 고려의 권력을 한 손에 쥐었던 강조는 이렇게 하여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거란은 애초에 강조를 벌하겠다는 명분으로 고려를 침입하였으나, 이것이 구실에 불과했음은 강조를 사로잡은 뒤에도 전쟁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후 고려는 거란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으나, 현종이 친조(親朝)를 약속하며 거란과 화의를 맺음으로써 전쟁을 종결지었다. 그리고 종전 후 강조의 측근들도 처벌을 받아 정계에서 제거되었고, 강조가 변경시켰던 관제도 다시 복구되었다.

강조의 정변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비교적 상세하게 전말이 실려 있다. 이 시기의 사료가 대개 부실한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이후 현종의 후손들이 고려의 왕실을 잇게 되었으므로, 현재 전해지는 그의 즉위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어쩌면 다소의 비판적 검토가 필요할 수도 있다. 기록에 따르면 현종의 즉위는 강조의 정변이 아니었더라도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하나, 현실적으로 명확한 것은 강조가 정변을 일으킨 뒤 왕순을 옹립하여 국왕으로 세웠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정변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거란과의 전쟁이 발발하고 강조가 제거되었기 때문에, 이 정변은 일시적인 혼란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강조의 정변은 거란의 침입에 빌미를 제공하였고, 이로 인해 재개된 고려-거란 전쟁이 이후의 동북아시아 역사에 중요한 작용을 미쳤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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