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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이·망소이의 난

농민과 천민의 항쟁, 충청도 일대를 휩쓸다

1176년(명종 6) ~ 1177년(명종 7)

1 개요

망이·망소이의 난은 무신집권기 초기인 1176년(명종 6)부터 이듬해까지 약 1년 반에 걸쳐서 충청도 공주(公州) 명학소(鳴鶴所)를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과 천민들의 봉기이다. 항쟁의 주동 인물인 망이(亡伊)와 망소이(亡所伊)의 이름을 따서 ‘망이·망소이의 난’으로 칭하지만, 항쟁의 발흥지의 지명을 따서 ‘공주 명학소의 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때 서북쪽의 예산(禮山)과 천안(天安)을 비롯하여 충청도 일대에 널리 영향력을 뻗칠 정도로 확산된 농민·천민 항쟁이었다. 난은 망이·망소이가 체포됨으로써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전국에 걸쳐 들불처럼 번진 무신집권기 농민·천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차별 대우 받던 소민(所民)들이 봉기하다

소(所)란 향(鄕)이나 부곡(部曲)과 같은 고려시대의 특수행정구역의 하나로, 금·은·동·철 등의 자연자원을 공급하거나 자기·종이·기와 등 특수한 수공업 공물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전국 대부분이 농경을 주산업으로 하면서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려 사회에서 소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의 공급을 담당하는 지역으로 설정되어 있었고, 따라서 이 지역에 대한 수취는 일반적인 군현에 비해 과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특수행정구역에 소속된 백성들은 일반 군현의 백성들에 비해서 법적으로도 신분상에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명학소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유성(儒城)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 일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 일대가 지하자원이 생산되는 곳이 아니며, 바다에 인접한 곳도 아닌 것으로 보아 명학소는 수공업 집단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탄방동(炭坊洞)이라는 지명이 숯방이·숯뱅이, 즉 숯을 굽는 마을이라는 뜻의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임을 보아 숯을 생산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난을 주도한 망이와 망소이가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이름으로 미루어보건대 소민(所民)으로서 하층의 신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망이·망소이의 난이 시작된 사실에 대해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공주 명학소 사람 망이·망소이 등이 무리를 불러 모아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라고 스스로 칭하며 공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라고 전한다. 이 기록만으로는 난이 어떤 이유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난이 발발한 직후에 주변의 큰 고을인 공주를 함락시켰다는 점을 보면 이 난이 망이·망소이를 비롯한 소수의 사람들이나 소민들만의 주동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일반 군현의 농민들도 여기에 적극 호응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난이 발생한 1176년(명종 6) 무렵은 고려의 정치와 사회 전반에 있어서 큰 변혁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6년 전에 발생한 이른바 무신정변으로 중앙 정계는 큰 격변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1173년(명종 3)부터 시작된 김보당(金甫當)과 조위총(趙位寵)의 난 등 무신정권에 저항하는 서북 지역의 항쟁이 3년 이상 지속되는 등 지방사회의 반발도 거세지기 시작하였다. 고려사회 내부에 축적된 모순이 정치적 격변을 틈타 전국에서 터져 나오려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경 남쪽에서 그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 바로 망이·망소이의 난이었다.

3 충청도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항쟁

1176년(명종 6) 정월에 깃발이 오른 항쟁은 강렬한 기세를 떨치며 확산되었다. 우선 개경의 조정에서는 관원을 파견하여 이들을 회유하려 하였으나 거부당하자, 이들을 토벌할 계책을 세웠다. 봉기 다음 달인 2월에는 장사(壯士) 3천 명을 모아 토벌에 나섰으나 반군에게 패배하였다. 조정에서는 군대의 힘이 부족하니 승려들을 토벌에 동원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었다. 결국 놀란 정부는 회유에 나섰다.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키는 조치가 내려졌다. 특수행정구역이었던 소를 일반 현으로 승격시킨다는 것은 단순히 해당 지역의 행정구역 명칭을 바꾸는 의미를 넘어서서 그 지역민 전체에 대한 신분적인 차별대우를 철폐한다는 실질적인 조치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기존에는 해당 지역에서 특별한 공로를 세운 경우에 향·부곡·소를 군이나 현으로 승격시키거나, 반란을 일으킨 지역을 군현에서 특수행정구역으로 강등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는 결정은 고려 조정의 기본 정책을 역행하는 것으로 대단히 이례적인 조치였으며, 그만큼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반민들은 이 회유조치에 만족하지 않았다. 도리어 세력 범위를 확대해 나가고 있었는데, 그해 9월에는 공주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예산을 함락시키기에 이르렀다. 또한 망이는 공주에서 동북쪽으로 떨어진 충주를 장악하고 있었다. 회유만으로 반란의 확산을 막을 수 없자 정부는 다시 무력 토벌을 시도하였다. 마침 3년 이상 끌어오던 서북민의 반란이 진압되자, 정부는 남쪽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었다. 그해 12월에 대장군(大將軍) 정세유(鄭世猷)와 이부(李夫)를 병마사로 임명하여 두 길로 나누어 예산과 충주를 각각 공격하게 하였다.

