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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변

무신(武臣)들의 새 세상이 열리다

1170(의종 24)

1 개요

고려 의종[고려](毅宗) 24년(1170)에 발생한 무신정변은 한국사 전체에서도 손꼽힐만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비록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 결과는 100년에 달하는 무신들의 집권이라는 정치적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고려사(高麗史)』의 편찬자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고려시대 역사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었고, 이러한 견해는 현대의 많은 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서는 무신정변 발생의 배경과 그 경과, 그리고 그로 인해 무신정권이 탄생하게 되기까지의 상황을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2 12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무신정변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유가 언급되는데, 우선 그 먼 배경이 되었던 12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의 모습을 살펴보겠다. 문벌이 지배집단을 이루고 있던 고려의 정치와 사회는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여러 가지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고려의 토지제도였던 전시과(田柴科) 체제가 무너지면서 지배층들은 토지를 더욱 확보하는 데에 힘을 쏟고 있었다. 이에 생업을 잃은 농민들은 원래의 거주지를 떠나 전국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특히 일반 군현에 비해 과중한 수탈을 강요받았던 속현과 부곡제 지역에서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각했다. 사태의 수습을 두고 지배층 내부에서는 갈등을 일으켰는데, 이는 치열한 정쟁으로 이어졌다. 숙종[고려](肅宗)대의 이자의(李資義)의 난, 인종[고려](仁宗)대 이자겸의 난(李資謙-亂), 묘청(妙淸)의 서경천도운동(西京遷都運動) 등이 그것이다.

한편 지배층 가운데서도 무신들의 불만은 날로 깊어가고 있었다. 원칙적으로 무반은 문반과 함께 양반으로서 고려의 지배층을 이루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문반과 무반의 지위는 법제적, 현실적으로 동등하지 않았다. 문반이 종1품의 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반면, 무반직의 최고위는 정3품의 상장군이었다. 강감찬(姜邯贊)이나 윤관(尹瓘) 등과 같은 유명한 군사지휘관들도 모두 문관이었다. 무반은 병권은 물론 군사지휘권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고려의 과거제에서는 문과만이 시행되었을 뿐 무과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무반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관직생활을 시작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따라서 무신들 가운데에는 항오(行伍)에서 출세하게 된 미천한 자들이 많았던 까닭에 무반 전체가 천시를 당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급군인들의 불만은 훨씬 더하였다. 원래 고려의 군인들은 군인전(軍人田)을 지급받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가에서 나눠줄 토지가 부족해지자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군인들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고, 이 때문에 군인들은 경제적 곤궁에 시달리는 일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온갖 잡역에 동원되어 혹사당하면서 문신 위주의 정권에 대한 불만을 키워가고 있었다.

3 무신들의 쌓여가는 불만

고려 정치의 불안이나 무신들에 대한 차별, 하급군인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 등은 하루 이틀 사이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모순이 왜 하필이면 의종대에 무신정변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터져 나오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정변 직전 몇 년 동안의 고려의 상황을 살펴보겠다.

이는 의종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향락 생활, 그리고 그에 동원된 무신들의 불만을 들 수 있다. 인종대의 정치적 격변을 거치고 나서 1146년 즉위한 의종은 재위 초반 외척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정치를 일신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그러나 재위 중반 이후로 접어들면서는 정치에 염증을 느끼게 되면서 향락 생활에 젖어들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야로 연회를 베풀면서 측근의 문신들과 어울렸는데, 그 장소는 왕궁뿐만 아니라 개경 인근의 사찰이나 경치 좋은 곳들에 세운 별장 등으로 다양하였다. 대표적인 곳이 보현원(普賢院)이나 연복정(延福亭)이었다. 이때의 모습을 묘사한 기록으로, “임진(臨津縣)에 행차하였다. 다음날 재추인 김영윤(金永胤), 서공(徐恭), 이공승(李公升), 최온(崔溫)과 승선 이담(李聃), 허홍재(許洪材), 김돈중(金敦中) 등과 더불어 남강(南江)에 배를 띄워 날이 다하도록 즐겼다. 사간 임종식(林宗植)과 시어 고자사(高子思)도 연회에 참석하였다. 한밤중이 돼서야 보현원(普賢院)으로 옮겼는데, 시종들은 미처 따르지 못하고, 고자사는 취해서 가지 못하였다.” 고 하거나, “남경을 출발하여 파평(坡平縣) 강에 이르러, 배 가운데서 여러 신하와 함께 연회를 베풀었는데, 시신들이 모두 취하여 예의를 잃었고, 추밀원사 이공승은 쓰러져서 어가 앞에 실었다” 라고 하는 등 점점 도를 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국왕과 신료가 상하의 예를 잃을 정도로 밤낮으로 취하여 여흥을 즐기는 동안 무신과 군인들은 비바람을 무릅써가며 그들을 호위하면서 먼 길을 오가야 했다.

