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려
  • 서경천도운동

서경천도운동

서경으로 천도만 하면 모든 문제가 풀리리라!

1127년(인종 5) ~ 1136년(인종 14)

서경천도운동 대표 이미지

평양 대화궁터 성벽과 내궁터

국립중앙박물관

1 서경천도운동 이전의 상황

11세기 중반부터 대내외적인 환경이 안정되면서 고려는 내부적으로 각종 문물 제도를 정비하여 안정된 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종대 무렵은 고려의 전성기로 불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듭된 고위 관료 배출이나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정계에 높이 떠오른 몇몇 문벌들이 등장하였다. 특히 이자연(李子淵)-이자의(李資義) 및 이자겸(李資謙) 계열의 인주 인씨(경원 이씨)를 비롯해 최충(崔冲)-최사추(崔思諏) 계열의 해주 최씨 등이 대표적이었다. 특히 인주이씨는 문종[고려](文宗)부터 선종[고려](宣宗), 예종[고려](睿宗), 인종[고려](仁宗) 등 숙종[고려](肅宗)을 제외하고 대를 이어가면서 왕실과 혼인을 하여 그 위세가 대단하였다.

인주이씨의 이자겸은 예종의 측근으로 발탁되었다가 왕의 장인이 되었다. 그리고 예종 사후 아직 어렸던 그의 외손자를 새 국왕으로 즉위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새 국왕 인종이 즉위하자 이자겸은 왕의 외조부로서 권세가 커지게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다시 자신의 두 딸을 인종의 왕비로 들여보냈다. 권력을 독점하기 위하여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라는 중첩된 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자겸에 대한 예우를 왕태자보다 우대하고 그의 생일을 인수절이라 할 정도였다.

이제 인종은 이자겸에게 부담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러한 인종의 의중을 파악한 측근들이 1126년(인종 4) 2월에는 이자겸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고 도리어 이자겸에 의해 궁궐이 불에 타는 피해를 입는 이른바 ‘이자겸의 난(李資謙-亂)’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최사전(崔思全)이 꾀를 내어 이자겸의 우군이던 척준경(拓俊京)을 설득하여 이자겸을 제거하게 하여 이자겸의 집권은 끝났고, 척준경 또한 정지상(鄭知常)의 탄핵을 받아 정계에서 밀려났다. 이러한 이자겸의 집권과 몰락의 과정을 흔히 ‘이자겸의 난’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정계의 권력 투쟁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126년(인종 4)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 이후 고려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거기에 대외적인 측면에서 있어서도 그해 3월에는 새롭게 동아시아 지역의 강자로 등장한 여진족의 금(金)에 대해서 신하의 예를 취하는 정책을 채택한 바 있다.

그간 얕보고 있던 여진족이었으나 현실적으로 금의 세력이 강해짐에 따라 고려가 외교적으로 저자세를 보인 셈이 되어 고려의 자존심에 상처가 나기도 하였다.

2 서경천도운동의 등장과 전개

이 같은 대내외적인 혼란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서경으로 천도하자는 움직임이 인종대 중반에 새롭게 등장한 정치세력에 의해 상당 기간 주장되면서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이를 흔히 ‘서경천도운동’이라고 부른다. 물론 서경은 고려 태조대 이래로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져 왔던 곳이었다. 3대 국왕인 정종(定宗)도 서경으로 천도를 준비했던 적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인종대의 천도 관련 사건만을 다루도록 하겠다.

이자겸과 척준경의 일파가 제거된 후 김부의(金富儀)·김부식(金富軾) 형제와 이수, 이지저 부자, 그리고 새로 외척이 된 임원애(任元敱) 계열이 크게 부상하였다. 한편 서경 출신으로, 권신이던 척준경을 탄핵하여 그의 실각을 이끌어낸 정지상 역시 중요한 인물로 새롭게 떠올랐다. 정지상은 동향의 승려 묘청(妙淸)과 일관(日官) 백수한(白壽翰) 등을 천거하여 왕의 신임을 받을 기회를 마련해주었고, 근신인 김안(金安), 문공인(文公仁) 등과도 정치적으로 협력 관계를 만들고 있었다. 이처럼 당시 크게 두 계열의 정치세력이 존재하는 가운데, 이중 정지상, 묘청 등이 중심이 되어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였다.

인종은 1127년(인종 5) 3월에 서경에 행차하여 관료조직의 감축, 불필요한 세금의 감면, 농사의 장려, 민생 안정, 질병 구제, 빈민 구제 등 15조에 이르는 유신 개혁안을 선포하였다.