정부의 적극적인 반격에 직면한 망이와 망소이 등은 이듬해 정월 항복하였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처벌하지 않고 곡식을 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킨 것이나, 반란의 주동세력을 처벌하지 않은 데서 드러나듯이 당시 고려 조정은 지방에서의 반란을 근본적으로 진압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4 한 달만에 다시 터진 2차 봉기

망이·망소이가 항복함으로써 1차 봉기가 마무리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명학소민들은 다시 일어났다. 1177년(명종 7) 2월의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 파장이 더욱 넓은 지역까지 미쳤다. 우선 반군은 현재의 충청남도 서산에 위치한 가야사(伽倻寺)를 공략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기도 여주와 충청북도 진천으로도 쳐들어갔다. 그리고는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홍경원(弘慶院)을 불태우고 10여 명의 승려들을 살해하고는 주지승을 시켜 개경에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었다. “앞서 우리 고을을 현으로 승격시키고 또 수령을 두어 안무하더니, 돌이켜 군사를 동원해서 토벌하고 내 어머니와 처를 붙잡아 가두었으니,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차리라 칼날 아래서 죽을지언정 끝내 항복하지 않겠으며, 반드시 왕경에 이르고야 말겠다.” 자세한 전말은 알 수 없으나, 이 기록을 통해 망이․망소이가 항복한 뒤에 조정에서 약속과 다르게 탄압을 가했던 정황을 볼 수 있다.

반군의 기세는 더욱 강성해져서 북쪽으로 아산 일대와 청주 관내의 대부분의 지역을 손에 넣기도 하였다. 이에 맞서 토벌군은 망이·망소이 세력의 좌우 측면을 공격하여 주동세력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택했던 것 같다. 우선 우도병마사가 가야산을 중심으로 예산 일대에 위치하고 있던 손청(孫淸)의 일당을 처형하였고, 이어서 좌도병마사는 남적(南賊)의 다른 구심점이었던 이광(李光) 등을 체포하였다. 좌우에서 협공을 받게 된 망이·망소이는 결국 그해 6월 항복을 청하였고, 7월 병마사 정세유에게 붙잡혀 청주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로써 1년 반에 걸쳐 충청도 일대를 휩쓸었던 망이·망소이의 난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5 꺼지지 않은 항쟁의 불씨

무신정권은 토벌군을 파견하여 망이·망소이의 난을 결국 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해결일 뿐, 이들은 항쟁을 불러일으켰던 근본적인 모순은 조금도 개선하지 않았다. 특히 소(所)를 비롯한 특수 행정 구역민에 대한 차별대우, 불교사원들의 수탈, 지방관과 지방민들 사이의 갈등 등은 전국에 걸쳐 공통적으로 곪아가던 문제였다. 망이·망소이의 난은 남부 지역에서 일어난 첫 번째 반란이었는데, 그 이후로도 비슷한 형태의 봉기들은 거의 반세기에 걸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가깝게는 1177년(명종 7)에 전북 익산에서 일어났던 이른바 미륵산적의 난이나, 1182년(명종 12)에 발생한 충청도 옥천과 서산, 그리고 전라도 전주에서의 민란 등을 꼽을 수 있다. 명종 20년대 이후로는 농민봉기가 경상도 일대로 확대되어, 김사미(金沙彌)의 난, 경주 지역의 농민반란 등이 발생하였다.

망이·망소이의 난은 12세기 후반과 13세기 초반에 걸쳐서 활발하게 일어났던 농민·천민 반란 가운데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발생한 사례이다. 비록 이들의 난은 실패했으나, 당시의 부조리에 대하여 저항했던 백성들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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