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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일본원정

바람으로 시작되어 바람으로 마무리된 전쟁

1274년(충렬왕 1) ~ 1281년(충렬왕 7)

몽골의 일본원정 대표 이미지

몽고습래회권(모본)

ColBase(https://colbase.nich.go.jp)

1 13세기의 국제전쟁

1274년(충렬왕 즉위년)과 1281년(충렬왕 7) 두 차례에 걸쳐 단행된 대규모의 일본 원정은 국제전쟁이자 당시까지는 인류사상 최대의 해양원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을 기획하고 실행한 주체는 쿠빌라이칸의 몽골제국이었지만, 공격에 동원된 군사의 상당수는 고려와 남송(南宋)의 군대였다. 쿠빌라이는 몽골에 제압된 고려와 남송의 군대를 자신이 구상한 일본 원정에 대거 동원하였던 것이다. 2차 원정에 동원된 군사의 수는 14만 명에 달했고, 이들을 태운 선박만도 4,400척에 이르렀다. 이러한 규모와 그 역사적 의미에 따라 이 전쟁을 부르는 명칭도 다양하다. 과거에는 ‘여원연합군의 일본원정’ 혹은 ‘일본정벌’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최근에는 이 전쟁을 일으킨 주체가 몽골이었다는 점을 강조해서 ‘몽골의 일본원정’이라고 부르는 편이 좋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원 도적[元寇]’라고 부르거나 ‘몽골의 침략[蒙古襲來]’ 혹은 두 차례 침입이 있었던 해의 연호를 따서 ‘분에이‧고안의 전쟁[文永‧弘安の役]’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전쟁 이전, 두 차례의 전쟁, 전쟁 이후의 시기별로 이 전쟁을 둘러싼 외교적, 군사적 흐름을 간략하게 짚어본다.

2 폭풍전야: 1260년대부터 1274년까지

1200년 무렵, 칭기즈칸이 등장하면서 시작된 몽골의 세력 확장은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급격히 진행되었다. 쿠빌라이칸이 즉위했던 1260년 무렵에는 당시에는 서북쪽으로는 유럽의 초입인 흑해의 북쪽까지, 서남쪽으로는 이집트와의 경계인 지중해의 동안까지, 남쪽으로는 남송과의 경계인 한강(漢江)까지, 동쪽으로는 한반도까지를 모두 그 판도 내에 두고 있었다. 세계제국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육지에서 몽골에 대적할 상대는 스러지기 일보 직전의 남송이 유일했다. 넘쳐나는 몽골의 에너지는 새로운 분출구를 찾고 있었고, 그러던 쿠빌라이의 눈에 들어온 상대는 바로 바다 건너 일본이었다.

몽골이 처음부터 군사적 침략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이전에 일본과의 외교 교섭을 시도하였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에 남아 있다. 1266년(원종 7)을 시작으로 1차 원정 이전에 모두 6차례에 걸쳐 일본에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던 것이다. 이때 고려는 일본으로의 길 안내, 나아가 일본을 항복시킬 사명을 몽골로부터 짊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장차 몽골이 원정을 추진할 경우 고려가 겪어야 할 고통의 크기를 잘 알고 있었던 고려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일본 초유(招諭)를 단념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당시의 재상 이장용(李藏用)의 다음과 같은 말에 잘 드러난다. “세월을 두고 천천히 〈일본이〉 하는 행동을 두고 보다가, 장차 〈중국에〉 입조해오면 귀순할 것을 장려하고 오지 않으면 도외시하여 외딴 곳에서 무지몽매한 채로 홀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편 10세기 이후 주변국가와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었던 일본측에서는 이러한 몽골과 고려의 접근에 적잖이 당황하였다. 당시 가마쿠라[鎌倉] 막부와 공가(公家) 사이에서는 몽골의 초유에 응답할 것인지를 두고 여러 논의가 오가고 있었는데, 결국은 전쟁불사의 태도를 고수한 막부 측의 의견에 따라 몽골의 사신에 대해 일체 응대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바야흐로 전쟁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3 첫 번째 폭풍 : 1차 원정, 1274년

애초에 일본 원정은 1271년(원종 12) 무렵부터 준비 단계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둔전을 마련하여 경작을 시작하는 등 고려는 본격적으로 일본 원정을 위한 병참기지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뜻밖에 터져 나온 삼별초(三別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군과 몽골군이 투입되면서, 일본으로의 출병은 잠시 보류되었다. 반란이 최종적으로 진압된 이듬해인 1274년(충렬왕 즉위년) 드디어 1차 원정이 개시되었다.

이해 상반기 동안 고려에서는 연인원 3만여 명을 동원하여 300척의 큰 배를 포함하여 총 900척의 전함을 건조하였다. 원정군이 기지였던 창원에서 출정한 것은 그해 10월 3일의 일이었다. 홀돈(忽敦)과 홍다구(洪茶丘) 등이 이끈 몽골군과 한군(漢軍)이 2만 5천 명이었고, 고려군은 8천 명이었으며, 여기에 뱃사공과 안내자 등 6천 7백 명이 더해져, 원정군은 총 4만 명에 가까웠다. 고려군을 이끈 것은 삼별초 진압에 앞장섰던, 고려 최고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이었다.