묘청 일파는 고려의 도읍을 서경으로 옮기자는 주장을 폈다. 이들은 1128년(인종 6) 8월에 정지상이 김안과 함께 일을 도모하면서 ‘우리가 만약 주상을 받들고 서경으로 옮겨서 상경(上京)으로 삼으면 당연히 중흥공신(中興功臣)이 되어 (우리) 일신의 부귀뿐만 아니라 자손들까지도 무궁한 복을 누릴 것이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수도를 서경으로 옮겨서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이러한 권력 갈등은 묘청 등을 서경파로 설정하고, 개경의 기존 관료들을 개경파로 설정하여 두 세력 간의 갈등이었던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서경천도파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당시 유행하고 있던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과 칭제건원(稱帝建元),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 등을 전면에 내세웠다. 묘청과 백수한의 음양비술을 믿었던 정지상이 ‘상경(개성)은 기업(基業)이 이미 다하여서 궁궐이 모두 불에 타 남은 것이 없으나, 서경에는 왕기(王氣)가 있으니 마땅히 옮겨서 상경으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말하거나, 묘청 등이, “저희들이 보기에 서경(西京) 임원역(林原驛)의 지세(地勢)는 음양가(陰陽家)들이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에 해당합니다. 만약 궁궐을 세워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신다면 천하를 아우를 수 있어 금나라가 예물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해올 것이며 36국(國)이 모두 신하가 되어 굴복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서경으로 천도만 한다면 그 기운을 받아 고려의 국운이 다시 융성해지고, 대외관계를 비롯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인종도 설득되어서 마침내 1128년(인종 6)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인종은 묘청의 말대로 임원역 지역에 대화궁을 짓고, 1131년(인종 9)에는 그 안에 팔성당을 두는 등의 각종 시설을 갖추고 여러 차례 행차하였다. 다만 인종은 칭제건원과 금국정벌에 대한 건의는 수용하지 않았으나, 이 건의는 지속되었다.

3 묘청의 난 발발과 진압

이처럼 서경천도운동이 진행되면서 그에 반대하는 김부식 등의 목소리도 점차 높아졌다. 그런데 마침 서경에서 재난이 자주 일어나자 반대측은 묘청의 처단을 요구하는 등 격렬하게 반응하였다. 이러한 상반된 분위기 속에서 1134년(인종 12) 8월에 묘청은 서경으로의 행차를 요청하였는데, 김부식 등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다. 이에 묘청은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목적을 달성하고자 이듬해 정월에 서경에서 분사시랑 조광, 분사병부상서 유감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이들은 개경 출신의 모든 이들을 가두고 개경과 서경을 잇는 군사, 교통상의 요지인 자비령(慈悲嶺)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 군의 이름을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였다.

이 반란은 갑자기 결정되었던 듯하다. 이는 천도운동의 핵심 인물들인 정지상과 백수한, 김안 등이 반란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개경에 있었던 점으로 짐작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묘청의 거병은 고려정부에게는 반란이었고, 이에 정부는 김부식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토벌군을 편성하였다. 그 토벌군은 중군, 좌군, 우군의 세 부대로 편성되었으며, 김부식 외에 임원애, 윤언이(尹彦頤), 김부의, 윤언민(尹彦旼), 이주연, 진숙 등이 각 군의 지휘부에 임명되었다.

김부식은 서경으로 출정하기에 앞서 서경에서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묘청과 같은 세력이었던 정지상, 백수한, 김안 등을 잡아 죽였다. 사실 이들은 묘청의 반란을 모르고 있었을 정도로 이 반란과는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김부식은 서경을 포위한 채 지구전을 쓰면서 묘청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항복을 종용하였다. 생각과 달리 조정이 강경하게 대응하자, 조광은 묘청과 유감 등을 직접 죽이고 윤첨을 보내 항복할 의사를 전했다. 하지만 조정은 윤첨을 옥에 가두는 강경책을 썼다. 이렇게 되자 조광을 항복을 해도 처벌을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끝까지 저항을 하였다. 결국 반란은 해를 넘겨 이듬해 2월이 되어서야 평정되었다. 이 같은 반란의 전개과정으로 보건대, 묘청이 주동자처럼 언급되지만 ‘묘청의 난’으로 알려진 이 반란의 실제 주동자는 조광이 아니었을까 한다.

4 서경천도운동의 영향 및 평가

반란의 진압 이후 정국은 토벌을 성공적으로 이끈 김부식 등이 주도하였다. 이후 인종대는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하게 예제, 과거제 등의 정비를 통해 국가지배체제를 안정시키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고려 초 이래로 중시되었던 서경의 위상은 크게 하락하고 말았다.

근대로 오면서 칭제건원과 금국정벌론을 앞세운 묘청 등의 서경천도운동에 대해 금나라에 대한 적개심의 표현이라거나 자주 독립정신의 발로였다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하며, 한편에서는 당시의 정세상 금국정벌은 도저히 불가능한 무리한 주장이면서도 그것이 국력 배양을 통한 것이 아니라 단지 지리도참설에 의거한 주장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왕권을 강화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측과 왕권을 견제하려는 문벌 세력간의 갈등과 대립의 결과로 이해하기도 한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