더구나 이들이 연회를 즐긴 별궁이나 정자는 급료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군인들이 피땀을 흘려가며 지은 것이었다. 다음의 일화는 당시 군인들의 비참한 생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청녕재 남쪽 기슭에 정자각을 세우고, 중미정이란 현판을 달았다. (중략) 처음 이 정자를 지을 때에 역군으로 하여금 본인이 식량을 싸오게 하였는데, 한 역군이 매우 가난해서 마련하지 못하여 역군들이 밥 한 숟가락씩을 나누어주어 먹게 하였다. 하루는 그의 아내가 음식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남편에게 먹이고 말하기를, ‘친한 사람을 불러서 함께 드십시오.’라고 하였다. 역군이 말하기를, ‘집이 가난한데 어떻게 장만했는가. 다른 남자와 관계하고 얻어 왔는가, 아니면 남의 것을 훔쳐 왔는가.’ 하니, 아내가 말하기를 ‘얼굴이 추하니 누가 가까이 하겠으며, 성질이 옹졸하니 어찌 도둑질을 하겠습니까. 머리를 깎아 팔아서 사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하면서 그 머리를 보이니 그 역군은 목이 메어 먹지 못하고, 듣는 자도 슬퍼하였다.”

이처럼 의종이 정사에 관심을 두지 않고 향락을 즐기는 데에만 몰두하자 일부 문신들은 극력으로 국왕의 실정에 대해 간언을 올리기도 하였다.

반면에 이를 부추기는 측근의 신하들도 있었다. 한뢰(韓賴), 이복기(李復基), 임종식(林宗植), 그리고 김돈중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모두 무신정변이 발생했을 때에 무신들이 가장 먼저 제거하고자 했던 문신들이었다.

게다가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의종 21년(1167년)에는 우연한 사건을 발단으로 국왕 친위군의 장교들을 대거 숙청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국왕이 연등회(燃燈會)에 참석하기 위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가 밤중에 돌아오는데, 김돈중(金敦中)의 말이 기병의 화살통을 들이 받는 바람에 화살이 왕의 수레 옆에 떨어지는 일이 있었다. 놀란 왕이 자기를 향해 쏜 화살인 것으로 여기고 급히 궁궐로 돌아와 궁성을 엄중히 경계하게 했다.

이에 의종은 황금 15근과 은병(銀甁) 200개를 현상금으로 내걸면서 범인을 잡아들일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김돈중이 타고 있던 말을 탓하지 않는 이상 이 사건에 범인이란 있을 수 없었다. 불똥은 엉뚱한 데로 튀었다. 대령후(大寧侯) 왕경(王暻)의 가동들에게 혐의를 씌워 이들을 참수하였고, 나아가 임금의 호위를 신중히 하지 않았다고 하여 시위군이라고 할 수 있는 견룡(牽龍)과 순검(巡檢)에서 14명을 귀양 보냈던 것이다.