원정군은 이틀 후 쓰시마섬[對馬島]에 상륙하였다. 이곳에서 약 열흘 동안 머무르며 섬을 완전히 장악한 원정군은 다음 목표인 잇키섬[一岐島]을 점령하는 데까지 성공한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 1천여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10월 19일, 원정군은 규슈의 관문인 하카다[博多]에 상륙한다. 이곳에서는 규슈 관내의 모든 무사들이 동원된 채 원정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튿날까지 이어진 전투 끝에 원정군은 10월 20일 밤, 정박해둔 전함으로 일시 퇴각했다. 그런데 이날 밤 폭우를 동반한 강력한 폭풍이 몰아치면서 하카다만에 정박해있던 원정군의 전함 가운데 상당수가 침몰하고, 나머지도 대부분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되었다. 이에 11월 6일, 원정군은 철수를 시작했다. 귀환하지 못하고 전사한 군사가 전체의 1/3에 달하는 13,5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참담한 패전이었다.

4 두 번째 폭풍 : 2차 원정, 1281년

쿠빌라이는 1차 원정의 실패에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원정이 끝난 지 5개월만인 1275년(충렬왕 1) 쿠빌라이는 일본을 회유하기 위한 사신단을 다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막부 정권은 이들 사신단을 모조리 살해해버렸다. 이 사실은 4년 만에 고려에 전해졌다. 1차 원정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낸 자신감의 발로였을 것이다. 동시에 일본에서는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1차 원정을 막아낸 방어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쇼니 츠네스케[少貳經資]를 책임자로 해서 고려 공격을 위해 전함과 무사들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대신 하카다만 연안에 방어시설을 쌓는 등 몽골의 재차 침입에 대한 방비에 전념하게 되었다.

한편 몽골은 숙원사업이던 남송 정벌을 1276년 완수하였다. 이로써 남송의 막강한 수군과 뛰어난 명장들을 손에 넣게 된 쿠빌라이는 이들을 앞세워 제2차 일본 원정을 추진하게 되었다. 1280년 10월까지 몽골은 10만 명에 달하는 원정군을 조직했다. 이들 대부분은 항복한 남송의 군사로 채워졌으며, 총사령관 역시 남송의 수군을 이끌었던 범문호(范文虎)가 맡았다. 일본 원정의 주력부대가 될 이들 부대를 강남군(江南軍)이라고 불렀다.

한편 이번에도 역시 고려는 원정의 전초기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충렬왕은 원정의 총책임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고려군은 전함 900척, 정군 1만 명, 뱃사공 등 1만 5천 명에 군량 11만 석을 준비하였다. 고려군의 총사령관은 70세의 백전노장 김방경이었다. 아울러 1차 원정 이후 몽골로 귀환하지 않고 그대로 고려, 혹은 요동(遼東)에 주둔하고 있던 몽골군과 한군이 동로군(東路軍)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하였다. 이들을 이끈 것은 여전히 힌두와 홍다구였다.

동로군은 요양(遼陽)에 주둔하고 있다가 1281년(충렬왕 7) 고려로 들어와 출정기지인 합포로 집결하였다. 여기서 고려군과 합세하여 그해 5월 2일 출병하였다. 아울러 강남군은 그해 5월 경원(慶元)을 출발하여, 6월 15일에 잇키섬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고려군과 동로군은 우선 쓰시마섬과 잇키섬을 장악한 뒤 규슈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방비가 잘 이루어진 하카다만으로 상륙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원정군은 하카다만 입구에 있는 시카섬[志賀島]를 공략하였다가, 다시 혼슈 서쪽 해안을 직접 공격하는 등 상륙하지 못한 채 날짜를 허비하고 있었다. 이 무렵 군중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였고, 약속했던 강남군도 기일을 훨씬 지나서도 도착하지 않는 등 원정군은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7월 말에 이르러서야 합세한 강남군과 동로군은 규슈 상륙을 재차 시도하였다. 그러나 8월 1일 다시 불어 닥친 태풍으로 특히 강남군은 처참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결국 원정군은 8월 중순 모두 합포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때 강남군 가운데 살아서 돌아온 자는 열에 한둘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바다에 정박하고 있던 함선에 태풍이 불어 닥치자 상륙해있던 군사들 대부분을 그대로 남겨두고 일부만이 남은 배를 타고 퇴각했기 때문이었다.

5 폭풍이 가라앉기까지 : 1281년부터 1290년대까지

이렇게 해서 서쪽에서 불어 닥친 두 차례의 거대한 폭풍은, 일본인들이 말하는 이른바 가미카제[神風]에 의해 차단되고 말았다. 이와 동시에 대륙과 바다에 걸쳐 대제국을 세우려던 쿠빌라이의 꿈도 실패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일본 정벌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2차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바로 이듬해인 1282년, 3차 원정을 위한 전함 건조에 착수하였고, 이듬해에는 사신을 파견하여 항복을 종용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1285년에는 꽤 구체적으로 원정을 준비하여 고려에 군사 1만과 전함 650척, 군량 10만 석을 준비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만주에서 일어난 내안(乃顔)의 반란으로 3차 원정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후로도 몇 차례 일본 원정이 논의되었으나 1294년(충렬왕 20) 1월 쿠빌라이가 사망함으로써 원정 준비는 최종적으로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몽골의 일본원정은 1274년(충렬왕 즉위년)과 1281년(충렬왕 7) 각각 1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단행되었지만, 그 준비와 사후처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10여 년의 기간에 걸친 거대한 전쟁이었다. 이 원정을 두고 많은 역사학자들이 그 동인과 결과에 대해 여러 각도로 연구를 해왔는데, 공통적으로 세계제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던 몽골이 바다 너머까지 장악한 더 큰 제국을 꿈꾸며 시도한 원정이었다는 견해가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 와중에서 몽골은 새로 제국에 편입된 고려와 남송을 원정의 주력으로 활용하였다. 고려는 10여 년에 걸쳐 국력을 총동원하여 그 뒷받침을 해야 했다. 두 차례의 원정이 끝나면서 고려는 큰 피해를 입었다. 반면에 이를 통해 몽골제국 내에서 고려의 위상을 보장받는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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