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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적의 난

장수, 재상? 노비라고 못하란 법 있는가!

1198년(신종 1)

1 난의 배경

만적의 난은 1198년(신종 원년) 5월에 고려의 수도인 개경(현재의 개성)에서 노비들이 시도했던 봉기이다. 1170년(의종 24)에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 등이 주동하여 일으킨 무신정변(武臣政變)으로 고려사회는 크게 변화하였다. 문신이 중심이 되어 정치를 이끌던 고려사회는 지배층 내부의 갈등이 빚어지는 가운데, 무신에 대한 차별도 지속적으로 일어나면서 무신들의 불만도 높아갔다. 여기에 의종[고려](毅宗)의 잦은 유흥과 행차가 더해지면서 결국에는 1170년에 보현원(普賢院)으로 행차했던 의종이 돌아오는 과정에서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정변 이후 무신정권이 성립되면서 무신들이 문신을 제치고 정치를 주도하는 상황이 만들어지면서, 기존의 지배체제가 흔들리게 되었다. 특히 노비와 같이 낮은 신분의 이들이 무신정변의 과정에서 공을 세워 출세하는 사례가 등장하면서 그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대표적으로 아버지는 소금장수, 어머니는 옥령사라는 절의 노비였던 이의민(李義旼)은 하급 장교로 복무하던 중, 정변 과정에 참여하고 의종을 살해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끝내는 정권을 잡기도 한 것이다.

2 무신정권기의 혼란

이러한 분위기는 중앙 지배층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무신정권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전국적으로 퍼져갔다. 그에 따라 무신정권에 반대하는 관료들뿐만 아니라 고려의 지배체제에 항거하는 백성이나 노비들에 의한 움직임도 활발하게 벌어졌다. 전자로는 서경 지역에서 일어났던 김보당의 난(金甫當-亂), 조위총의 난(趙位寵-亂)이 대표적이며, 후자의 경우로는 만적의 난, 김사미의 난(金沙彌-亂) 등이 대표적이다. 1193년(명종 23) 7월에 남적(南賊)이 봉기했는데 그중 심한 것이 운문에 웅거한 김사미와 초전에 웅거한 효심(孝心)으로, 이들은 망명한 무리를 불러 모아 주현을 노략질하였다고 한다.

특히 만적의 난은 최충헌(崔忠獻)이 정권을 잡은 후에 일어난 것으로, 수도인 개경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3 최씨 정권하의 혼란

최충헌이 1197년(명종 27)에 쿠데타를 일으켜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는데 그 직후인 1198년(신종 원년) 5월에 이 사건은 일어났다. 이 운동은 규모가 매우 크고 또 계획적이었다. 애초 약속한 날에 계획보다 크게 적은 수가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리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표지로 삼기 위해 준비한 누런 종이가 수천 장이나 되었다는 데에서 그 계획했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무리를 모아 궁궐로 쳐들어가며 최충헌을 우선 죽이고 나서 각 노비의 주인을 죽이고, 그 다음에 노비에 관한 문서를 불태워 없애는 순으로 단계별로 계획을 세우고 수많은 노비들과 약속을 잡았으며, 다른 이들과 구별하기 위해 ‘정(丁)’을 쓴 수천 장의 누런색 종이도 준비했다는 점에서, 이 운동의 계획성도 엿볼 수 있다.

봉기의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는 “장수와 재상에 씨가 따로 있는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노비신분으로부터의 해방에 있었다. 이 항거운동의 주동 인물인 만적은 최충헌의 노비였다. 그밖에 미조이, 순정 등 가담한 무리의 대부분도 마찬가지로 노비였다고 생각된다. 이들은 그와 같이 압박을 받고 지내는 같은 천인 신분으로 일제히 일어나 주인을 죽이고 천적을 불태워 고려에서 천인의 존재를 없앰으로써 그 같은 신분에서 해방이 되고자 기도했던 것이다. 물론 만적 등이 자기들은 ‘늑골을 수고로이 하면서도 매질 밑에서 곤욕을 당하고 있는’ 현실을 상기시키고 있음을 볼 때, 실제적으로 그러한 신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궐기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그런데 만적 등의 항거운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정권의 탈취까지도 획책했다는 점에서 보다 큰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은 장수와 재상이라고 해서 무슨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신들도 때만 잘 잡으면 얼마든지 그 지위에 올라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또 그러한 현상은 이미 무신정변 이후 현실적으로 나타났던 상황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저들은 이번의 봉기를 통해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장악할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보다시피 만적 등의 항거운동은 배신자의 밀고로 인해 거사 이전에 진압되고 말았지만 그 규모나 계획의 치밀성에서 뿐만 아니라 신분의 해방과 정권탈취를 기도한 노비 중심의 봉기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운동이었다.

그 뒤 1203년(신종 6년)에는 다시 개경에서 노비들이 연루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해 4월에 나무를 하러 나온 노비들이 무리를 나누어 전투연습을 하다가 최충헌이 파견한 사람에 의해 50여명이 체포되어 강에 던져진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아마 이 사건 역시 만적의 항거운동과 연관시켜 생각할 수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일반 백성들의 항거운동인 민란은 최씨정권의 확립과 함께 강력한 탄압을 받아 희종 연간에 들어가면서는 거의 가라앉게 된다. 아직 농민이나 천민들은 자신들의 항거운동을 성공으로 이끌 만큼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봉기가 지닌 의미까지 낮추어 평가할 필요는 없다. 탐관오리의 제거나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부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그것이 이후 사회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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