이렇게 국왕이 문신들과 향락을 즐기면서 무신들을 핍박하던 상황에서 무신들과 군인들의 불만이 점점 높아져갔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1170년(의종 24) 무렵에 이르면 무신들의 불만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해 4월, 의종이 화평재(和平齋)에 행차하여 측근의 총애하는 문신들과 돌아갈 기미도 없이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을 호종한 장병들은 배고픔을 참을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이에 무신정변의 주역인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는 정중부(鄭仲夫)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신들은 기고만장하여 취하도록 퍼마시는데 무신들은 모두 배고파 죽을 지경이니, 이 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이날은 비록 별일 없이 지나갔지만, 이때부터 이들 3인은 거사를 일으킬 뜻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4 정변 3일

의종 24년(1170년) 8월의 마지막 날, 드디어 무신들의 불만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날도 의종은 연복정을 거쳐 흥왕사(興王寺)로 자리를 옮겨가며 연회를 즐기었다. 연복정은 개경 동쪽 근교에 세운 정자인데, 네 귀퉁이에는 아름다운 화초들로 장식하고, 그 아래를 지나는 물에 제방을 쌓아 호수를 만들어 뱃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 제방이 자주 무너져 보수공사를 하는 데에 공력이 많이 들었는데, 여기에는 어김없이 군졸들이 동원되어 그들의 원망 소리가 가득하였다.

의종이 연복정에서 흥왕사로 행차하자, 무신정변의 주역인 정중부는 이의방과 이고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 거사할 때다. 그러나 왕이 만약 곧 환궁하면 참는 게 좋겠고 다시 보현원으로 옮겨가면 기회를 놓치지 말고 거사를 실행에 옮겨야 한다.”

이러한 음모를 모른 채 의종은 이튿날인 8월 30일, 기어이 보현원으로 향했다. 무신들의 불평을 알고 있었던 의종은 보현원에 이르기 전, 오문(五門)에서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戲), 즉 무술 시합을 하도록 명하였다.

그 결과에 따라 상을 내려 이들을 위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의외의 사태가 벌어졌다.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한 사람과 대결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자, 시기하는 마음을 품고 있던 문신 한뢰가 갑자기 그의 뺨을 쳐서 뜰 아래로 떨어뜨린 것이다. 왕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고, 임종식, 이복기도 이소응을 꾸짖고 욕하였다. 이에 정중부, 김광미(金光美), 양숙(梁肅), 진준(陳俊) 등이 안색을 바꾸며 서로 눈짓하였다. 정중부가 한뢰를 꾸짖기를, ‘이소응이 비록 무신이나 벼슬이 삼품인데, 어찌 이처럼 심하게 욕을 보이는가.’라고 하니, 왕이 정중부의 손을 잡아 위로하고 화해시켰다.

사태는 일단 수습되었지만, 거사를 계획했던 무신들은 이를 결행할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 날이 저물어 어가가 보현원 근처에 도착하였다. 이고와 이의방이 먼저 가서 왕의 명령이라고 하며 순검을 집합시켰다. 왕이 막 문에 들어서고 신하들이 물러가려는 틈에 이고 등이 문에서 우선 임종식과 이복기를 살해하였고, 왕의 탁자 밑에 숨었던 한뢰 역시 억지로 끌려나와 곧바로 살해당했다. 이밖에도 왕을 호종했던 문신과 환관들 가운데 상당수가 살해당하였다.

보현원에서 거사를 일으킨 무신들은 문신 가운데 김돈중이 사태의 낌새를 눈치채고 미리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김돈중이 도성으로 들어가 태자를 받들고 성문을 닫은 채 항거한다면 거사를 성공시킬 수 없으리라고 판단하였다. 무신들은 곧바로 개경으로 말머리를 돌려 궁궐과 태자궁을 모두 점령하고는 “무릇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胥吏)라고 할지라도 모조리 죽여서 씨를 말려라.”고 고함치며 문신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였다. 이에 판이부사로 은퇴한 최포칭(崔褒偁), 판이부사 허홍재(許洪材), 동지추밀원사 서순(徐醇), 지추밀원사 최온(崔溫), 상서우승 김돈시(金敦時), 국자감대사성 이지심(李知深), 비서감 김광중(金光中) 등 고려의 고위 문신들 50여 명이 참변을 당하였다.

이날 정중부 등은 국왕을 환궁시켰다. 이때만 해도 정변의 주역들은 국왕 의종의 거취를 결정하지 못한 듯하다. 그런데 상황은 또다시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이튿날인 9월 1일, 국왕 측근의 환관 왕광취(王光就)가 동료들을 모아 정중부 등을 토벌하기로 모의했다는 사실이 한숙(韓淑)이라는 자의 밀고로 누설된 것이다. 그 사실을 안 정중부 등은 어가를 수행하던 내시 10여 명과 환관 10명을 찾아내어 죽였다.

