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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안검법

억울한 이가 줄어든 세상을 향한 꿈인가, 권력 투쟁의 한 수일 뿐이었던가

956년(광종 7)

1 머리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은 한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한 용어이다. 고려 제4대 국왕이었던 광종(光宗)이 왕권 강화를 위해 추진한 강력한 개혁정책의 일환으로, 신하들의 사병(私兵)이자 노동력이었던 노비를 풀어준 제도라는 것이 노비안검법에 대한 일반적 설명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당시의 기록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고려 시대에 대한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자료인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담긴 사료들을 살펴보면서, 노비안검법의 실체에 대해 최대한 접근하도록 하겠다.

2 사료에 남아있는 ‘노비안검법’ 이야기

노비안검법이 시행된 시기는 956년(광종 7)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고려사』 중에서도 국왕의 행동을 중심으로 편찬된 「세가(世家)」의 이 해 기록은 극도로 소략하다.

“7년. 주(周)에서 장작감(將作監) 설문우(薛文遇)를 보내와 왕을 더하여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로 삼고, 이어 백관(百官)의 의관(衣冠)을 중화의 제도에 따르게 하였다. 전 대리평사(大理評使) 쌍기(雙冀)가 설문우를 따라 왔다.”

956년(광종 7)의 「세가」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다. 거란(契丹)과의 전쟁 등을 거치며 고려 초기의 기록이 많이 소실되었다고는 하지만, 한 해에 관한 기록이라고 하기는 안타까울 정도로 소략하다. 노비안검법에 대한 언급도 보이지 않는다. 노비안검법이 국왕 광종의 대표적인 개혁 조치였다는 지금의 이해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기록 상태는 다소의 당혹감마저 준다. 그렇다면 노비안검법의 시행은 어디에 기록되어 있을까.

『고려사』 중 ‘법’이 정리된 부분에 관련 기록이 수록되어 있을 것이라고 예측해볼 수 있다. 『고려사』에는 「형법지(刑法志)」가 있고, 그 아래의 항목 중에 ‘노비’가 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노비’ 항목에는 광종 7년에 해당하는 시기의 기록이 없다. 더 후대인 982년(성종 1)에 최승로(崔承老)가 올린 ‘시무(時務) 28조’ 중 노비 관련 조항이 이 항목의 첫머리에 실려 있다. 물론 여기에 광종대의 노비안검법 시행에 관한 대목이 있지만, 이는 후대의 ‘평가’이므로 광종대의 상황을 그대로 기록한 것은 아니다.

뜻밖에도 『고려사』에서는 광종의 왕비인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의 열전에서 이 사건을 기록해 두었다. 여기에서는 아래와 같이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였다.