이고와 채원(蔡元)은 왕을 시해하고자 했으나 양숙(梁淑)이 이를 제지했다.

결국 정중부는 국왕을 군기감(軍器監)에, 태자를 영은관(迎恩館)에 유폐했다가, 이튿날인 9월 2일 국왕은 거제(巨濟縣)로, 태자는 진도(珍島)로 추방하였다.

그리고는 왕의 동생인 익양공(翼陽公) 왕호(王晧)를 맞이하여 왕위에 앉혔다. 그가 고려의 19대 임금인 명종[고려](明宗)이다.

5 정변의 수습과 무신정권의 탄생

『고려사』에서는 1170년(의종 24)의 이 정변을 ‘정중부의 난’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정변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실제 이를 주도한 것은 정중부보다도 이의방과 이고 등 하급군관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중부를 비롯해서 이소응, 양숙, 진준 등 이미 장군직에 오른 고위 무신들은 군인들이 국왕을 시해하려 하거나 문신들의 집을 헐어버리려 할 때 이를 만류하는 등 사태의 전개에서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하였다. 반면에 정변을 가장 전면에서 이끌며 가장 과격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이의방, 이고, 채원 등의 하위 장교들이었다. 이들의 지휘를 받으며 제일선에서 살육과 파괴를 자행한 자들은 무명의 군졸들이었다. 쌓여있던 불만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표출되었는지는 다음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한 군사가 병부낭중 진윤승(陳允升)의 집에 가서 속여 말하기를, ‘왕의 유지(諭旨)에 먼저 대궐로 나오는 사람을 승선에 임명한다 합니다.’라고 하였다. 진윤승이 나가니 군사들이 그를 죽이고 큰 돌을 안겨 주었다. 이전에 수성(壽星)이 나타났다 하여 진관사(眞觀寺) 남쪽에 사당을 창건할 때 진윤승이 공사를 감독하였는데, 모든 군사들이 돌을 운반할 때 반드시 저울로 달아서 받았기 때문에 이런 화를 당한 것이다.”

새로운 국왕이 옹립되면서 정변은 일단락되었지만, 사태를 수습하는 일은 고스란히 남겨진 자들의 몫이 되었다. 명종은 즉위하던 날 곧바로 인사발령을 단행했다. 정변 당시 정3품의 상장군 내지 종3품의 대장군이었던 정중부, 양숙, 이소응 등은 모두 종2품의 참지정사나 정3품의 좌산기상시에 임명되었다. 기존에 무신들이 오를 수 있었던 최고위직을 뛰어넘는 인사였다. 그런데 더욱 파격적이었던 것은 이고, 이의방, 채원 등에 대한 인사였다. 기존에 정8품의 산원(散員)에 불과했던 이들은 몇 계단을 뛰어넘어 곧바로 대장군(종3품), 장군(정4품)에 임명되었다. 또한 이고는 위위경을, 이의방은 전중감을 겸임하게 되었다.

모두 문관직으로, 정변 이전이었다면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뒤이어 10월 초에는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렸다.

또한 공신 책봉이 이루어졌다. 정중부, 이의방과 이고를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책정하여 공신각에 그들의 초상화를 걸게 하였고, 양숙과 채원을 2등공신으로 삼았다.

논공행상을 마지막으로 정변은 마무리되었다. 이제는 무신들의 세상이 되었다. 1170년(명종 즉위년)부터 왕정복고가 단행되는 1270년(원종 11)까지 꼭 100년 동안을 역사에서는 무신정권시대라고 부른다. 그 사이 고려 국왕은 명종에서 신종(神宗), 희종(熙宗), 강종(康宗), 고종[고려](高宗)을 거쳐 원종[고려](元宗)으로 이어졌고, 무신 집정자도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慶大升), 이의민(李義旼)을 거쳐 최씨 정권 시대의 최충헌(崔忠獻), 최우(崔瑀), 최항[중기](崔沆), 최의(崔竩)를 지나, 마지막으로 김준(金俊), 임연(林衍), 그리고 임유무(林惟茂)에 이르렀다. 한국사 속에서 유례없는 무신들의 집권기를 열었던 것이 바로 무신정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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