“광종 7년. 노비를 안검(按檢)하여 그 시비를 분별하도록 명하였다. 노비인데 주인을 배반한 자가 매우 많았고, 상전을 능멸하는 풍조가 크게 유행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한탄하고 원망하였다. 대목왕후가 이를 간절히 간언하였으나, 광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역시 소략하지만, 대략적인 얼개는 그려볼 수 있다. 광종이 노비들을 조사하여 시비를 분별하도록, 즉 노비인지 아닌지를 판정하도록 하였고, 이런 명령이 내려오자 노비들이 주인을 배반하는 풍조가 생겼으며, 대목왕후가 이를 말리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대목왕후의 열전에 수록한 것은 『고려사』의 편찬자가 광종의 명령보다 대목왕후의 간언이 더 의미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즉 광종의 노비 조사 명령은 옳지 않았다는 의견을 비친 것이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최승로의 ‘시무 28조’에 담긴 내용과 일치한다. 여기에는 좀 더 자세한 맥락과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본조(本朝)의 양인과 천인의 법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태조께서 창업하셨던 초기에, 여러 신하들 중에 본래 노비가 있었던 자들 외에 그 나머지 원래는 〈노비가〉 없었던 자들이 혹은 종군하여 포로를 획득하고 혹은 값을 치르고 사서 노비로 삼았습니다. 태조께서 일찍이 포로들을 풀어주어 양인으로 삼고자 하셨으나, 공신들의 뜻을 움직이게 할까 염려하여 편의를 따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60여 년이 되도록 공연히 고소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광종에 이르러 비로소 노비를 안험(按驗)하여 그 시비를 분별하게 하셨습니다. 이에 공신 등 중에 한탄하고 원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간언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대목왕후께서 간절히 간언하셨으나 듣지 않으셨습니다. 천예(賤隷)들이 뜻을 얻어 존귀한 이들을 능멸하고, 앞 다투어 허위를 엮어 본래의 주인을 모함한 것이 이루 다 셀 수가 없었습니다. 광종께서는 스스로 화의 단초를 여셨으나 근절하지는 못하셨습니다. 〈중략〉 원하건대 성상(聖上)께서는 예전의 일을 깊이 거울로 삼으시어 천한 자들로 귀한 이들을 능멸하게 하지 마시고, 노비와 주인의 분별에 대해서는 중도를 견지하시며 처리하십시오. 대저 관직이 귀한 자들은 이치를 아니 불법을 저지르는 일이 드물고, 관직이 낮은 자는 진실로 지혜가 불법을 수식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니, 어찌 양인을 천이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궁원(宮院)과 공경(公卿) 중에 비록 간혹 위세로 불법을 저지르는 자가 있겠으나, 지금은 정치가 거울과 같아 사사로움이 없으니,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오직 지금 판결을 하실 때에는 상세하고 명백하게 하여 후회가 없도록 하게 하는 데에 힘을 쓰시고, 전대(前代)에 판결하신 것은 반드시 추적하여 조사하여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으십니다.”

이 기록은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검토되었다. 그리고 광종이 내린 노비 안검 명령은 원래 양인인데 권세가들에 의해 불법으로 노비가 되었던 사람들을 조사하여 다시 양인으로 돌리도록 한 것이라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이 조치는 공신을 위시한 신하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대목왕후는 광종의 이런 조치가 신하들의 불만을 야기할 것이므로 간언을 하였고, 최승로는 매우 비판적으로 이 조치를 평가하였다는 데에도 별다른 이견이 없다. 광종의 전반적인 왕권강화책에 대해서는 ‘광종’ 항목에서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최승로의 이러한 건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논의되고 수용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987년(성종 6) 7월에 면천된 노비가 혹 옛 주인을 비난하거나 그 친족과 분쟁을 벌이면 천인으로 되돌리도록 명령한 것으로 보아, 광종대처럼 ‘노비가 주인을 배반하는’ 분위기가 다시 형성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3 맺음말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노비안검법에 대한 사료는 매우 적다. 구체적인 시행상이나 결과, 당시에 벌어졌을 각종 논쟁, 사회적 분위기 등에 대해서도 노비안검법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에서 서술한 최승로의 상서문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광종의 노비 안검 명령은 이 소략한 기록들만으로도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사건이다. 이는 억울하게 노비가 된 선한 양인들을 구제하여 주기 위한 ‘착한’ 조치였는가? 이를 악용한 ‘진짜’ 노비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고소한 사람들 중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과 제도를 악용한 진짜 노비들의 비율은 어땠을까? 그 비율에 따라 노비안검법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까? ‘진짜 노비’는 그대로 노비로 두는 것이 옳았을까, 그들 역시 면천시켜 노비제 자체를 없애는 것이 옳았을까? 광종의 의도가 전자였다면 이는 한계가 컸다고 비판받을 조치인가? 혹 억울한 백성을 위한다기보다도 노비를 많이 거느린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이 더 강했던 것은 아닐까? 정치적인 목적이 강하더라도 그 결과가 억울한 사람을 줄이고 신분으로 차별받는 사람을 줄이는 것이라면 충분히 좋은 것일까?

이 외에도 수많은 생각할 거리들이 도출될 수 있다. 이러한 질문들은 역사 이해가 ‘사실 관계의 확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맞닿아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이렇게 생각할 거리들을 찾아낼 때, 천 년 전 광종의 노비안검법 시행은 단순히 하나의 오래된 사실이 아니라 지금 우리와 박동을 공유하는, 살아있는 역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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